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소성의 이동이 시작되다
희소성은 사라지는가. 이 질문은 AGI 시대의 경제를 이해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경제학은 근본적으로 희소성의 학문입니다. 자원이 한정돼 있기 때문에 선택이 필요하고, 선택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격이 생기며, 가격이 생기기 때문에 시장이 작동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AGI가 모든 것을 풍요롭게 만든다면 경제학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일 가능성이 큽니다. AGI는 희소성을 없애기보다, 희소성이 존재하는 위치를 바꾸고, 희소성이 만들어내는 권력의 형태를 바꿀 수 있습니다. 4화에서는 이 이동의 메커니즘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희소성이 줄어들 가능성이 큰 영역부터 보겠습니다. AGI는 정보와 지식, 그리고 그것을 조합해 만들어지는 서비스의 생산비를 급격히 낮춥니다. 번역, 요약, 문서 작성, 마케팅 카피, 보고서 초안, 법률 문서의 1차 작성, 코드 생성과 디버깅, 데이터 분석, 수학적 최적화, 연구 설계의 일부 단계 등은 이미 비용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작업은 원래 숙련된 인지 노동자가 시간과 집중력을 들여 수행하는 일이었고, 그 시간이 곧 비용이었습니다. 그런데 AGI가 그 시간을 크게 줄이거나 대체하면, 해당 서비스의 한계비용은 빠르게 하락합니다. 한계비용이 내려가면 시장 가격도 내려갑니다. 이렇게 되면 특정한 종류의 희소성, 즉 지식과 문서 생산을 둘러싼 희소성은 약해질 수 있습니다.
교육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일대일 튜터링은 원래 매우 비쌌습니다. 교사의 시간이 희소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AGI가 학습자의 수준을 진단하고, 맞춤형 커리큘럼을 설계하며, 질문에 즉시 피드백을 주는 시스템이 된다면, 고품질 교육의 공급은 크게 늘어날 수 있습니다. 의료에서도 기본적인 상담과 문진, 건강 데이터 해석, 생활습관 코칭 등에서 비용이 내려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영역에서 희소성이 줄어든다는 말은, 사회 전체의 삶의 질이 올라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가 핵심입니다. 희소성이 줄어드는 영역이 있다고 해서, 경제가 희소성을 잃지는 않습니다. 희소성은 이동합니다. 더 정확히는, 희소성은 물리적 기반과 인프라, 그리고 신뢰와 권리의 영역으로 이동합니다. AGI 시대의 가장 중요한 착각은 지능이 풍요로워지면 모든 것이 풍요로워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능은 생산의 한 요소일 뿐이고, 생산에는 여전히 물질과 에너지, 공간, 시간, 제도, 신뢰가 필요합니다.
첫 번째로 이동하는 희소성은 에너지입니다. AGI는 전력을 먹고 자랍니다. 모델을 학습시키고, 운영하고, 수많은 사용자의 요청을 처리하는 과정은 대규모 전력을 지속적으로 요구합니다. 그리고 전력은 단순히 가격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공급 안정성과 송배전 인프라, 지역의 수용능력, 냉각을 위한 물 사용량, 환경 규제, 주민 수용성까지 포함된 복합 문제입니다. 어느 지역은 전력이 남아돌지만, 어느 지역은 데이터센터를 추가로 지을 여력이 없습니다. 전력망은 급격한 수요 증가에 즉시 대응하기 어렵고, 발전소와 송전선로는 몇 년 단위의 투자와 인허가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AGI가 발전할수록 전력은 더 희소해질 수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전력 그 자체가 아니라 안정적이고 저렴한 전력을 장기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권리가 희소해집니다. 이 권리를 가진 기업과 국가가 지능 생산의 기반을 장악할 가능성이 큽니다.
두 번째로 이동하는 희소성은 컴퓨팅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소프트웨어가 복제 가능하니 컴퓨팅도 금방 풍부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컴퓨팅은 물리적 생산물입니다. 고성능 반도체는 제한된 제조 능력과 공급망 위에서 만들어집니다. 첨단 공정은 소수의 제조 생태계에 집중돼 있고, 장비와 소재의 병목도 존재합니다. 게다가 수요는 기술 발전과 함께 더 빠르게 커질 수 있습니다. 이 구조에서는 일정 기간 동안 컴퓨팅이 희소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희소한 컴퓨팅은 가격을 올리고, 가격은 다시 부의 집중을 강화합니다. 컴퓨팅을 많이 확보할수록 더 강한 모델을 만들 수 있고, 더 강한 모델은 더 많은 수익을 만들어내며, 그 수익은 다시 컴퓨팅 확보로 이어집니다. 즉 희소한 컴퓨팅은 단순한 투입 요소가 아니라 경쟁의 중심축이 됩니다.
세 번째로 이동하는 희소성은 공간과 인프라입니다. 데이터센터는 땅 위에 지어야 하고, 전력망과 연결돼야 하며, 냉각과 네트워크의 조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이런 조건을 만족하는 부지는 무한하지 않습니다. 특히 초대형 데이터센터는 특정 지역에 집중되기 쉽고, 그 지역은 전력과 인프라 확충을 둘러싸고 갈등을 겪을 수 있습니다. 지역 주민 입장에서는 전력과 물, 환경 부담을 떠안으면서도 얻는 혜택이 제한적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기업 입장에서는 장기 전력 계약과 인프라 확충이 가능한 지역만이 경쟁력 있는 거점이 됩니다. 이 과정에서 공간의 희소성은 단지 부동산 가격이 아니라, 산업지도의 재편과 지역 불균형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네 번째로 이동하는 희소성은 신뢰입니다. AGI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이 늘어날수록,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비용이 커질 수 있습니다. 보고서, 기사, 논문, 영상, 음성, 이미지가 대량으로 생성되는 시대에는 정보의 양이 아니라 정보의 진위가 희소해집니다. 기업과 정부는 의사결정을 위해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를 필요로 하고, 개인은 사기와 조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검증된 채널을 필요로 합니다. 이때 신뢰는 새로운 경제적 자산이 됩니다. 인증과 검증, 평판 시스템, 출처 추적, 데이터 무결성을 보장하는 기술과 제도가 중요해집니다. 신뢰가 희소해지면, 신뢰를 제공하는 기관과 플랫폼이 강한 권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는 언론, 학계, 정부, 기업의 역할 재정의로 이어집니다.
다섯 번째로 이동하는 희소성은 권리입니다. AGI 시대에는 지식과 서비스가 풍부해질 수 있지만, 접근 권한은 여전히 제한될 수 있습니다. 최고 성능의 모델을 누가 사용할 수 있는가, 어떤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는가, 어떤 인프라를 사용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대가를 누가 지불할 수 있는가가 계층을 만들 수 있습니다. 특히 고성능 모델은 비용이 들고, 안전과 보안 이유로 제한될 수 있습니다. 국가 안보, 기업 비밀, 개인정보 보호 같은 이유로 접근은 통제됩니다. 따라서 희소성은 물건 자체가 아니라 권리와 접근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경제학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변화입니다. 재화의 희소성에서 권리의 희소성으로의 이동은, 시장의 논리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분배 문제를 확대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희소성이 사라지는가가 아니라, 희소성은 어디로 이동하는가입니다. 이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면 AGI 시대의 불평등도 더 명확해집니다. 정보와 지식의 희소성이 줄어들면 모두가 비슷해질 것처럼 보이지만, 에너지와 컴퓨팅, 공간과 신뢰, 권리의 희소성이 강화되면 오히려 격차는 커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희소성은 대체로 자본과 제도, 그리고 정치적 협상력을 통해서만 확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노력해서 얻는 성격이 약해지고, 구조적으로 접근이 제한되기 쉬워집니다. 이 점에서 AGI 시대의 불평등은 단지 시장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사회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경로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시장 중심의 경로입니다. 에너지와 컴퓨팅, 인프라를 민간이 경쟁적으로 확보하고, 그 결과물은 서비스 형태로 소비자에게 제공됩니다. 이 경로는 빠른 혁신과 효율을 제공할 수 있지만, 집중과 불평등을 강화할 위험이 큽니다. 다른 하나는 공공성 강화의 경로입니다. 일부 핵심 인프라를 공공 투자로 확충하고, 사회 전체의 접근성을 높이며, 신뢰와 권리의 희소성을 완화하려는 시도입니다. 이 경로는 분배를 안정화할 수 있지만, 관료주의와 비효율, 정치적 갈등을 동반할 수 있습니다. 현실은 이 둘의 혼합일 것입니다. 문제는 어느 쪽으로 무게중심이 기울어지느냐입니다.
AGI는 풍요를 확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소성을 없애지 않습니다. 희소성은 이동합니다. 지식과 문서 생산의 희소성이 약해지는 만큼, 에너지와 컴퓨팅, 인프라와 공간, 신뢰와 권리의 희소성이 강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AGI 시대의 경제를 이해하려면 단순히 기술의 성능이 아니라, 새로운 희소성이 어디에 형성되고 누가 그것을 통제하는지를 봐야 합니다. 희소성은 곧 권력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리고 권력의 배치는 풍요와 불평등의 갈림길을 결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