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래머가 하는 작업은 뭔지 모르겠지만 괜히 대단해 보인다. 아무리 봐도 알 수 없는 언어를 마구 써 내려가더니 실행되는 프로그램이 뚝딱 나온다. 흉내를 내려고 해도 프로그래머가 아니면 흉내를 낼 수가 없다. 아티스트도 마찬가지다. 아티스트가 작업하는 과정을 지켜보면 놀랍다. 무심하게 마우스를 움직이는 것 같은데 화면에 아트 작업물이 형체를 드러낸다. '참 쉽죠?'를 현실에서 구경하게 된다.
그런데 기획자는 조금 다르다. 기획자가 열심히 쓴 기획서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려는 사람이 일단 별로 없다. 게다가 기획서를 보면서 본인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주변에 은근히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기획이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기획자가 무엇을 갖춰야 주변에 빛을 뿜어낼 수 있는 것일까?
마블의 히어로물이 성공적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왜 마블의 히어로물이 성공했는지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국 모바일 게임 시장에서 롤플레잉 장르가 대세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하지만, 왜 한국에서는 유독 롤플레잉 장르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눈에 보이는 현상은 누구나 볼 수 있다. 그것을 흉내 내서 비슷한 콘텐츠를 만드는 것도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비슷하게 보이는 콘텐츠가 왜 어떤 것은 성공하고 어떤 것은 실패하는지는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슷해 보이면서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 콘텐츠를 기획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기획자는 바로 그것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얘기를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어야 한다.
현상 이면에 있는 역학,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원리, 시장의 규칙과 제약 같은 것들을 이해하고, 그것을 콘텐츠와 연결시킬 수 있을 때,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기획자가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된다.
기획은 다른 직군에 비해 경계가 모호한 것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사실 기획에도 여려 영역이 있다. 밸런스, 시나리오, 시스템, 개별 콘텐츠, UX 등 여러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큰 조직이 아니면 한 사람이 여러 가지를 하게 되는데, 그런 것 때문에 영역의 구분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이런 많은 영역을 모두 깊이 있게 섭렵하기는 쉽지 않다. 업계에서 인정받는 최고 수준의 기획자라면 골고루 전문성을 획득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반열에 오르기 전에는 일단 한 분야라도 확실한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좋다. 그래서 '밸런스는 저 사람이 최고로 잘 기획해'라는 얘기를 듣는다면, 그 사람은 이미 빛이 나는 기획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획자는 모든 조직이 탐내는 기획자이기도 하다.
어떤 분야를 파고들지는 자신의 성향을 고려하여 선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기획의 영역들이 언뜻 보면 비슷해 보여도, 실제로는 상당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것이 자신과 잘 맞는지 모르겠으면, 각 영역에 대해 직접 기획을 해보는 것이 좋다. 업무가 주어지지 않은 분야라도 스스로 과제를 만들어 한 번 진행해 보기를 바란다. 그러면, 다른 것보다 더 손에 잘 잡히는 기획 분야가 찾아질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얘기할 수 있다. 하지만, 말을 하는 것과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일이 되게 만드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 그리고 기획자는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기획자는 단순히 기획서를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역할만 수행하는 기획자들도 있다. 하지만, 기획자의 역할을 그렇게 제한해 놓고 있으면 스스로 기회를 좁히는 결과가 된다.
여러 기획자들과 일을 하다 보면, 유독 다른 사람을 잘 움직이는 기획자가 있다. 같은 말을 해도 그 기획자의 말은 다른 사람들이 잘 따른다. 그리고, 그 기획자가 참여하는 프로젝트는 다른 프로젝트보다 수월하게 진행된다. 생각해보면 그런 기획자가 있을 때, 팀워크도 대체로 잘 형성되는 것 같다.
이런 기획자는 일이 되게 만드는 그 능력 하나 만으로도 동료들에게 인정받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참여하는 프로젝트가 문제없이 마무리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러 프로젝트를 참여해 본 사람들은 이런 역할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빛이 나니 어쩌니 얘기했지만, 사실은 같은 기획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연차가 쌓이고 나이가 먹을수록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가치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게 된다. 연차가 낮을 때는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지만, 연차가 높아지면 그런 것만으로는 어렵다.
면접관으로서 면접을 보다 보면, 연차에 비해 역량이 부족한 사람들을 간혹 만나게 된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유명한 회사에서 일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마 그 시절에는 충분히 가치 있는 인재였을 수 있다. 하지만,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를 확보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이제는 일할 회사를 찾기 어려운 상황에 몰리게 된 것이다. 그러니, 지금 잘 인정받고 있다고 안심하지 말고, 5년 후, 10년 후에도 인정받을 수 있는 가치를 보유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그리고, 그런 가치를 만들고 유지하는데 힘써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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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의 보이는 면뿐만 아니라, 그것의 이면에 있는 원리와 인과관계까지 얘기할 수 있도록 하자.
같은 기획자들 사이에서도 두드러지는 자신만의 전문 분야를 구축하도록 하자.
기획이 실제 결과물로 구현되기까지의 과정에도 기여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