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래머를 10년 가까이하다가 PD(Producer)가 돼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본부장님을 찾아가 말했다. 다행히 허락을 받아냈지만, 바로 PD가 될 수는 없었다. 게임 분석을 6개월 정도 진행하고, 어떤 프로젝트의 PM(Project Manager) 역할을 한 이후에야 PD로서 첫 프로젝트를 만들어 나갈 수 있었다. 그때 맡았던 PM 역할이 온전한 PM 역할로는 유일한 경험이었다. 물론, PD가 된 후에도 PM이 따로 없어서 PM의 역할을 겸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PD의 역할과 PM의 역할을 같이 하다 보니 희석되는 부분도 있었고 생략되는 부분도 있었다. 그에 비해, PM의 역할만 맡았을 때는 PM으로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도 많이 하고, 실행도 많이 했던 것 같다.
PM으로서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지만, 프로젝트에 따라 특별히 신경 써야 하는 요소들이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여기서는, 내가 온전히 PM의 역할만 했던 유일한 프로젝트에서, 특별히 신경 썼던 것 세 가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아마 다른 프로젝트에서는 더 중요한 포인트가 있을 수 있겠지만, 여기 나열된 내용이 어떤 힌트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PM으로 투입된 프로젝트는 이미 제품을 꽤 오랫동안 만들고 있던 상태였고, 출시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PM의 역할을 누군가에게 따로 맡겨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고, 그 제안이 나에게 왔던 것이다.
당시 PM의 역할이 필요했던 가장 큰 이유는 소통에 있었다. 제품을 만드는 개발팀은 원래 다른 본부에 있다가 내가 있던 본부로 소속이 변경된 조직이었다. 그런데, 팀이 원래 소속되어 있던 조직과 내가 있던 본부는 문화가 많이 달랐다. 내가 있던 본부에서는 협업이 필요할 때, 실무자들끼리 알아서 협업을 진행하고 팀장에게 보고하는 형태가 많았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수십 명의 구성원이 거미줄처럼 얽혀서 커뮤니케이션을 진행하고 있었다. 따로 허브 역할을 하는 사람도 없었고, 별다른 프로세스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새로 입사한 직원들은 처음에 누구와 어떻게 커뮤니케이션해야 할지 몰라 어려움을 겪고는 했는데, 내가 투입된 프로젝트의 구성원들도 커뮤니케이션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었다. 제품 기획자가 사업, 마케팅, 운영, QA 담당자들과 직접 커뮤니케이션하는 방식이 익숙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제일 처음 한 일이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나를 통해 하도록 한 것이었다. 개발팀 사람들도 모두 나에게 얘기하고, 유관 부서의 사람들도 모두 나에게 얘기하도록 하였다. 그러면 내가 직접 대응을 하거나, 혹은 대응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연결해 주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내 업무량이 너무 많아지는 문제가 있었는데, 그래서 한 달 정도는 잠자고 먹는 시간 빼고는 거의 일을 했던 것 같다.
그래도, 한 달 정도 지나면서부터는 사람들이 어떤 이슈에 대해 누구와 이야기해야 하는지 점점 익숙해져서, 내가 중간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연결하는 역할이 점점 줄어들었고 나중에는 실무자들끼리 알아서 잘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다음으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팀원들이 자신이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업무에 집중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기획자라면 좋은 기획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아티스트는 퀄리티 있는 아트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고, 프로그래머는 잘 동작하는 프로그램을 구현해내야 한다. 공부할 때나, 일을 할 때나 집중도는 일의 속도와 결과물의 품질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팀원들이 본질적인 업무에 집중하도록 하고 싶었고, 중요하지 않은 일들에 신경을 쓰지 않게 해주고자 했다.
이를 위해 내가 했던 일들이 그다지 대단한 일은 아니다. 경영지원, 인사, 재무 쪽에 요청하거나 제출해야 하는 것이 있으면 내 손에서 하거나, 혹은 작성자 옆에서 도와주고는 했다. 연말정산을 할 때도 쉽게 설명해 주고, 작성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회사 제도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으면 포털에 검색하지 말고 그냥 나에게 물어보게 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프린터에 종이가 끼었을 때도 지원팀이 아니라 나를 찾게 되었다. 한 마디로, 본인에게 가장 중요한 업무를 제외하고는 그냥 나를 찾으면 되게 만들었다.
가끔 회사에서 물건을 나누어 주거나, 성과를 축하하며 피자 같은 것을 팀별로 나누어 줄 때도 있었는데, 보통 그럴 때는 나이 어린 친구들이 가져오는 경우가 많았지만, 우리 팀에서는 늘 내가 가져오고는 했다.(혼자 들고 올 수 없을 때는 어린 친구들을 같이 데려가기는 했다) 사소한 일이고, 팀에서 꽤나 연장자에 속했지만, 그런 사소한 일을 하지 않게 하는 것이 내가 PM으로서 해야 할 일 중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임을 하나 만드는데 보통 몇 년이 걸린다. 내가 투입된 프로젝트도 이미 진행된 지 수년이 지난 프로젝트였다.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할 때는 다들 열의에 넘쳐 있다가도, 프로젝트가 몇 년씩 진행되다 보면 지치기 쉬워진다. 특히, 처음에 생각했던 일정이 계속 연장되는 상황에서는 긍정적인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더욱 어렵다. 그리고, 일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는가에 따라 작업자의 생산성은 크게 차이가 난다.
그래서, 일단은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PD도 아니고 PM이 성공에 대한 믿음을 만들어 주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그냥 단순하게 '성공의 이미지'를 반복해서 보여주는 행동을 취했다. 당시, 팀 구성원들에게 현재 프로젝트의 진행상황을 간단히 요약하여 이메일로 날리는 것을 매일매일의 첫 번째 업무로 진행하였는데, 매주 월요일에는 거기에 한 가지를 덧붙였다. 어떤 날은 우리 게임이 게임 순위 사이트의 순위 집계에서 상위권에 오른 이미지를 꾸며서 보내주고, 어떤 날은 우리 게임의 흥행 성공을 얘기하는 보도 자료를 꾸며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날에는 구글이 성공한 후에, 성공에 기여한 직원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주기도 했던 것 같다.
이런 걸 보여준다고 해서 갑자기 분위기가 '그래! 성공할 수 있어!'로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당장은 쓸데없는 소리라고 여길지라도, 옆에서 계속 '성공할 거야', '우리는 할 수 있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으면 '혹시 그럴지도'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당시 팀 분위기가 나쁘지 않은 편이었는데, 어쩌면 실제로 효과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더 신경 썼던 것은 업무가 몰려서 야근을 해야 하거나 휴일 근무를 해야 하는 사람들을 기운 나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 역시 별다른 것은 아니고, 같이 있어 주면서 음료수를 사다가 주기도 하고, 같이 밥을 먹어 주기도 하고, 바빠서 햄버거를 사다 먹어야 할 때는 내가 주문을 받아서 사 오기도 하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작업이 완료되면 같이 테스트를 진행해 주고, 다 끝나면 퇴근도 같이 했다. 물론, 나도 그냥 놀고 있지는 않았고, 문서 정리를 하거나 다음 날 해야 할 일을 검토하거나 하고 있었다.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항상 함께하는 동료가 있고, 도와줄 사람이 옆에 있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지금도 나는 PM으로서의 전문성은 부족하다. 전문적인 PM을 원하는 조직에 면접을 보면 아마 합격하기 어려울 것이다. PM이 쓰는 도구에도 익숙하지 않고, PM이 작성하는 문서 형식에도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어떤 프로젝트가 더 효율적으로 진행되게 하는 역할'이라고 하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스스로 정의한 PM의 역할은 '문제를 발굴하고 해소하는 사람'이었다. 프로젝트에 잠재되어 있는 문제를 찾아내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을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간혹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해결할 수 있는 사람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이런 정의와 행동이 PM으로서 올바른 것인지는 사실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팀과 프로젝트에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 정도는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1.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문화가 다른 조직이 만나서 소통에 문제가 생긴 상황이었다.
양쪽의 문화를 모두 이해하는 내가 허브 역할을 자처했다.
두 조직 간의 소통이 자연스러워지면서 점차 허브로서의 역할을 줄여나갔다.
2. 중요한 업무에 집중하게 하기
팀원들이 본인의 가장 중요한 업무에 집중할 수 있을 때 생산성이 올라간다고 생각하였다.
직장인으로서 해야 하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내가 직접 처리하거나, 옆에서 도와주었다.
3. 마음을 다독이기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기간이 길어지면, 긍정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어진다.
성공했을 때의 이미지를 자꾸 보여주어 성공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업무가 몰려서 추가 근무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 지치지 않게 하는데 신경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