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터렐 / 앤쏘니 맥콜 / 헬렌 B. 그로스만
건축설계를 전공한 나와 조소를 전공한 와이프는 빛을 탐구하여 작업하는 작가들을 참 좋아한다. 때마침 서울의 여러 갤러리들에서 각자만의 방식으로 빛을 탐구하는 작가들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고, 관람 후 세 가지 전시를 Space / Light / Color 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엮어 리뷰해 보면 또 다른 시선과 이야깃거리들이 생겨날 것이라 생각하여 글을 쓰게 되었다. 각 전시가 진행 중인 갤러리는 다음과 같다.
James Turrell - The Return @Pace Gallery Seoul
Anthony McCall: Works 1972-2020 @Futura Seoul
Helene B. Grossmann - Before the Light @KIMREEAA GALLERY
James Turrell
기존 페이스 갤러리의 공간을 생각하며, 터렐이 과연 어떤 식으로 본인의 작업을 설치하였을지 궁금했었다. 이번 전시는 몰입형 전시 5개(카페 포함)를 각 층별로 골고루 배치하였는데, 관람객들이 원래 인지하고 있던 페이스 갤러리의 공간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작품을 관람하기에 최적화하여 구성하였다고 생각한다. 1,2층에 배치된 'Glassworks' 작업들은 제작된 벤치에 앉아 서서히 변화하는 빛을 바라보며 고요한 명상의 시간으로 빠져들게 한다. 그리고 3층의 'Wedgework' 작업은 약 25분간 10명의 관람객들만 들어갈 수 있도록 통제되는데, 관람객은 어두웠던 공간이 빛에 의해 완전히 재구성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Anthony McCall
전시의 시퀀스 상 마지막에 다다라면 높은 천장고를 가진 어두운 공간이 등장한다. 이곳에 'Skylight' 와 'Between You and I' 를 포함한 체험형 빛 조각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걸어 다니며 직접 통과해 볼 수 있는데, 이런 행위를 통해 공간이 빛과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하나의 무대처럼 인식되게 한다.
Helene B. Grossmann
그로스만의 작업은 앞의 두 작가와는 달리 회화라서 직접적으로 몸을 써가며 체험하는 부분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작품들마다 각기 다른 빛과 색의 레이어링을 통해 작품을 마주하는 관람객들에 각자의 내면의 감정과 기억들을 끄집어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실제로 아래의 작품을 바라보며 필자는 추상적인 이미지를 통해 드넓은 초원의 쨍한 햇빛과 습한 공기의 온도까지 상상해 볼 수 있었다.
James Turrell
터렐의 작업은 빛 자체가 공간의 주인공이 되어 관람객이 빛을 인지하는 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데, 빛의 농도와 색, 변화하는 속도 등을 통해 공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인식하도록 한다. 이는 단순히 빛뿐만 아니라 빛이 퍼져 나오는 벽면의 모서리들을 날카롭게 재단하여 벽과 빛의 경계를 애초에 흐려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Anthony McCall
어둠 속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옅게 뿌려지는 안개에 투사된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은 손으로 만질 수는 없다. 하지만 전시를 관람하는 관람객들은 이를 마치 단단한 벽처럼 생각하며 안과 밖의 경계가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다 이 빛에 익숙해지면 조심스레 빛 자체를 만져보려 손을 뻗어보기도 한다. 나 역시도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리차드 세라의 작업을 빛으로 재구성하면 이런 느낌일지 상상해보기도 했다.
Helene B. Grossmann
그로스만의 회화를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작품이 고정된 회화가 아니라 관람객과 빛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계속해서 변화하고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든다. 이는 수백 번의 투명한 레이어를 쌓아 올리는 작업을 통해 생겨나는 빛의 레이어가 캔버스 안에서 조형적으로 시각적 리듬과 깊이를 만들어 내, 관람객이 새로운 공간감을 지속적으로 발견할 수 있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James Turrell
갤러리 내 설치된 각 몰입형 전시공간은 관람객에게 색채로 가득 찬 빛의 공간을 제공한다. 이는 단순히 벽과 천장에 색을 도장한 것이 아니라 공간 자체를 빛이라는 물성으로 채운 것인데, 이는 색채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관람하는 관람객의 움직임과 주변 맥락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러한 방식으로 터렐의 작업은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Anthony McCall
다른 두 작가의 작업과 달리 맥콜의 작업에서 색은 상대적으로 절제되어 있다. 하지만 빛의 농도와 투명도, 그림자와 명암의 변화가 공간의 분위기를 변화무쌍하게 만든다. 빛과 어두운 공간이 만들어내는 흑백의 명확한 대비와 미세한 그라데이션은 오히려 명쾌하게 공간을 가르고 경계를 만들며 관람객의 신체를 감싸는 경험을 할 수 있게 한다.
Helene B. Grossmann
김리아 갤러리에서는 1층은 자연광을 살리고 2층은 에르코 조명을 활용한 인공광을 통해 그로스만의 작품을 다양한 빛의 환경에서 경험할 수 있게 한다. 이는 낮과 밤, 인공광의 조도에 따라 전혀 다른 색감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어두운 환경에서는 색상이 마치 캔버스 내부에서부터 발광하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고, 밝은 환경에서는 투명한 색채 레이어의 중첩이 두드러져 하나의 색이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질감을 느낄 수 있다.
세 작가는 모두 빛을 관람객이 직접 경험하고 체험하게 하는 작업을 지향한다. 여기서 빛은 단순한 조명이나 시각적인 효과에서 그치지 않고 공간을 재구성하며 관람객의 감각을 확장하는 주체로 작용하게 된다. 이를 통해 관람객은 각자가 자신의 감각, 인식, 존재를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렇게 비슷하면서도 다른 세 작가의 작업들을 모두 경험하고 비교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