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르멘 Jul 11. 2024

마음 소방훈련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해

내가 금과옥조로 삼는 문장이 있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평화롭게 받아들이는 마음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과감하게 바꿀 수 있는 용기와

이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독일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의 평정 기도문이다.




가끔 그런 날이 있다.


내가 잘못하지 않은 일 혹은 내가 가진 의도와 다르게 직장에서 내 언행이 문제시되는 날.


하루는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팀장이 부르는 날이 있었다.


"요새 무슨 일 있나? 잔소리 좀 하려고 불렀다"

첫마디를 듣는 순간부터 미간이 찌푸려진다.


먼저 내 마음에 드는 생각은 '의아함'. 무엇을 잘못했는지 짚이는 게 없다.

아니면 내가 모르게 저지른 일이 있나? 자기 검열 엔진이 가열차게 돌아간다.


결국 들어보면 이렇다.


보고일자를 왜 이렇게 급하게 잡았는지, 보고내용은 준비가 됐는지, 일정표에 순서가 일정대로 나열되어 있지 않는데 내가 일부러 그렇게 편집한 것인지,

일정 중 한 안건은 본인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인데 어떻게 할 계획인지.

마지막으로 회의자료의 특정 단어를 짚으며 "참 보고서를 창의적으로 써" 하는 비아냥으로 마무리.

 

찌푸려지는 미간을 부여잡고 나는 '감정적 반응'과 '이성적 대응' 사이 어딘가에 자리 잡는다.


먼저 보고일자를 급하게 잡은 사유를 설명하고, 급했음을 인정한다.  

보고 자료는 어제 일자가 결정되어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나, 오전 중 전달하겠다고 계획을 보고한다.

일정표의 편집은 내가 의도도, 행위도 하지 않았기에  시시비비를 밝힌다.

보고되지 않은 안건은 어제 보고하려 했으나, 팀장님이 부재중이어서 안 그래도 금일 오전 보고 드리려고 했던 것임을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비아냥에 가까운 지적엔 관련 자료는 말 그대로 초안이며, 최종 검토는 당연히 팀장님이 해주셔야 마땅하다고 반박(?)한다.


그리고 위 일련의 내용을 모두 '시행완료' 했지만, 내 감정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의 말기분이 나쁘고, 상황적으로 억울하다.

감정적인 반응과 이성적인 대응이 섞여있는 나의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또한 똑같은 내용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그저 부서장으로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코멘트해줬다면 순순히 받아들였을 텐데 떠보는 질문이나 감정적 태도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요새 무슨 일 있나?"라는 말에서 마치 내가 공사를 구별 못하는 사람으로 평가받는 기분,

 "보고서를 참 창의적으로 써"라는 비아냥에서 내가 쓴 단어 하나로 보고서 전체가 평가절하 되는 기분.

 

부정적 편견과 선입견이 가득한 부서장의 피드백엔 나 역시 이성적 대응이 힘들다.


"아래 표를 보세요. 제가 일정을 바꾼 게 아닙니다. "

"그 정도는 팀장님이 검토해 주셔야죠."


시시비비를 따지는 내 말투에도 당연히 나의 그런 감정이 드러났을 것.

참 쓸데없는 감정소모다. 쌍방 모두.



그런데 생각해 보면 오늘 아침 아이에게 나도 그랬다.

요새 아침에 일어나 군것질을 하거나, 사는 것에 재미들인 아이가  오늘도 역시나

"어제 먹고 싶다고 말한 젤리를 지금 사겠다"라고 졸랐다.

어제 사주기로 한 약속이니 지키지만, 어린이집 가기 전에 간식을 사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엄포를 놨다.


그리고 아침을 먹고 나서 사 온 젤리를 까먹더니, 나머지는 어린이집 친구들과 나눠먹겠다고 했다.

그러라 해놓고 마지막 준비를 하고 나오려는데, 아까 남긴 젤리가 어딨는지 모르겠다는 아이.


"어디다 놨어?"

"가방 앞에 놨는데. 없어."


그때부터 나는 마음이 촉박하고, 아이의 우는 소리에 부아가 치민다.

군것질을 애초에 사주는 게 아니었는데 하고 쓸데없는 후회를 하고 아이에게 잔소리를 1절만 하면 될 것을 2절, 3절 하는 더 쓸데없는 짓을 한다.


"울지 마. 운다고 해결 안돼."

(이게 4살 아이에게 할 말은 아닌데)


" 어디다 놨어? 엄마가 잃어버렸어? 네가 잃어버렸잖아. 힘들게 아침부터 나가서 사 온 건데!!!!"

(이미 아이에 대한 비난과 힐책이 가득하다)


결국 킥보드 가방에 아이가 넣어둔 젤리를 극적으로 찾자 아이는 "여기다 내가 넣어놨어" 하고 시무룩하게 말한다.


그제야 현타가 온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아이를 대역죄인 취급하며 몰아붙였는가.

그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하고 반응하는 모습을 또 아이에게 가르쳤구나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아이를 믿지 못하는 내 마음과 아이의 감정보다 내 감정이 앞서서 나간 날 선 말들이

내가 회사에서 들은 억울한 말들과 무엇이 다를까.


아이는 심지어 나처럼 시시비비를 가리지도 못한다.

아이는 당연히 떠보거나 비아냥 따위를 하지도 못한다.


결국 나는 점심시간 아래 문장을 다섯 번쯤 썼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평화롭게 평화롭게 평화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마음마음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과감하게 과감하게 과감하게 바꿀 수 있는 용기용기용기

 그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지혜지혜를 주소서 주소서 주소서"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은 뭘까.

타인이다.

한 정신건강의학자의 말에 따르면 타인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정신병에 가깝다고 한다.

그런데 왜 화를 내는가.

타인은 바꿀 수 없다. 남은 물론이고 내 자식도 마찬가지.


내가 바꿀 수 없는 두 번째는 상황이다.

타인과 연결되어 일어나는 상황.

팀장과 나의 상황, 나와 아이의 상황. 이미 벌어진 그 상황은 그때도 지금도 바꿀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의 말, 나의 태도, 나의 마음.

나의 말의 속도와 어조.

나의 태도의 결과 방향.

나의 마음의 온도와 채도.


내가 바꿀 수 없는 사람에 대해 나의 말은 빠를 필요가 없다.

말을 속사포처럼 해댈 필요가 없다.

나의 말은 많을 필요도 없다.

1절만 하면 될 것을, 2절 3절 꼬리에 꼬리를 물어 내무덤을 팔 필요가 없다.


나의 태도는 온 힘을 다해 그 사람을 공격하기 위한 날을 세울 필요가 없다.

그 사람은 내가 아무리 공격해도 바뀌지 않는다.


나의 마음은 지나치게 뜨겁거나 차갑고, 지나치게 어둡거나 밝을 필요가 없다.

나의 마음의 온도와 채도는 내 마음 하늘 아래 일일 뿐이다. 타인의 마음엔 다른 하늘이 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한 지혜는 하루아침에 생기진 않는다.

심지어 매일 매 순간 까먹기도 한다.

그래도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훈련해야만 지혜가 겨우 생겨난다.


돌이켜보면, 내가 회사에서 감정적으로 변할 때와 집에서 감정적으로 변할 때는 비슷하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 처했을 때, 내가 좋아하지 않는 언행에 마주했을 때.

나는 때론 불같이 화를 내고, 때론 하나마나한 잔소리를 하고, 결국은 후회할 핀잔을 늘어놓는다.

내가 만약 회사에서 나를 이성적으로 구해내지 못하면, 결국 집에 돌아가서 나는 아이를 피해자나 가해자로 만든다.

또한 내가 집에서 이성을 차리지 못한다면, 회사에 가서도 나는 가해자거나 피해자로서 상황을 바라보게 된다.


결국 나의 말, 태도, 마음.

3 가지만 변화시킬 수 있으니 이 3가지 만을 관리하고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는 이걸 '마음 소방훈련'으로 부르기로 했다.

불이 날 경우를 대비해 평소에 소방대피훈련을 하는 것처럼, 내 마음에 불이 났을 때를 대비한 소방훈련이다.  


<마음소방훈련>


1단계. 말.

"나의 말은 1절만 느릿느릿하게"


내 귀에 들리는 말이 내 귀에 거슬리는지 아닌지를 인지하며 말을 내뱉자. 그러려면 천천히 말해야 한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라는데, 듣기 싫은 말은 한 번만으로도 족하다.

2절, 3 절하는 순간 1절도 잊게 된다.


2단계. 태도.

"나의 태도는 단호하지만 친절하게"


내가 아주 싫어하는 훈육방법의 태도이지만 이것만큼 적합한 방향성을 나타내는 말이 없다.

단호함은 나의 중심, 친절한 것은 나의 기품이라고 생각하고 지키자.


3단계. 마음.

"타인을 미워하는 마음은 나에게 독"


타인을 미워하고 , 탓하고, 비난하는 것은 결국 나에게 독이 된다.

나의 마음 건강을 위해 독을 뿌리는 짓을 거두자.


물론 이러한 선언과 훈련에도 불구하고 피곤한 날,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은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그런 날은 또 써보는 거다.


1절만 느릿하게, 단호하지만 친절하게, 독을 품지 말자.

그리고 최근 최화정님이 이런말을 했으니 참고.

"허리 펴고 입꼬리 올리면 세상 못할 것 없다"

실제로 최화정님의 어머니가  항상 해주던 말이라고 한다.


그게 내가 회사에서도 가정에서도 나를 지키는 방법이니까.

그게 결국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 자신과 아이를 지키는 방법이니까.


이건 짧은 선택이 아닌 긴 생존의 문제니까.

그리고 순간이 모여 생이 되니까.


오늘도 마음소방훈련에 들어갑니다.

에엥에에엥~~~~~~~~~~~~~~~

이전 27화 사소하게 삶은 시작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