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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가 Oct 07. 2018

캐리어를 통째로 잃어버렸다

in Japan

    2016년 겨울 여행이었다.  회사 동료들과 후지산의 매력에 빠져 도쿄를 가자고 했고 스케줄이 맞지 않아 서로 다른 날짜에 비행기 티켓을 끊어 후지산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내가 제일 먼저 일본에 도착할 예정이었고, 도쿄를 여행하다가 후지산으로 갈 생각이었다. 처음엔 셋이서 함께하자고 했던 여행이었다. 내가 일본으로 출발하기로 한 날의 며칠 전, 한 명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여행을 취소했고, 둘이서 무슨 재미냐며 나머지 한 명도 여행을 취소했다. 나는 비행기 출발이 며칠 남지 않았기에 혼자라도 가야지 하고 일본으로 떠났다.


    다들 여행을 취소했을 때 나도 취소해야 했을까. 도착하자마자 캐리어를 통째로 잃어버리다니. 그것도 비행기나 공항에서가 아니고 도쿄 시내에서 말이다. 정말로 어이가 없었다. 그 짧은 시간에. 아무도 다닐 것 같지 않은 골목길에서. 잠시 한눈을 팔았다고 말이다. 일본은 치안이 안전하기로 유명하고 일본 여행을 몇 번이나 다니면서 뭔가를 잃어버린 적이 없었기에 더욱 황당했다. 이전 일본 여행에서도 물건을 흘리거나 잃어버린 적이 있었지만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 보면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욕도 나오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배낭은 내 등에 남아있었다. 캐리어가 통째로 없어졌으니 여권, 지갑, 핸드폰, 노트북, 카메라를 제외하고 다 없어진 것이다. 2주간의 여행 짐이 사라졌으니 막막했지만 중요한 건 남아 다행이었다.


    우선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캐리어에 뭐가 있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2주간 여행할 옷과 각종 여행 용품, 선글라스, 일할 때 쓰는 키보드, 노트북 거치대, 그리고 일본에 사는 지인이 한국에서 사 와 달라고 부탁한 물건. 다른 건 다 그렇다 치더라도 지인이 부탁했던 물건과 키보드가 마음에 걸렸다. 그 키보드는 가격도 가격이지만 일본에서 새로 나온 제품이라 다른 나라에는 팔지도 않는 것이었고 직구 한 것을 생일선물로 받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인이 부탁했던 물건도 가격이 있었고 일본까지 가지고 와서 내 실수로 잃어버렸으니 면목이 없었다.


    이실직고를 하기 위해서 일본에 사는 지인에게 연락을 했다. 부탁했던 물건을 가져왔는데 누군가가 캐리어를 통째로 훔쳐간 것 같다. 정말 미안하다. 물건 값은 내가 나중에 꼭 부쳐주겠다. 등의 얘기를 했다. 고맙게도 그 사람은 내가 있는 곳으로 바로 와주었다. 캐리어가 없어졌던 골목을 다시 한번 같이 돌아다녔고, 유창한 일본어로 경찰에 신고도 해주었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는 했지만 골목길에 카메라가 없었으니 크게 기대는 말라고 하며, 여행객들을 싫어하는 이 동네에 거주하는 사람의 소행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역시나 경찰서에서 연락이 오는 일은 없었다.


    키보드를 직구 해서 내게 보내준 사람에게도 연락을 했다. 정말 고맙게도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라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나중에 또 사면되는 것이라며, 여권이나 지갑, 노트북처럼 정말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아 다행이라고 했다.


    한숨 돌리고 나니 긴장이 풀어졌는지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내 캐리어를 고의로 훔쳐갔을 사람에게 온갖 욕과 저주를 퍼붓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다. 도쿄의 겨울은 추웠다.




    그 다음날 도쿄 시내를 돌아다니며 기본적인 여행 용품들을 다시 샀다. 속옷, 양말부터 시작해서 긴팔 옷가지와 잘 때 입을 잠옷 그리고 칫솔과 치약까지. 하나하나 살 때마다 다시 그 도둑놈에게 욕을 했다. 분이 풀리지 않았고 화가 났지만 여행 기분을 망치고 싶진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여행을 오기 전부터 약속을 잡아둔 일본에 사는 친구들을 한 명씩 만나며 이 해프닝을 술안주 거리를 삼았다. 고맙게도 다들 힘내라며 술을 사주곤 했다. 처음 신고를 도와준 지인 분은 내 비싼 키보드가 중고 거래가 될 것이라며 중고 사이트를 뒤졌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생각날 때마다 중고 거래 사이트를 모니터링했다고 한다. 너무 고마웠지만 슬프게도 내 가방이나 물건들을 찾을 수는 없었다.


술이나 마시자. 즈엔장.


    나와 나이차가 얼마 나지 않아 친하게 지내는 막내 외삼촌이 후쿠오카에 갈 일정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도쿄에서 후쿠오카로 날아갔다. 부모님께는 걱정하실 듯하여 이 사건을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삼촌을 만나서 한바탕 욕을 시원하게 하고 술을 마시니 기분이 좀 나아지는 듯했다. 삼촌은 차라리 잘됐다며, 하고 다니는 꼬락서니가 너무 거지 같았는데 이 참에 옷이나 좀 사라고 했다. 어차피 그 캐리어에 들어있던 것들은 걸래가 되기 일보직전일 천 쪼가리가 대부분 아녔냐며.


    여행을 다녀온 이후에 한동안 이 에피소드는 좋은 술안주였다. 친구들이 '어, 못 보던 셔츠네?'라고 얘기할 때도, 회사 동료들이 '그때 그 키보드는 이제 안 써요?', '예전에 사용하던 거치대 추천할만한가요?' 할 때도, 엄마가 빨래를 하시다가 못 보던 양말이 나왔다고 할 때도 이 이야기는 계속 회자되었다. 나는 한동안 그 캐리어에 들어있었던 물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혹은 그때 일본에서 어쩔 수 없이 산 물건에 대해 누가 물으면, 그 일을 상기시키지 말라며 버럭 하곤 했지만 종종 재밌는 얘깃거리가 되고는 했다.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하나의 추억이 되었지만 그래도 생각날 때마다 그 도둑놈한테 욕 한 바가지는 한다. 게다가 삼촌을 후쿠오카에서 만났기 때문인지 이 슬프고도 화나는 에피소드는 항상 웃음으로 끝난다. 친구들로부터 '그래 넌 쇼핑 좀 할 필요가 있지!'라는 말을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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