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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락 Apr 17. 2021

『나와 타자들』, 이졸데 카림



예쁘게 찍는 건 포기했습니다. 『나와 타자들』, 이졸데 카림, 민음사


 먼 과거에 인간이 권력이라는 개념을 성립한 이후, 인간은 여러 종류로 나뉘게 됐다. 힘이 강한 사람은 가장 위에 있고, 힘이 약한 사람은 가장 아래에 있게 됐다. 이후 이를 공고히 하기 위해 마치 어떤 얼굴을 가진 인간은 좋은 사람이라는 식의 관상이라는 걸 만들기도 하고, 어떤 인종은 우월하다는 걸 말하려고 인종 우월주의를 만들었다. 나는 현대에 사는 우리가 이 모든 것들이 허무맹랑한 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 이후 빈번하게 일어나는 인종 차별 행위를 보면, 아직도 우리는 근대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1장 과거 – 동질 사회라는 환상


 이졸데 카림은 1장에서 베네딕트 엔더슨이 말한 “상상된 공동체”라는 개념과 프로이트의 자아 개념을 통해 민족으로 귀환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바로 다원화 사회에서 민족은 사라지는 대신 침식되고 있는 증거라고 말한다(p.30). 과거 사회에선 민족은 언제나 허구였지만 잘 기능했다. 즉,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상상은 실제로 하나의 민족 사회를 만들어 냈다(p.15). 이와 같은 사회에선 하나의 민족이라는 개념에 들어가기 위해 개인은 “나는 한국인이다”라는 문장을 증명해야 한다. 여기서 이졸데 카림은 프로이트의 얘기를 들고 온다. 우리는 프로이트 이후로, 완전하다고 믿는 모든 정체성은 미신이라는 것을 안다. 자신이 실제 자신이라고 믿는 모든 정체성과, 자신이 실제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는 모든 표상은 환상이다(p.25). “자아는 자기 집의 주인이 아니다.”라는 프로이트의 말로 인해, 민족 개념은 기능조차 사라진 것이다.


2장 지금 – 다원화가 모든 것을 바꾼다.


 다원화의 핵심 명제는 ‘우리 모두가 변한다.’이다. 고대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은 유전하며 같은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을 떠올리게 하는데, 다원화로 인해 우리가 사회에 소속하는 방식이 변하고, 자기 자신과 관계 맺는 방식도 변화시켰다(p.37). 과거 사회에서 우리는 한국인과 일본인을 구분할 수 있었지만, 다원화 사회에선 일종의 정상성이라는 개념이나 일자(一者)로서 존재하는 민족 개념은 증발해버렸다. 이 말의 다른 말은, 이젠 개인이 자신을 보증하는 일이 외부에서 공적으로 제공되지 않는다는 말이다(p.59). 개인은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보증해야 한다. 우리는 매일매일 나 자신의 정체성을 보증해야 한다.

 이와 같은 불완전한 정체성은 누군가에겐 자유, 혹은 해방으로 다가오지만, 누군가에겐 불안감, 혹은 위협으로 다가온다(p.69). 이와 같은 불완전함은 우리가 하나의 집단에 속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하위 집단에 속해 살아간다는 걸 더욱 명확하게 인식하게 해준다. 여기서 등장하는 이졸데 카림의 질문은 “우리는 어떻게 이런 다원화된 개인으로 함께 살 수 있을까?”,이고 이 질문인 미완인 시점에서 그는 한 번 더 피에르 로장발롱의 얘기를 들고 온다. “어떻게 동등하면서도 동시에 서로 다를 수 있을까?”


이다음 바로 나는 7장으로 가려고 하는데, 그 이유에 관해 적어두고자 한다. 2018년 대학교에 복학하기 전에 가장 많이 들었던 개념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이었다. PC 주의와 반 PC 주의의 대립이 끊이지 않던 시기였고, 한국에서도 여성, 혹은 다양한 성 정체성에 관한 담론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때 들었던 의문점 중 하나는 정치적 올바름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과 그것을 수용하는 정도의 차이로 인해 발생했던 여러 대립에 관한 것이었다.

 PC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좀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었는데, PC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오로지 개인의 선택에 있다. 그러나 이것을 개인의 선택이 아닌, 강요의 형식으로 나아간다면 당연한 것이 없어진 사회에서 PC를 당연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다원화 사회는 정해진 것이 없는, 공(空)이다. 앞서 이졸데 카림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불완전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그런 이유에서 각 나라가 정해둔 최소한의 규칙인 법을 어기지 않는 이상, 개인에게 살아갈 삶의 지침 같은 것을 강요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7장 정치적 올바름의 무대에 관하여 좀 더 자세히 적고자 다른 장을 건너 뛰었다. 7장에 관해 글을 적으면서 과거부터 지금까지 내가 생각한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입장도 얘기하고자 한다.


7장 정치적 올바름의 무대 – 좌파와 우파의 정체성 정치


 새뮤얼 헌팅턴에 따르면, 냉전 시대 사회들은 정치 이념에 따라 조직되었다. “너는 어느 편인가?”라는 질문이 냉전 시대의 유일한 질문이었다(p.233). 이졸데 카림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서구에 대한 환상의 유산인 영화 「니노치카」와 ‘성전’을 수행하려는 인문들을 그린 영화 「슬리퍼 에이전트」를 얘기한다. 냉전 시대에 던져진 “너는 어느 편인가?”라는 질문은 비대칭적인데, 두 영화에서 그려지는 행복 대 영웅은 대칭되지 않는 적대 구성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방점을 찍은 냉전 시대 이후, 인류는 승자의 역사가 아닌 희생자의 역사라는 새로운 흐름에 편승하게 됐다. 1993년, 새뮤얼 헌팅턴은 ‘문화 전쟁’이라는 개요를 발표하여 “너는 어느 편인가”라는 질문에서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으로 나아간다.

 이졸데 카림은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은 ‘문화 전쟁’이라는 논쟁에 대한 질문이 아닌, 이미 논쟁 속에 있는 질문이라고 말한다. 그가 앞선 1장과 2장을 통해 말한 것처럼, 현대는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확답을 내릴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내가 속한 구역과 선이 어디인지 명확히 알 수 없는 세상이다. 그는 샤를리 에브도 테러를 통해 자신의 논지를 이어 나간다. “이슬람주의자들의 테러라는 사실이 이슬람을 거부하는 원인은 아니다. 후자는 그러한 사건들을 통해 강화되었을 수도 있지만, 애초에 존재하는 편견이며, 그 핵심은 언제나 비합리성이다.(p.244)” 하지만 이와 같은 편견이 실제 대상을 얻는다면, 그것은 실제로 추적을 당하고 있는 편집증 환자와 같고, 실제로 배우자가 외도를 하고 있는 의처증 환자와 같은 것이다(p.245).

 '무슬림은 새로운 유대인인가?’라는 질문에, 이졸데 카림은 반유대주의와 이슬람 혐오는 둘 다 르상티망이지만, 그 이유가 다르다고 말한다(p.246). 이슬람 혐오는 무슬림이 완전한 정체성을 가졌다고 비난하지만, 유대인은 온전하지 않은 주체라는 비난을 받으며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배제됐다. 다시 말하면 무슬림들은 오히려 이슬람 혐오자들과 인종주의자들이 스스로 상상하는 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비난받는다(p.247).

 과거에는 다양한 정체성이 싸우는 전선이었다면, 이제는 정체성의 다양한 방식들이 싸우는 전선이다. 이졸데 카림은 좌파 정체성 정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거 사회적 권리를 둘러싼 ‘계급 투쟁’은 아직 정체성 정치는 아니었다. 이후 ‘신사회 운동’과 같은 시민권 운동들은 싸움의 방법 그리고 목적을 바꿨다. 억압의 범위와 억압받는 자들의 범위를 넓혔고, 이를 통해 사회적 권리뿐만 아니라 사회적 인정과 법적 평등도 중요해졌다. 여기서 등장한 ‘통합적 평등’ 개념의 부분적인 실패 이후 등장한 ‘분리적 평등’에서 나온 ‘저항 집단’의 등장으로 정체성 정치라는 이해가 발생한다(여기에서 정체성은 더 이상 자기 진실성을 추구하는 자신이 아니라 억압하는 주류 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분리된 문화로 이해된다 p. 248~250). 정체성 정치에서 등장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핵심은, 상처받기 쉬운 정체성을 보호하는 일이다. 그들의 의무는 사회적 기준에 어긋난다고 여겨지는 정체성, 그런 의미로 부정적인 정체성, 그래서 피해자로 규정되는 정체성을 보호하는 것이다.

 과거 사회에선 승자의 역사였다면, 이제는 피해자의 역사가 됐다. 끝없이 부정당하던 피해자는 이제 인정받았다. 동시에 인정에 대한 요구를 담은 피해자로서의 자기 선언은 점점 더 부가적 가치도 생산했다. 즉 “내가 피해자다.”라는 발언을 하는 주체의 주체성 회복이라는 부가 가치였다(p.251).

 ‘대학의 광기’라는 표제어 아래 모을 수 있는 모든 현상이 정치적 올바름의 과잉과 전도를 드러낸다. 정치적 올바름만을 주장하는 이들은 안전 공간, 즉 상처와 불평등으로부터 자유로운 보호 공간을 요구한다. 이 공간에서는 모든 방아쇠(trigger), 즉 상처를 유발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치워 버리고, 일상의 의사소통에서 생길 수 있는 모든 세세한 가치 절하적 발언을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p.255). 과거 감정의 소명이 피해자의 관점을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만드는 것이었다면, 여기에서는 감정의 소명이 아주 고도화된 민감성으로 넘어져 버린다.

 바로 이 지점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정치적 올바름의 과잉은 다원화에 대한 좌파의 방어다. 정치적 올바름의 과잉은 감소된 자아의 방어로 전도된다. 정체성에 방호벽을 쌓고, 정체성만의 영토를 구축하면서, 바로 이 방어를 통해 새로운 유형의 완전한 정체성에 도달하게 된다. 정치적 올바름은 모든 사회 영역에서 결함의 균형을 맞추려는 정치적 시도다.

 이졸데 카림은 이 장에서 글을 마치며 이렇게 말한다. 다원주의는 다양한 문화와 종교의 수집이 아니다. 다원화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외부적 관계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종교 생활은 다원적인가? 즉 우리의 종교가 다른 종교들 사이에 있는 하나의 가능성임을 알고 있는가?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은 중요하지 않다. 훨씬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너는 네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나의 생각


 정치적 올바름의 과잉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점은 피해자가 스스로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는 지점이다. 레비나스가 말했던 것처럼 주체가 타자의 얼굴을 보고, 타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하지만 주체 스스로가 “나는 타자라고 불릴 수 있는 조건을 가졌으므로 타자다”라고 말하는 것은, 굉장히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여기서 타자성을 정의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다시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드는 것 이상, 이하도 아니다.

 레비나스가 말했던 문장이 가지는 맹점은, 개인에게 엄청난 희생과 인내를 강요한다는 것이다. 어떤 주체가 자신의 얼굴을 봐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마치 고도처럼 말이다. 나는 정치적 올바름의 과잉은, 과거 서구 중심주의적인, 혹은 남성 중심주의적인 문화 이후에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원화 사회라고 말은 하지만, G2 국가의 힘겨루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즉, 누구나 왕좌에 앉으려고 한다. 그것이 같은 역사를 반복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그리고 모두가 성인(聖人)이라 부르는 이들은 왕좌가 아닌, 보리수나무 아래, 혹은 길바닥에 앉았다.


나오며 -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징후적 질문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은 레닌의 질문이고, 그의 유명한 책 제목이기도 하다. 이 질문은 두 가지 차원의 요구다. 첫째로 다양한 위기에 대한 처방을 찾는 요구이고, 둘째로 행동들을 이끌 수 있는 대안에 대한 요구다. 하지만 이와 같은 질문은 채워지지 않은 정치적 희망에 대한 갈망일 뿐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말했다. 대안에 대한 꿈은 끝났다고. 여전히 대안을 꿈꾸는 사람은 겁이 많아서 대안 부재와 희망 없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일종의 페티시다. 현실을 부정하는 마법의 상상이라는 말이다. 오늘날 이 질문은 결국 정책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해답을 ‘알고 있는’ 사람, 하나의 해답을 줄 수 있다고 믿을만한 사람에 대한 질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질문은 징후적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정치적 희망은 이념이 아니라 사람에게 걸리기 때문이다. 오바마, 버니 샌더스, 마르틴 슐츠, 마크롱 등이 나왔다(p.295~297).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대답 되지 않은 채 남는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이졸데 카림은 『나와 타자들』에서 현재 다원화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종교, 문화, 정치, 정치적 올바름의 무대에서 사유하는 방식을 르포르타주처럼 서술하고 있다. 다원화는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다른 환상을 만들어 내서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한병철 교수가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말하는 것처럼 환상은 늘 매끄러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니까. 혹은 애초에 이런 담론에서 도망쳐 넷플릭스, 유튜브, 인스타그램으로 향한다. 그곳에 글, 혹은 영상을 올리는 이들이 자기 입장을 대변해 준다고 편하게 생각할 수도 있고, 그런 영상과 글 자체에 “관심 없음”을 표명하여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는 개인에게 정말 다양한 자기방어 기제를 준다. 하지만 그들이 든 방패의 뒷면에는 염산이 있고, 이것이 개인에게 천천히 떨어지고 있다. 방패를 든 나는 천천히 부식되고, 이내 방패만이 남을지도 모른다. 나 = 방패가 아니다. 부디 방패를 집어던지고, 방패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앞을 볼 수 있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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