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예찬
A:“커피 브랜드 뭐 좋아해요?”
B:“스타벅스”
A:“그건 커피가 아니라 설탕을 좋아하는 거죠”
B: “마음대로 놀려요. 하지만 죽기 전에 한 번은 애플크리스피마키아토에 캐러멜 시럽 추가해서 마셔봐야 해요. 가을맛이라고요”
내가 좋아하는 에밀리 인 파리에 나오는 대화이다. 주인공이 일하는 마케팅 회사 사브아르에서 이탈리안 커피 브랜드의 마케팅을 맡게 되자 에밀리의 회사 동료 프랑스인 뤼크가 미국인 에밀리에게 하는 질문이다. 이 대화에서 나오는 대로 미국을 대표하는 스타벅스를 “설탕물”이라는 인식이 많다. 스타벅스뿐일까?
1983년 애플의 스티브잡스가 펩시콜라의 CEO 존 스컬리(John Sculley)를 영입한 사건도 유명하다. 잡스가 스컬리의 마음을 움직인 질문은 다음과 같다.
“남은 인생을 설탕물이나 팔며 보내고 싶습니까? 아니면 나와 함께 세상을 바꿔보겠습니까?”애플의 위대함, 스티브잡스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화로 유명한 이 대화에서도 설탕물이 나온다.
나는 이 일화를 접하면서 설탕물에 대한 저평가가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오늘날 위대한 미국은 설탕 위에 세워진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미국은 슈거나라다. 미국을 대표하는 코카콜라도 스타벅스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대로 엄밀히 따지면 설탕물로 볼 수 있다. 아이들에게도 미국은 설탕천국인데 대표적인 것이 쇼핑몰마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탕가게 (It’s sugar, 일명 슈거랜드)이다. 여기에서는 사탕, 초콜릿, 젤리가 각종 모양대로 고를 수 있다. 아이들은 세상 심각하게, 신중하게 골라 자신의 바구니에 담는다. 색색의 사탕을 무게를 달아 파는 이 가게에 가면 아이들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정신을 못 차린다. 나도 어쩌다 조카에게 붙들리어 이 상점에 가는 날에는 적어도 1시간 정도는 상점 밖으로 나갈 수 없음을 각오하고 간다. 가장 쉽고 간편하게 쾌락을 얻을 수 있는 슈거의 나라. 그리고 그 슈거로 세계를 제패한 나라, 그것이 미국이 아닐까?
미국의 역사를 보아도 설탕과 함께 성장했다. 바로 사탕수수 농장이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는 2차 원정 때 사탕수수 씨앗을 가져가 아메리카 식민지에 심으면서 미국에 사탕수수농장이 생겨난다. 당시 설탕의 맛을 알게 된 유럽인들은 설탕에 열광했으나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에서 주로 재배되는 사탕수수의 높은 가격 탓에 귀족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귀한 물건이었다. 고가의 설탕이 돈을 버는데 효자 상품이었으므로 미국은 독립 후 사탕수수 재배에 더 열을 올리고 원주민을 비롯해 많은 노예를 만들게 된다.
우리나라 초기 이민자들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을 하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도 미국 본토로 이주하기 전에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한동안 일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이렇듯 신대륙의 발견부터 지금까지 미국의 역사는 설탕의 역사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누군가의 쾌락을 위해 수많은 노예가 동원된 것을 생각하면 사실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요즘처럼 중독이 넘쳐나는 세상에 그래도 누구나 가장 쉽게 그나마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게 설탕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 동의보감에도 설탕은 만병통치약이었으며 특히 서민들은 맛볼 수도 없는 귀한 것이었으니 그에 비하면 지금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욕구템이 아닐까 하고.
설탕이라고 놀려도 가을맛이라고 시즌 음료를 꼭 먹어봐야 한다는 에밀리처럼 나도 별다방 시즌 음료를 참 좋아한다. 가을에는 펌킨스파이시 라테를 마시고 겨울에는 페퍼민트모카를 마신다. 올해도 가을이 왔구나, 겨울이 왔구나를 느끼며 에너지를 충전한다. 남들이 뭐라 하건 당당히 취향을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길 바라며 나의 설탕 예찬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