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다녀왔습니다."
한주의 시작! 월요일부터 업무를 끝내느라 늦은 저녁 귀가해서 들어갔는데 남편의 대답만 들린다.
"잘 다녀왔어?"
아무도 없나? 방문을 열어보니, 누워있는 봄이. 갑작스레 화가 나려고 한다.
"봄아, 너 엄마 왔는데..."
"여보, 여보! 이리 와봐."
남편은 혼내려고 준비 중인 나를 막아서더니 낚아채서 안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작은 소리로) 봄이 오늘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 그냥 놔둬."
"왜?"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지난 토요일 밤, 잠든 남편 옆에 누워있는데 불 꺼진 방으로 들어온 딸이 조잘거린다. 작은 소리로 속삭이며 이야기를 하지만 남편의 잠든 귀에도 들어갔는지 뒤척뒤척 돌아눕는다.
"나가자, 아빠 깨실 것 같아."
딸의 좁은 침대에 둘이 누워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시험을 끝났는지 마음이 편안해 보이는 아들이 방으로 들어온다. 엉켜서 누워있다가 초등학교 시절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초록아, 너 초등학교 선생님들 다 기억나?"
"어떤 선생님이 가장 좋았어?"
"뭐, 다 좋았죠. 사실 기억이 잘 안 나요. 허허허."
아들들이란...
봄이는 오빠 말이 끝나자마자 1학년 선생님부터 쭈욱 거슬러 올라가 떠올려 이야기를 한다.
"엄마, 나는 1학년 강소라 선생님이 제일 좋았는데, 이제는 얼굴도 생각이 잘 안나. 왜 좋았는지도 기억이 안 나."
"근데 선생님들이 다 좋았는데 6학년 때 K선생님이 진짜 너무 좋았어."
"선생님으로 만났지만, 그냥 만나도 진짜 좋은 분이야."
한참을 이야기 나눈 그날 밤이었다. 몰랐다. 동시에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줄은. 나와 딸이 그분을 떠올렸던 그날 K선생님은 떠나셨다. 우리에게도 떠올리는 순간 다녀가신 걸까?
월요일 봄이는 친구에게서 K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한다. 내내 울면서도 아닐 거라고. 아니겠지? 봄이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학교에 도착해서 메신저에 부고 소식을 찾아보았다. 지난 금요일 넘겼던 메시지를 보다가 순간 얼음이 되었다, 이내 아픈 눈물이 쏟아져내렸다. 커다란 화면으로 아침 활동 시간에 책 읽기를 시켜놓고 따뜻한 물을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이들도 어리고, 선생님도 젊으셨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하루 종일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나도 그런데 선생님의 가족들은 어쩌나. 가늠할 수 없는 슬픔에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봄이는 괜찮을까? 나도 이런데 아이는 오늘 어떻게 하루를 보냈을까?
조금 일찍 알았더라면, 메시지를 미리 확인했더라면 선생님 가시는 길에 인사라도 드릴 수 있었을 텐데 죄송한 마음이 몰려왔다. 어디 계셨는지 알면 인사하러 가고 싶어서 혹시나 싶어 가까운 지역에서 근무하시는 몇 분에게 물어보아도 알 길이 없었다. 나처럼 건너서 아는 지인들이 있을 뿐.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있을까. 나이도 젊으신데 어찌 이리 허망하게 가신 걸까.
봄이를 어떻게 만날까. 아이의 마음이 어떨까 싶어서 염려되었다. 그 마음이 오래갈까 봐 두려움도 몰려왔다. 오래 아프면 어쩌나 조심스러웠다. 유난히 K선생님을 좋아했던 봄이. 전학 와서 친구가 많지 않았지만 선생님 덕분에 6학년을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얼마나 감사한지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했다. 중학교를 가서도 하굣길에 종종 선생님을 뵙고 오면 행복한 얼굴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곤 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아이를 맞이했다. 맛있는 간식을 내밀며 사이좋게 나눠먹고 학원 앞에 데려다줬다. 봄이도 생각보다 담담해 보였다. 다행인 걸까 싶기도 하고 마음이 자꾸 조마조마하기만 했다. 학교에서 있었던 얘기를 하다가 봄이는 잠시 말이 없어졌다. 얼굴도 돌리지 못하고 곁눈으로 쳐다보니, 소리도 내지 않은 채 봄이 볼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나도 모르게 터지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봄아, 봄아! 그냥 슬프면 슬픈 대로 참지 말고 울어. 엄마도 이렇게 아픈데 너는 얼마나 아프겠어. 오늘은 아프면 아프다고 표현하고 실컷 울자. 그리고 우리 선생님 잘 보내드리자."
차 안에서 엉엉 울다가 끌어안고 울다가 통곡을 하듯 울었다. 우리 마음도 이렇게 아프고 찢어지는 가슴을 어쩌지 못하겠는데 가족들은 어떠할까.
아빠를 잃은 아이들은 어쩌지. 남편을 잃은 그분은 어쩌지. 벌겋게 부어오른 눈을 비비고 코를 훌쩍이다가 조금 잦아든 마음을 가라앉혔다. 슬프지만 따뜻한 미소로 봄이를 안았다.
"우리, 차 타고 다른 데 가볼까?"
학원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와서 어둑해지는 저녁거리를 헤맸다. 가끔 새벽이나 주말에 남편과 갔던 사찰로 차를 돌렸다. 직접 인사드리지 못한 마음을 그곳에서는 닿게 해주지 않을까 싶어서.
"엄마, 나 선생님을 위해서 초 하나 올리고 싶어."
"그러자."
"이건 내 돈으로 살래."
우리는 법당 밖에 켜진 촛불 앞에서 두 손을 모았다.
갑작스레 떠난 선생님의 마음도 가볍지 않았을 것이다. 가족을 두고 떠나셨을 당신과 그렇게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가족들을 위해 기도했다.
죄송스럽게도 나의 봄이에게 가슴 아픈 오늘이 길지 않길 바랐다. 잘 보내드리길 기도했다. 가끔 선생님을 떠올리며 아픔이 밀려오기보다 덕분에 좋았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추억하길 바라게 되었다.
선생님, 부디 그곳에서 평안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