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처음'이 있다
처음 출근하던 날이 떠오른다. 모든 것이 생소한 공간.
낯선 사람들, 익숙지 않은 공기, 어색하게 맞춰야 하는 호흡들.
인사를 건넬 때마다 목소리는 조금씩 작아졌고 책상에 앉아선 주변을 한참 두리번거렸다.
누구도 특별히 냉정하지 않았지만, 그날의 공기는 이상하게 차가웠다.
잘해야 한다는 긴장감과 어울리지 못할까 하는 조심스러움,
그 사이 어딘가 조금은 외로워지는 마음이 있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집 안 공기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변화는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작았지만, 분명한 기척이었다.
오랜 시간 비워 두었던 자리에, 말없이 들어선 존재 때문이었다.
박스 안에는 마른 담요와 함께, 여윈 고양이 한 마리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고개는 살짝 숙여져 있었고 두 눈은 조심스레 위를 향해 깜빡였다.
벽을 등진 채 작은 박스 구석에 등을 기댄 모습이었다.
도망치지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 단지, 침묵 속에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부부는 작은 종지에 물을 담고 옆에는 참치캔을 따서 놓았다.
아내는 고양이에게 말없이 다가가지 않았고, 남자는 몇 걸음 뒤에 앉았다.
어느 쪽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불필요한 친절도 없었고 서두른 배려도 없었다.
고양이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목이 마를 법도 했지만 물조차 마시지 않았다.
낯선 공간을 낯설게 인식하고 있는 생명체는 박스 안에서 한 걸음도 밖으로 나올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 순간, 조용한 목소리가 공간을 스쳤다.
“괜찮아. 여기선 너를 해칠 사람이 없어.”
그 말은 고양이를 향했지만 그 말을 건넨 아내 역시 그 말을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려는 듯 보였다.
아내는 자리를 바꾸며 박스 곁에 조용히 앉았고 남자는 말없이 옆방 문턱에 등을 기대었다.
그 고요한 시간을 틈타, 아내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전에 키웠다고 얘기했던 ‘모리’알지?
그 애도 길고양이였는데 동생이 데리고 왔지. 워낙 활동적이어서 집을 나갔다가도 다시 돌아오곤 했지.
한번은 배가 불룩해져서 돌아오더니, 얼마 안 있어 새끼를 낳더라고.
근데… 어느 날 나간 뒤론, 다시 돌아오지 않았어.”
아내는 잠시 말을 멈췄고, 거실은 이내 잠잠해졌다.
남자는 알고 있다는 듯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고양이 쪽을 바라보며 숨을 고를 뿐이었다.
‘모리’는 아내가 결혼 전에 함께했던 첫 고양이였다.
그 이름과 함께 아마도 그 시절의 기억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아내는 두 번째 고양이에게
자연스럽게 다음 글자를 이어 붙이듯 이름을 지었다.
‘ㅁ’ 다음 글자인 ‘ㅂ’으로 시작하는 이름.
그렇게, ‘보리’가 되었다.
이름의 이유는 단순한 글자 순서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계절이 늦가을이었고 마른 들판을 스치는 바람과
햇살에 누렇게 익은 이삭 같은 풍경들이 ‘보리’라는 단어를 자꾸 떠오르게 했던 탓도 있었다.
들판 위에 고요히 고개를 숙인 보리처럼 박스 안의 작은 고양이는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어쩌면, 그 이름은 이 아이가 이 집에서 다시 뿌리내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둘 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했지만 그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날 밤, 그저 그렇게 가만히 존재하는 일이 중요해 보였다.
시간이 조금씩 흘렀다. 창밖엔 밤이 깊어져가고, 거실엔 어둠이 가득 찼다.
그때, 박스 안쪽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고양이의 앞발 하나가 박스의 가장자리에 올라섰고 이내 다른 한쪽 발도 상자에 살짝 얹혔다.
상체를 들어 주변을 살피는 동작은 무엇 하나 쉽게 믿을 수 없는 공간을 향한 신중한 경계였다.
보리는 박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담요 위에서 고개를 내밀어 낯선 집 안을 둘러보았다. 낯선 소리, 낯선 냄새, 낯선 사람들.
모든 것이 낯설었고, 그래서 침묵은 더 깊어졌다.
그 모습은 마치 처음 출근한 날,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던 누군가를 닮아 있었다.
움직이진 않지만, 모든 감각을 열어두고 있는 상태. 무언가를 시도하진 않지만, 결코 무관심하지 않은 눈빛.
그날 밤, 보리는 결국 상자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먼 마음의 거리를 조금 좁혀냈다. 그것은 여전히 낯설고 어색한 공간 속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서서히 스며드는 감정의 첫 움직임이었다. 서툴고 조심스러웠지만 그건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서서히 스며드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