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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Game과 AI

플레이어를 만족시키는 열쇠, 밸런스

by 취한하늘

게임은 역사가 깊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게임을 즐겼던 흔적이 있다. 그런데, 고대의 게임들은 비교적 단순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바둑만 해도, 게임이 펼쳐지는 양상은 다양하고 복잡하지만 게임의 형식 자체는 무척 단순하다. 그에 비해 현대의 게임은 무척 복잡하다. 규칙도 복잡하고, 조작 방식도 다양하며, 수많은 선택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게임이 이렇게 복잡해지면서, 게임을 구성하는 요소들 간의 밸런스도 매우 복잡해졌다. 그리고, 그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전 세계의 기획자들이 골머리를 썩고 있다.


바둑이나 장기에도 밸런스가 있다. 먼저 두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핸디캡을 줄 것인지, 장기 말의 움직임을 어떻게 정의해야 골고루 쓸모가 있을지 등이 밸런스를 구성한다. 하지만, 현대의 비디오 게임에 존재하는 밸런스에 비하면 매우 단순하다. 게다가, 바둑이나 장기는 오랜 세월에 거쳐서 밸런스가 수정되어 왔지만, 지금 새로 개발하는 게임에서는 아주 짧은 시간에 좋은 밸런스를 찾아내야 한다.


밸런스가 왜 중요한가?


밸런스가 왜 중요한 지는 밸런스가 크게 무너졌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상상해 보면 된다. 게임에는 기획자가 의도한 어떤 맥락이 포함된다. 플레이어로 하여금 일정한 행동을 하게 하고, 예측된 시점에 성취감을 얻게 한다. 그리고 또 새로운 행동을 요구한다. 그런데, 밸런스가 맞지 않으면 플레이어가 이러한 맥락에서 벗어나게 된다. 성장이 빨라서 목표를 너무 쉽게 달성하게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목표 달성에 너무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해질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성취감이 작아지고, 후자의 경우에는 목표를 달성하려는 동기가 약해진다.


잘 맞던 밸런스가 업데이트로 인해 무너지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매우 가치 있던 아이템이 한순간에 쓸모없는 물건이 될 수도 있다. 그러면 그 아이템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커다란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혹은, 열심히 노력해서 남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올랐는데, 업데이트로 인해 다른 사람들도 그 위치에 쉽게 올라서게 바뀐다면, 그동안의 노력이 바보 같은 짓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많은 게임에서 밸런스는 게임의 핵심 맥락을 구성하고 있다. 밸런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은 기획자가 의도한 경험을 게임이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밸런스가 무너진다는 것은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즐기는 방식을 크게 흔들어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밸런스의 명가


예전에 밸런스의 명가로 이름을 날리던 게임 회사가 있다. 바로 ‘블리자드’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즐기고 있는 ‘스타크래프트’는 밸런스가 잘 잡힌 것으로 유명한 게임이다. 이 게임에는 테란, 프로토스, 저그라는 세 종족이 등장하는데, 세 종족의 특징이 매우 다르다. 일을 하는 일꾼부터, 건물, 전투 유닛, 확장 방식 등 모든 부분에서 세 종족은 고유한 특징을 갖는다. 이것 자체가 기존의 게임들과는 많이 다른 점이었다. 기존의 실시간 전략게임에서는 종족마다 특징적인 유닛이나 건물을 몇 개 가지고 있을 뿐, 대부분의 맥락은 종족이나 진영에 상관없이 동일했기 때문이다.


종족별 특징을 강하게 부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서로 다른 특징들 사이에 밸런스를 잡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장기나 체스처럼 서로 거의 비슷한 유닛을 들고 싸우게 하는 것이 밸런스 잡기에 유리하다. 그런 상태에서 일부 요소에만 특징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스타크래프트는 서로 거의 다른 종족 세 개를 설계했고, 그 종족 사이의 밸런스를 훌륭하게 맞춰냈다.


스타크래프트의 밸런스 시스템은 ‘가위, 바위, 보’ 시스템이다. 테란은 저그에게 유리하고, 저그는 프로토스에게 유리하고, 프로토스는 테란에게 유리하다. 그런데, 가위바위보는 종족 선택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종족들이 가진 유닛 사이에도 가위바위보 밸런스가 존재하고, 플레이어들이 선택하는 전술에도 가위바위보 밸런스가 존재한다. 그래서, 저그로도 충분히 테란을 이길 수 있다.


스타크래프트의 성공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게임의 훌륭한 밸런스가 대부분을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스타크래프트보다 더 많이 팔린 게임들은 많지만, 스타크래프트만큼 오래 사랑받은 게임은 흔치 않다. 그것도 스타크래프트가 가진 훌륭한 밸런스 덕분일 것이다.


밸런싱의 변화


밸런스를 잡는 작업을 ‘밸런싱’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밸런싱 방식에도 일정한 변화가 있었다. 스타크래프트는 완벽한 밸런스를 추구한 게임이다. 물론, 완벽한 밸런스라는 것은 없을 것이다. 스타크래프트도 완벽한 밸런스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여러 번의 패치를 진행한 마지막 버전도 완벽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제작자들이 밸런스에 공을 많이 들이고,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상태를 맞춘 후에 발매한 것은 맞다. 그리고, 그 시절에는 발매할 때 완전한 밸런스를 갖추고 발매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사실 지금도 대부분 그럴 것이다)


이런 방식에 변화를 가져온 것이 라이엇 게임즈의 ‘리그 오브 레전드’이다. 리그 오브 레전드에는 수많은 캐릭터들이 존재한다. 플레이어는 하나의 캐릭터를 선택해 전투에 참여한다. 초기에는 수십 종의 캐릭터들이 존재했고, 일정 기간마다 꾸준히 새로운 캐릭터를 추가했다. 당연히, 캐릭터 간의 밸런스가 무척 중요하다. 너무 강한 캐릭터가 있으면 모두가 그 캐릭터를 선택하려 할 것이고, 너무 약한 캐릭터는 있으나마나 한 존재가 된다. 그런데, 리그 오브 레전드는 스타크래프트처럼 사전에 완벽한 밸런스를 맞추려고 하지 않았다. 물론, 많은 테스트를 통해 어느 정도 맞추기는 하지만, 아직 밸런스가 완전히 맞지 않는 상황에서 게임에 추가했다. 그리고, 플레이어들의 플레이를 보면서 점차 균형점을 찾아간다. 기존의 다른 게임들이 업데이트에 있어서도 완벽한 밸런스를 추구했던 것과 달리, 리그 오브 레전드는 어느 정도까지만 맞추어 놓고 플레이어들의 플레이 데이터를 통해 수정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러면, 업데이트한 캐릭터가 너무 강하거나 너무 약한 기간이 존재하게 되지만, 게임이 가진 다른 특성들(예를 들면, 플레이어의 숙련도가 크게 영향을 미치는 특성)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공개하고 맞추는 방식 외에, 밸런싱 방식에 또 하나의 변화도 있었다. 바로 ‘동적 밸런싱’이다. 스타크래프트의 밸런스는 정적 밸런스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 밸런스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 밸런스가 변하는 게임들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퍼즐 게임은 플레이어가 특정 단계를 해결하지 못하면 갑자기 해당 단계의 난이도를 크게 낮춰준다. 기존의 퍼즐 게임도 대부분 정적 밸런스를 사용하는 게임이었는데, 동적 밸런스가 등장하고 효과를 본 이후로는 많은 퍼즐 게임이 이런 동적 밸런스를 사용하고 있다. 퍼즐 게임뿐만이 아니다. 좀비 게임에서 등장하는 좀비의 수를 동적으로 조정한다던가 하는 방식이 점차 많은 게임들에 적용되고 있다.


AI가 잡아주는 밸런스?


밸런스를 잡는 것은 매우 어렵다. 특히, 플레이어가 만족할 만한 밸런스를 잡는 것은 더 어렵다. 플레이어마다 만족하는 밸런스의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모든 플레이어를 만족시킨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정적 밸런스에서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수준으로 밸런스를 맞추거나, 아니면 몇 가지 밸런스를 준비하고(‘쉬움, 보통, 어려움’ 등) 플레이어에게 선택하게 했다.


물론, 동적 밸런스에서도 모든 플레이어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훨씬 많은 수의 플레이어를 만족시킬 수는 있다. 플레이어마다 서로 다른 밸런스로 게임을 플레이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와 두는 바둑을 예로 들면, 플레이어의 실력에 맞춰서 컴퓨터의 바둑 실력을 조정할 수 있는 것이다. 몇 가지 단계 정도가 아니라, 수백 수천 가지의 단계로 맞출 수 있다.


이러한 작업에 AI를 사용하는 시도들이 있다. AI가 플레이어 실력에 맞게, 혹은 어떤 상황에 맞게 게임의 밸런스를 알아서 조정하는 것이다. 앞에서 예를 든 퍼즐 게임의 경우, 플레이어가 특정 단계에서 여러 번 반복하여 실패하면 갑자기 슈퍼 아이템이 등장하거나 퍼즐이 알아서 해결되는 식의 조작이 있었는데(티가 많이 난다), AI를 이용하면 티가 나지 않으면서 재시도할 때마다 밸런스를 조금씩 조정해 줄 수 있다.


영어로 Dynamic Difficulty Adjustment나 DDA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이미 많은 논문이 나와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기는 하지만, 게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실험들이다.


밸런스만으로도 성공적인 게임을 만들 수 있다


몇 년 전에 ‘플래피 버드’라는 게임이 등장했다. 새가 파이프에 부딪히지 않게 조작하는 아주 단순한 게임이다. 베트남의 한 개발자가 취미로 만든 게임인데 전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그런데, 이 게임의 재미는 오로지 밸런스에서 온다. 게임에 다른 요소는 사실상 없다시피 한다. 새를 최대한 오래 날게 하는 조작, 그 조작을 아슬아슬하게 만들어주는 파이프 위치의 밸런싱이 이 게임의 거의 전부다. 최근에 유행한 수박 게임도, 단순하면서 밸런스가 큰 역할을 하는 게임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단순한 기획, 단순한 그래픽이지만 훌륭한 밸런싱 하나로 게임이 크게 성공할 수도 있다. 반대로, 기획과 그래픽에 엄청난 공을 들였는데 밸런스 하나로 게임이 크게 망할 수도 있다. 따라서, 게임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좋은 밸런스에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 좋다. 기획과 그림은 모방하기 쉬워도 좋은 밸런스는 모방하기 어렵다는 면에서 더욱 그렇다.


1. 밸런스가 왜 중요한가?

플레이어로 하여금 기획자가 설계한 맥락에서 행동하게 하려면 적절한 밸런스가 필요하다.

균형 잡혀 있던 밸런스가 무너지면 플레이어들의 플레이 경험에 큰 혼란이 발생한다.

2. 밸런스의 명가

스타크래프트는 '가위바위보 시스템'으로 완벽에 가까운 밸런스를 보여주었다.

3. 밸런싱의 변화

플레이어들의 플레이 정보를 통해 밸런스를 맞춰나가는 방식이 등장했다.

고정된 밸런스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밸런스가 자동으로 변경되는 동적 밸런스도 등장했다.

4. AI가 잡아주는 밸런스?

최근에는 AI를 이용해 동적 밸런스를 잡는 시도들이 있다.

특정 플레이어에게 맞는 개인화된 밸런스가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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