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 속의 불평등

왜 이런 모순이 생기는가?

by 드라이트리

우리는 흔히 기술 발전을 풍요와 동일시합니다. 더 좋은 기술은 더 많은 생산을 가능하게 하고, 더 많은 생산은 더 낮은 가격을 만들며, 더 낮은 가격은 더 많은 사람의 삶을 편하게 한다는 직관이 있습니다. 실제로 장기적으로 보면 기술은 인류의 평균 삶의 질을 끌어올렸습니다. 영양, 위생, 의료, 이동, 정보 접근에서 기술의 기여는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현실 세계는 늘 같은 질문을 되풀이합니다. 기술은 분명 발전하는데 왜 불평등은 줄지 않는가. 어떤 시기에는 오히려 더 커지는가. AGI 시대에는 이 질문이 더 날카로워집니다. 생산성은 폭발할 수 있지만, 그 폭발이 곧바로 모두의 부로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풍요는 총량이고, 불평등은 배분 구조입니다. 총량이 커진다는 사실만으로 배분 구조가 자동으로 공정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AGI 같은 범용 기술은 총량을 키우면서 동시에 배분의 기울기를 더 가파르게 만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AGI가 만들어내는 가치의 성격이 기존의 기술 혁명과 다르게, 노동과 소득의 연결고리를 약화시키기 쉽기 때문입니다. 임금이 약해질 때 불평등이 커지는 이유는 단지 도덕적 문제나 기업 탐욕이 아니라, 경제 순환의 엔진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풍요 속의 불평등이 커지는 첫 번째 경로는 소득의 이중 구조입니다. AGI는 많은 서비스의 비용을 낮춥니다. 번역, 작성, 디자인, 기초 상담, 분석 같은 영역에서 가격은 내려갑니다. 이때 사람들은 체감상 풍요가 커졌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월 구독료 몇 만 원으로 과거에는 수백만 원이 들던 작업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같은 시기에 자산 가격이 오르고 자본소득이 커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생활비가 낮아져서 숨통이 트이지만, 어떤 사람은 자산 가격 상승에서 멀어지며 부의 축적 기회를 잃습니다. 즉 일상 소비 영역에서는 풍요가 확대되는데, 부의 축적 영역에서는 격차가 벌어지는 이중 구조가 나타납니다. 이 구조가 무서운 이유는, 사람들의 체감이 갈라지기 때문입니다. 누구는 세상이 좋아졌다고 말하고, 누구는 더 나빠졌다고 말합니다. 둘 다 사실일 수 있습니다. 소비재 가격은 내려가는데 자산 접근은 더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경로는 희소성의 이동이 불평등을 강화하는 방식입니다. 4화에서 희소성이 사라지지 않고 이동한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 이동이 불평등의 연료가 됩니다. 정보와 지식 기반 서비스는 풍부해지지만, 전력과 컴퓨팅, 좋은 입지의 인프라, 신뢰와 검증, 고성능 모델에 대한 접근권 같은 요소는 더 희소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희소한 요소들은 대개 개인의 노력만으로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자본과 제도, 그리고 협상력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희소성이 이동할수록 불평등은 노동시장 내부의 문제에서 사회 전체의 구조 문제로 옮겨갑니다. 과거에는 교육과 기술 숙련을 통해 임금 격차를 줄이려는 정책이 비교적 유효했습니다. 그러나 희소성이 인프라와 권리로 이동하면, 교육만으로는 격차를 줄이기 어렵습니다. 좋은 교육을 받아도 고성능 컴퓨팅에 접근할 수 없으면 경쟁이 되지 않는 영역이 생깁니다. 다시 말해 기회의 평등이 작동하는 영역이 축소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경로는 생산성 증가의 과실이 임금이 아니라 이윤으로 먼저 축적된다는 점입니다. 경제학적으로 생산성의 증가는 두 가지 경로로 배분됩니다. 임금이 오르거나, 이윤이 늘거나, 혹은 둘 다입니다. 어느 쪽이 더 커지는지는 제도와 시장구조가 결정합니다. AGI가 도입되는 산업에서 고용 탄력성이 낮아지고, 즉 생산이 늘어도 고용이 늘지 않는 구조가 강화되면, 생산성의 과실은 임금보다 이윤으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특히 지능 인프라를 소유한 기업이 시장지배력을 확보하면, 가격을 충분히 내리지 않고도 초과이윤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경쟁이 충분하면 생산성 향상은 가격 인하로 소비자에게 이전되지만, 경쟁이 약하면 생산성 향상은 기업의 이윤으로 남습니다. 그래서 불평등의 중요한 변수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시장구조입니다. 독점과 과점, 락인 효과, 표준 장악이 강할수록 불평등은 커질 수 있습니다.


네 번째 경로는 속도입니다. 과거의 기술 변화는 대개 세대 단위로 진행됐습니다. 산업 구조가 바뀌면 사회는 교육과 직업훈련, 기업의 투자, 노동시장의 제도 조정을 통해 적응했습니다. 하지만 AGI는 전환 속도를 단축시킬 수 있습니다. 지식 노동의 일부는 소프트웨어 업데이트처럼 빠르게 대체될 수 있고, 산업 전반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도입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개인과 사회가 적응할 시간이 줄어듭니다. 적응 시간이 짧을수록 전환 비용은 취약계층에 더 크게 전가됩니다. 같은 충격이라도 속도가 빠르면 사회적 안전망이 준비되지 못하고, 그 공백은 불평등으로 나타납니다. 불평등은 결과이면서 동시에 전환 비용의 분배입니다. 준비된 사람은 기회를 잡고, 준비되지 못한 사람은 비용을 떠안습니다.


다섯 번째 경로는 신뢰와 인증의 비용이 계층화되는 방식입니다. AGI가 만들어내는 콘텐츠가 넘쳐날수록, 우리는 무엇이 진짜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기업은 의사결정을 위해 검증된 데이터를 원하고, 개인은 사기와 조작을 피하기 위해 신뢰할 수 있는 경로를 원합니다. 이때 신뢰는 공짜가 아닙니다. 검증된 채널은 비용이 들고, 평판을 유지하는 시스템은 유지비가 듭니다. 결과적으로 고신뢰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갈릴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정보 격차가 아니라 의사결정 격차로 이어집니다. 투자, 건강, 교육, 경력 선택에서 신뢰 격차는 장기적으로 소득과 자산 격차로 누적됩니다. 풍요가 늘어났는데도 불평등이 커지는 또 하나의 이유는, 풍요의 부작용으로 검증 비용이 생기고 그 비용이 계층화되기 때문입니다.


여섯 번째 경로는 정치경제적 피드백입니다. 불평등이 커지면 정치가 흔들립니다. 정치가 흔들리면 제도가 불안정해지고, 제도 불안정은 투자와 혁신의 방향을 바꿉니다. 어떤 사회는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재분배를 강화하지만, 어떤 사회는 불평등을 정당화하거나 방치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이 갈림길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적 합의의 질입니다. AGI 시대에는 기술이 너무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정치가 단기 인기 정책에 매몰되면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구조 개혁을 시도하더라도 이해관계 충돌이 극단화되면 개혁은 지연됩니다. 이 지연 자체가 불평등을 더 키울 수 있습니다. 불평등은 경제적 결과일 뿐 아니라 정치적 과정의 산물입니다.


그렇다면 풍요 속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무엇을 봐야 할까요. 저는 세 가지 질문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첫째, 생산성의 과실이 임금, 가격 인하, 이윤 중 어디로 주로 흘러가고 있는가를 봐야 합니다. 둘째, 희소성이 이동한 영역에서 접근권이 어떻게 배분되는가를 봐야 합니다. 전력과 컴퓨팅, 고성능 모델 접근, 신뢰 인프라가 일부에게만 집중되는지, 아니면 공공성과 경쟁을 통해 넓게 확산되는지 봐야 합니다. 셋째, 전환 비용을 누가 부담하는가를 봐야 합니다. 재교육과 사회 안전망, 지역 전환 정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풍요는 불평등의 다른 이름이 될 수 있습니다.


AGI는 풍요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풍요는 자동으로 분배되지 않습니다. 풍요가 커질수록 분배 구조의 중요성은 더 커집니다. 가격이 내려가는 영역에서 모두가 혜택을 보더라도, 희소성이 이동한 영역에서 접근권이 계층화되면 불평등은 확대됩니다. 생산성의 과실이 임금으로 이어지지 않고 이윤과 자산으로 축적되면 격차는 구조화됩니다. 전환 속도가 빠르면 전환 비용은 취약한 곳에 집중됩니다. 결국 풍요와 불평등의 갈림길은 기술이 아니라 제도와 소유 구조, 그리고 사회적 합의가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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