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준원 Aug 28. 2019

내 안의 낯선 타인

내 삶의 주인은 내가 맞을까?


불교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그냥 불교 모임에 몇 번 나가본 사람이라도, 아니면 그냥 불교의 승려와 대화를 좀 해보았거나 유튜브에서 불교 관련콘텐츠를 어쩌다 경험한 사람이라기억할 것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나’라는 것은 없다는 무아론을. 불교에서 존재세계에 대해 전제하는 테제는, 존재세계는 동일성이 없는 허상이라는 것 諸行無常, 존재세계의 모든 현상들은 빠짐없이 고통이라는 것 一切皆苦, 그리고 존재세계 어디에도 나라는 것은 없다는 것 諸法無我, 이렇게 세 가지이다. 굳건히 믿고 있던 자기자신의 존재성을 의심하는 눈으로 쳐다보아야 하는 무아론은, 나머지 두 조목도 가히 충격적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이고 어색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무아론은 제행무상이라는 존재론적 선언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명제이기도 하겠지만, 무상한 존재세계를 굳건한 것으로 파악하는 인식의 오류를 지적하는 인식론적 측면을 강화시키는 효과를 가질 수 있다. 소승과 대승의 교체기에 등장한 [금강경]에, 그리고 팔만대장경을 200 자로축약했다고 평가받는 [반야바라밀다심경], 줄여서 [반야심경],에 무상론의 연결선상에서 주장되어 있다.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실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식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허상이며, 따라서 텅 비어 있는데 [공 空하다!!] 이것은 자기 자신 즉 자아로 파악된 허상에도 동일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본래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자아라는 굳건한 존재로 생성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연기적 작용에 의한 인식의 오류이다. 다만 그 인식을 누가 한 것인지 그 주체가 없다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절대 거부 불가능한 확실한 존재로 규정했으며, 중세의 콤플렉스를 벗어난, 인식론을 기반으로하는 근대철학이 가지는 핵심적 요소이며, 존재론이 성립하는 기본 조건이 되는 자아라는 개념의 실체는 석가모니에 의해 벌써 2천 5백년 전에 이미 시원하게 부정되어 있었던 셈이다.

 

존재론적 측면에서 불교의 삼법인을 이해하는 것, 혹은  진리로 받아들것인가는 차치하더라도, 그리고 무아론의 개연성도 일단 유보한 상태에서라도, 무아론에 대한 불교의 설명은 관심을 할애하여 잘 들어볼 가치가 있다. 자기 자신의 판단에 의거한 의지적 선택이라 믿었던 많은 행동들이 실제로는 ‘의지’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태에서 별개의 시스템적 과정을 거쳐 진행된, 무명의 업식에서 기인한 연쇄적 반응현상이라는 주장을 말이다. 인식에 의해 존재가 만들어졌는데 그 인식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진행된 것이니 인식한 것은 누구이고 그 인식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과 자아는 또 무엇인가? 모든 행위와 인식을 결정하고 수행한 현상은 있는데 행위를 수행한 ‘자신’ self 이 존재함을 찾을 수 없는 말이다. 예를 들어, 겨드랑이를 간질이면 못견디게 괴로운데, 오히려 웃음이 나오는 현상은 내가 선택한 의지적 행위가 아니다. 저절로 그렇게 된다.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도 웃음을 웃으면 짜증스럽던 일이라도 갑자기 가볍게 느껴지는 것도 자신이 “이렇게 해야지” 했던 일은 아니다.그러니 웃은 것도 내가 아니요, 가벼워진 마음도 내 마음이 아니다.


우리는 종종 자기 자신은 맘 먹은대로 살 수 있지만, 남을 내가 생각한 것처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도 맘먹은 대로 움직일 수 없는 셈이다. “자유자재” 이런것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반야심경]에서 무상과 무아를 이해한 설법하는 주인공의 이름을 ‘관자재보살’이라 한 것은 탁월한 문학적 선택이다. 자유자재는 논리적으로 설정되고 문학적으로 구현된 보살한테서나 그 깨달음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것은, 그러니까 자유자재하지 못한 것은, 불교의 논리를 따라가 보면, 존재세계에 대해 그리고 우리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하는 비뚤어진 무명의 시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무아론과 비교적 근대의 학문인 심리학은 모두 자신이라고 착각하지만 자신이 아닌, 혹은 스스로 파악조차 어려운 자신을 설정하여 설명한다는 면에서 유사한데, 그래서 불교만이 아니라 심리학이라는 학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자기 내부의 의지나 의도 그리고 판단을 가진 이성, 혹은 이성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는 생각의 작용과 그 이성적 생각의 마당에서 인식하기 어렵거나 통제되기 어려운 현상적 존재를 분리하는 사고가 가능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나는 분명히 화해를 하러 갔는데, 막상은 오히려 더 심하게 싸우고 돌아오는 경험흔히 있는데, 화해를 하겠다는 이성적 의지는 기어이 더 심하게 싸우고야 마는 현상적 존재를 미처 인식하지 못했거나, 인식하였더라도 그 존재를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로미오가 티볼트를 죽이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그는 자신의 사촌 머큐쇼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올랐지만, 막상 티볼트 죽이고 나서는 “나는 운명의 조롱을 받고 있구나”라고 말하면서 곧장 후회한다. 복수를 하려고 해도 그렇게 막무가내로 칼을 들고 티볼트를 쫓아갈 일은 아니었다는 것을 로미오의 이성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날 결혼까지 한 마당에 목숨을 걸어야 하겠는가? 자기가 티볼트를 죽이던, 티볼트에게 죽던 사랑하는 줄리엣과는 그것으로 마지막이다. 여기서 '그것'은 티볼트에게 칼을 들고 달려가고자 하는 결정을 가리킨다. 분명 우리가 이해하는 이성의 결정은 아니다. 감정에 이끌린 것도 아니다. 감정에게 결정의 자리를 내 주었다면 그 또한 로미오의 이성이 결정한 것일테니까 말이다.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어야 한다. 자기도 모르게 저지르게 되고 행동을 저지르고 나서야 근대적 자아인 이성이 작동했다면, 행동을 결정한 것은 로미오가 알지 못하는 자기 내부의 이성이 아닌 어떤 힘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화해를 하려고 했던 자아라고 여겼던 이성과 의지는 무의미하거나 물리적 실체가 없는 의식으로만 존재하는 어떤 의지적 힘 energy 이고, 싸우겠다는 현실적 자아는 이성과 분리딘 채 이성에 의해 인식되지 못하거나 통제하지 못하는 별개의 존재라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줄곧 자아 혹은 자아의 일부라고 여기던, 현실적으로 늘 이성보다 더욱 결정적인, 그 존재는 자아가 아닌 타자라는 말이 된다. 이성으로서의 자아의 입장에서는 통제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하고, 동일성이 파악되지 않으니 실제로는 타자인 그 얼굴도 모르는 낯선 존재에게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는 관계 없는 방향으로 이리저리 끌려다니게 된다. 그러니 삶은 고통일 수밖에 없다.인간의 삶이 갑자기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은 이성적 판단과 결심만으로 자신의 삶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심리학, 특히 20세기이후의 심리학이 성립하려면 자아가 파악하지 못하는 자기 내부의 타자가 혹은 이성적 자아와 분리된 자아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자기의 몸이지만 내 뱃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본 적이 없으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기의 마음이지만 그 안에 무엇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알지 못한다. 있는 줄도 몰랐으니까. 잠재의식이나 무의식이라는 개념도 그런 것을 가리킨다. 참선을 오래한 선사나 종교적 신념이 강한 청빈한 목사 같은 경우는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서 무의식은 의식보다 더 본질적이며 솔직하고 힘이 세고 결정적인 타자이다. 의식의 노력은 왕왕 무의식의 충동에 굴복하고 고통을 받는다. 고통의 감정은 프로이트에 의하면 초자아 super-ego의 개입이다. 그러니, 도덕심이 높은 사람일수록 고뇌가 많고 고통이 심한 것은 이해하기 쉬운 메커니즘이다. 프로이트는 억압에 의해 얼굴을 숨긴 콤플렉스는 무의식의 차원에 저장된다고 했는데, 좀 더 결정적인 이 자아는 이성의 차원에서 보면 통제 불가능한 낯선 타자일 뿐이며, 그는 의식이 메커니즘이 만들어낸 괴물일 뿐만 아니라 안타깝게도 타자라고 하기에는 자기 자신에 속해 있는 자기 자신이다.


심리학은 모든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나 삶이 지속되는 한 늘 함께 존재하고 있는 이 괴물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실험의 의거하는 과학이지만 철학 만큼이나 가정적이고, 가능적 사변의 요소가 강하여 결정적으로 이렇다 할 만한 것은 없다. 철학은 내용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말처럼 심리학도 내용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심리학적인 구조를 이해하고 심리를 바라보는 자세를 배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는 확실하다. 스스로가 알지 못하는 낯선 존재가 자기 내부에 있다는 사실이다. 타자이지만 자신의 내부에 있으니 자아라고 해야 하고, 자아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낯설고 잔인하다.


그렇다면 불행은 이 낯설고 잔인한 괴물을 적절히 처리하지 못해서 생겨나는 것이고, 그런 만큼이나 행복은 자신의 내부에 낯선 괴물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운이 좋은 자는 노력 없이도 그 낯선 괴물이 행복이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행동 결정을 반복적으로 해주기도 하겠지만, 누군가는 그런 우연한 행운이 없어서 평범하게 고통스럽기도 하다. 심리학에 확실하게 동의된 결론이 없는 만큼 어떤 방법도 결과를 보증하지는 않지만 한가지는 확실하다. 우연의 행운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 본질적 자아일 수도 있는 그 낯선 타자를 인지하지 못하면 결국 행복 쪽으로는 발도 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 백 번 싸워도 절대 위태로워지지 않는다고 말한 중국의 손자는 적을 모르고 나도 모르면 매번 위태롭다는 경우도 설명하였는데, 그 낯선 적이 내 안에 있는 줄 몰랐다면,  그 자체로 고스란히 나도 모르고 적도 모르는 최악의 전투상황이 될 수밖에 없다. 행복은 커녕 고통만 반복하게 된다. 따라서 낯선 타자를 고려하지 않으면 불행은 운명이 되고, 자동적으로 행복은 초월적인 것이 된다. 초월적이라는 것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그러니 자신의 삶을 불행으로 여기는 평범한 심리는 세상의 진리가 되고, 일상의 삶을 이탈하여 환상을 따라가느라 이리저리 헤매는는 것은 누구나 즐기는 상식적인 쾌락이 된다. 환상을 좇는 자의 대부분은 확신을 가지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달리 방법이 없으니 그것에라도 한 번 매달려 보는 것이다. 사이비 종교 같은 것을 보면 이해가 간다. 그래서 공부의 목적은 심리학적 인간을 탈피하여 철학적 인간으로 성장하는 데 있다.


뇌과학자들은 인간의 심리가 많은 경우 뇌의 물리적 특성이나 변화에 따른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뇌의 특정 부분이 발달하면 그에 따른 성격적 특성을 가진다는 것도 상당히 밝혀내었다. 다만 재미있는 사실은 뇌과학자들이 밝혀낸 것은 대체로 일탈이나 특정 능력의 확대와 관련된 것들이라는 사실이다. 뇌의 어떤 물리적으로 비정상인 상태가 특정 규범을 무시하는 원인이 되거나 상식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행동을 이끌어 내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으로 뇌의 어떤 물리적 특성이나 변화가 도덕적 행위를 이끌어 낸다는 실험은 없는 듯하다. 평온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뇌의 파장에 대한 담론도 피상적으로는 출현하였으나 철학적 사고와의 관련성을 밝혀 내기에는 아직 먼 듯하다. 자비명상을 하는 고승에게서 특정 뇌파가 많이 발생되었다는 정도는 알려져 있지만, 뇌파를 조작하여 자비로운 사람을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 수준으로 뇌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뇌를 조작하여 새로운 인격을 얻는다면 여전히 이성적 사고의 주체를 진정한 자아로 규정하는 것은  부정하게 된다. 뇌를 자극하여 인격이 변화한다면 인격은 이성이 아닌 별개의 조직을 조작하여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논의 중인 낯선 타자는 어쩌면 뇌라는 미지의 물건인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그것이 뇌라도 여기고 행복을 성취하는 수행 하는 것 가능한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잠시나마 유용하기까지 하다. 물론 이성적 사고도 현재로서는 뇌에서 이루어 진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뇌를 전체적으로 뭉뚱그려서 ‘낯선 타자’로 간주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겠지만 뇌과학의 측면에서보면 어차피 이성이란 처음부터 없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그 낯선 타자와 뇌는 일단 많이 닮아 보인다. 뇌는 이성적 자아이며 근대성의 상징인  ‘내’가 아니다. ''라는 이성적 자아는 뇌라는 곳에서 활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뇌는 내가 배가 고플 때 배 고프다고 의식에 신호를 보내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배가 고프다는 신호를 보내고 나의 이성은 식사를 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생리학자들은 밥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시장기를 느낄 때 물을 마셔보라고 권유하는데, 이는 몸에 수분이 부족할 때도 뇌는 식사가 부족한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뇌는 그다지 스마트하지 못하다. 이 사실을 아는 이성은 일단 물을 마셔 볼 것을 결정할 가능성이 있지만, '나'는 그냥 식사를 할 가능성도 만만치 않다. 건강에 대한 조언들을 보면 '뇌를 속여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한다. 이런 것을 보면 뇌는 꽤 미련해서 영리함과는 거리가 먼 존재이다. 속이면 쉽게 속기도 하는 그런 존재이니 말이다. 담배를 피우면 얼마 가지 않아 중독되고, 몸을 편한 곳에 뉘이면 일어나지 않으려고 한다. 이익이 있는 곳에서는 그 이익에 눈을 팔게 하고 침을 흘리게 하며, 섹시한 이성을 보면 성욕에 몸이 달아오르게 만들기도 한다. 뇌는 그냥 그렇게 원초적 원시림 같은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근대정신이 믿는 인간이란 이성적 가치관 자리하지 않는다.


반대로 심리학자들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도덕이나 정당함에 대한 센스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러니까 원초적 우림지대에도 약간의 도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보기에는 이성이 없는 우리집 강아지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진다. 근대적 인간인 우리들은 이성을  자기자신으로 파악하며 살고 있으며, 이성을 도덕과 일치시키기도 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이성적 의지를 가지고 부당함 보다는 공정함으로 스스로를 이끌어 가려고 한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반대 방향으로도 마찬가지이다. 경우에 따라서 인간이 개만도 못한 행동을 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이 타고난 도덕심도 이성적 판단으로 비도덕적 행위로 이끄는 메커니즘을 마찬가지 방식으로 실행에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성 그 자체로 도덕적 자산으로 규정짓는 것이 자명한 것은 아니다. 이성이 강한 사람이 도덕이 미약한 원시적 본성을 교정하여 도덕적 자아를 이룰 수도 있지만, 마찬가지 확률로 선천적으로 가지고 나온 도덕을 교정하여 비도덕 자아로 만들 수 있는 이성의 힘도 강하기 때문에이다. 인간이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도덕’이 아닌 사회의 ‘규범’을 지키는 것이고, 이성적 판단은 사회에서 규범을 지키는 편이 자신의 삶에 좀 더 유리하다는 이성적 계산 때문이라는 심리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의 말이 도덕철학자들의 말보다는 더 설득력있게 들리는 맥빠지는 자리이다. 이성은 곧 도덕적 업그레이드라는 근대철학의 신념도 맥이 빠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류는 늘 그런식으로 생각해 왔으니 근대철학만 물고 늘어질 일도 아니다.   


불교에서는 보는 것과 아는 것, 그리고 그것을 실행할 능력을 동일시하는 어법을 가지고 있는데, 실제로 진리를 접하는 순간 이해와 실행의 단계를 일순에 처리하여 자신의 인생으로 만드는 사람은 극히 소수일 것이다. 초전법륜을 받은 다섯 비구는 석가가 깨달은 진리를 듣고 이내 아라한이 되었다는데 이것을 믿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노자도 자신의 말은 지극히 쉽다고 하였으나 사람들에게 [노자도덕경]은 지극히 ‘어려운’ 책에 속하고, 공자도 ‘인’은 행하고자 하면 곧장 그 안에 인이 생긴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인을 옹호하고 불인을 미워하는 자를 보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갑자기 깨닫는다는 돈오가 노자의 교조나 공자의 교조에서도 그리고 심지어 석가가 그랬다고 해서 다른 사람까지도 가능한 것인지 나는 확신이 없다. 돈오와 점수는 그 가능성과 적절성을 놓고 벌어진 중국불교사의 가장 뜨거웠던 논쟁이 아니던가? 공자 자신도 50에는 천명을 알고, 70에는 마음 가는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게 되었다고 했는데, 이성적으로 천명을 이해하고도 자아의 내부에 동거하고 있는 낯선 괴물을 길들이는데 20 년이나 시간이 걸렸다는 고백이다. 내 안에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동거중인 이 낯선 괴물을 길들이는 일이란 절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거래하는 방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