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딴짓
화가를 다룬 영화는 많았다. 그런데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한 화가의 삶과 예술을 조명한 영화가 있다. ‘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영화는 캐나다가 사랑한 민속화가 모디 루이스의 일대기이다. 그림 애호가로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영화였다.
화가는 그림에 자신의 영혼을 담는다는 말이 있다. 그런가 하면 그림은 화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액자라는 비유도 있다. 모디의 삶은 소박했지만, 그녀의 그림처럼 컬러풀하고 정감 넘치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시골 마을, 외딴 곳의 작은 집... 게다가 모디는 관절염으로 거동이 자유롭지 못해 집밖을 외출한 적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영화 속에서 남편에게 말한다. "에브, 당신만 있으면 난 더 바랄 게 없었어."라고... 그녀의 행복은 화창한 그림에 담겨 있다. 밝은 색채와 따뜻한 톤, 동식물의 생기있는 표정과 몸짓... 나이브 아트 (naive art)라는 말 그대로, 순수하기 그지없는 시각이다.
그녀에겐 그림을 알아봐주는 세련된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가 모디에게 어느 날 부탁했다. "그림 그리는 걸 가르쳐 줘"라고... 모디는 정색하고 말한다. "그림은 그리고 싶은 걸 그리는 거야"라고... "그림은 가르칠 수 없는 거"라고... 유명해진 덕분에 우리에게도 알려지긴 했지만, 모디는 그림이 인기를 얻지 않았더라도, 작은 집에서 행복하게 살지 않았을까 싶다. 흡연으로 인한 폐기종 탓에 67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거동이 부자유스러워서 건강이 빨리 악화된 것일 수도 있겠다. 병상에서 그녀의 죽음을 예감하고 안타까와하는 남편에게, "난 사랑받았어 (I was loved)” 라고 오히려 위로하는 그녀. 그러고 보면, 어떤 상황이라도 좋은 면을 보고 만족하는 따뜻한 그녀의 품성이, 꾸밈없는 그림으로 나타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가고 그림은 남았다. 춥고 길었을 캐나다의 겨울이 그녀의 그림 속에선 동화 속 한 장면같기도 하고, 예쁘게 수놓은 자수작품같기도 하다.
그림이 모티브가 된 유명한 영화로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이다. 소설이 원작이 된 영화다. 소설 작가가 테드 강의에서 이야기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좋은 작가는 한 작품을 끝내면 다음 작품의 주제를 생각한다' 이런 말로 서두를 꺼냈었다. 당시 비스듬히 누워 들으려다 벌떡 일어났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 좋은 연구자도 하나의 연구가 끝나기 전에 다음 연구의 주제를 늘 생각하지..' 하고 동감하면서... 그림을 감상하는 태도에 대해서 작가는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가 옷 가게에 가서, 다 입어보려고 하지는 않지 않느냐. 그저 뒤적이다 마음에 들면 입어보는 거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화랑에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하면 어떨까. 그림에 대해 다 알 필요도 없고, 느낌에 따라 즐기고, 자유로운 상상을 보태면서 그림을 나름대로 해석하는 거다. 내 작품도 그렇게 탄생했다.' 이런 식의 이야기였다. 그림도 영화도 상승작용을 하며 유명해져서 세간에 화제를 뿌렸었다. 소설은 작가의 상상의 산물일 뿐이지만...
타임 리프 (time leap) 주제로 알려진 일본영화 "나는 내일, 어제의 너를 만난다(ぼくは明日、昨日のきみとデートする)". 이십대의 풋풋함을 되살리고 싶다면 볼 만하다. 잔잔하게,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고나 할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나누고 싶은" 연인이 필요하다, 는 대사가 내겐 와 닿았다. 시간을 거슬러간다는,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는, 정말 영화니까 가능한 설정이지만. 그 드라마틱함이 흘러가는 시간의 소중함을 돋보이게 했다는 느낌이다. 영화의 남 주인공은 미대생이다. 마지막 날, 연인을 그림으로 그려 남긴다. 상대에게 대한 사랑이 담긴 화폭. 이 영화를 그림에 관련된 것으로 기억할 사람은 많지 않을 지도 모른다. 키워드는 '첫사랑', '타임리프', 이런 것들이겠지만... 한 달간 스무살 두 남녀가 매일 매일 추억을 쌓고, 최선을 다해 상대에게 맞춰주고... "헤어짐"의 결말을 알고 있는 타카토시군(남주인공)이 에미양(여주인공)에게 "그림 그려주는 것밖에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어"라며, 모든 감정을 담아 그리는 초상화... 내겐 그 한 장면이 이 영화의 요약같이 느껴졌다.
영화를 보고 나서 여운이 남았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데,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서 한계를 느꼈던 나에게. 그림을 못 그리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있는 나에게. 모디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싶은 걸 그려"라고... 자유로운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마음이 가는 대로, 소중한 순간을 남기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