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처음으로 동물병원을 방문한 집사와 고양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다 보면 몸이 먼저 반응할 때가 있다.
남자는 첫 직장에 출근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목이 도무지 돌아가지 않던 어느 아침을 떠올렸다.
목덜미는 뻣뻣했고 조금만 움직여도 찌릿한 통증이 번졌다. 병원에서는 ‘긴장성 근육통’이라 했다.
낯선 공간과 낯선 사람들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온몸이 굳어 있었던 탓이었다.
적응이란 단어는 언제나 부드럽게 들리지만 몸과 마음은 그리 쉽게 따라주지 않는다.
보리도 그랬던 걸까. 처음엔 낯선 환경에서 오는 긴장감이 원인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스트레스 반응이 아니었다. 먹으면 토했고 토한 뒤엔 미미한 설사가 이어졌다. 먹지 않는 게 아니라 먹을 수 없는 상태였다. 작은 몸 안에서 이미 이상 신호는 시작되고 있었고 그것은 조용하면서도 확실하게 표출되고 있었다. 보리는 여전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캔 사료나 잘게 부순 간식도 모두 외면했다. 그나마 혀끝으로 츄르와 물을 조금 핥을 뿐 음식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작은 몸은 빠르게 축 늘어졌고 움직임은 부쩍 줄었다.
적응기를 겪고 있다고 보기엔 표정이 너무 무기력했고 눈빛은 깊은 곳까지 닫혀 있었다. 남자는 박스 옆에 앉아 조심스레 손등을 내밀었지만 보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몸 어딘가가 좋지 않다는 걸, 침묵이 먼저 말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남자는 집 근처 동물병원을 검색했다.
가장 가까운 곳은 오래된 간판과 낡은 유리문을 가진 작고 허름한 병원 하나뿐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망설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날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무언가라도 해줘야만 할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건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자는 보리를 담요로 조심히 감싼 뒤 박스에 담았다.
담요에 감싸인 보리는 얕은 울음소리와 함께 박스에 담겨 이동하는 그 느낌에 놀라서인지 발버둥 쳤지만 간신히 박스입구를 막고 진정하기를 마음 속으로 바랬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남자는 계속 걱정했다.
'큰 병이면 어쩌지? 혹시 늦은 건 아닐까. 병원도, 보리도 모두 낯선데'
아이를 처음 병원에 데려가는 부모처럼 작은 숨결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병원 입구에 섰을 땐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아무 일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진심이었다. 가벼운 탈이나 피로 때문이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다.
문을 열자 약간의 곰팡내가 먼저 반겼다.
낡은 간판 아래, 희미한 형광등이 깜빡였고 대기 의자는 펼쳐지지 않은 신문이 쌓여 있었으며, 반려동물 사료는 선반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병원이라기보다 오래된 창고 같았다.
남자는 문턱에서 잠시 망설였다.
이곳이 정말 병원이 맞는지, 이 사람이 진짜 수의사가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때 안쪽에서 중년의 남자가 나타났다.
흰 가운 대신 바래진 남색 수술복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고, 자기소개도 인사도 없이 툭 내뱉었다.
“20년 가까이 병원을 운영했는데요, 하고 싶어서 한 건 아니에요. 그냥,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됐네요.”
그 말이 자기 합리화인지, 진심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 공간이 오랫동안 동물들과 함께해왔다는 건 빈 사료통과 바랜 진료 기록들이 증명하고 있었다.
남자는 조심스레 담요를 펼쳐 보였다. 보리가 뛰쳐나오려고 했지만 익숙한 듯 손쉽게 제압했다.
수의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다가와 보리의 귀를 뒤집고, 입을 들추고, 배를 톡톡 두드렸다.
“생후 두 달 남짓 됐네요. 몸무게도 좀 빠졌고, 영양 상태가 안 좋아요. 탈수도 꽤 왔고, 설사했죠?”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수의사는 주사기를 꺼내들었다.
“뭐, 이 나이 땐 흔한 일이긴 해요. 그래도 지금 잡아야지, 늦으면 안 좋죠.”
영양제 하나, 항생제 하나.
두 개의 주사가 빠르게 보리의 작은 몸에 들어갔다.
보리는 앙칼지게 울며 몸을 비틀었지만, 수의사의 익숙한 손놀림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모습은 무심하면서도 정확했고, 괴팍하면서도 단단했다.
잠시 후, 가루로 된 설사약을 건네며 수의사는 덧붙였다.
“사료는 조금씩 줘요. 약은 물에 타서 입 안에 살짝 짜 넣으면 돼요. 3일이면 좋아질 겁니다.”
남자는 영수증과 약봉투를 챙기며 속으로 다짐했다.
‘다시는 여기 안 온다…’
돌아오는 길, 남자의 얼굴은 진이 빠져 있었고 보리도 침묵 속에 담요를 파고들었다.
주사 맞을 때의 날카로움은 사라졌고 눈빛도 몸도 지쳐 있었다.
남자는 보리가 들어있는 박스를 품은 채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손에는 약봉투 하나, 품에는 여전히 뜨거운 온기를 품은 작은 생명이 있었다.
남자는 작게 중얼거렸다.
“보리야 괜찮아질 거야… 금방 좋아질 거야.”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거실엔 조용히 불이 켜졌다.
남자는 주방으로 가 작은 주사기를 꺼냈다.
하얀 가루약을 컵에 붓고 미지근한 물을 약간 섞으니 쓴 냄새가 퍼졌고, 그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주사기 안에 약을 채우고 돌아오자 보리는 낯선 기척에 몸을 움찔했다.
남자가 다가가자 보리는 뒷발로 몸을 밀어내며 아내의 품을 벗어나려 했다.
“괜찮아, 보리야. 이거 먹어야지. 금방 끝나.”
남자의 목소리는 최대한 부드러웠지만, 보리는 거부했다. 몸을 뒤틀고, 담요를 긁고, 작은 울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아내는 품을 놓지 않았다.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보리의 입 옆에 주사기 끝을 댔고 천천히 약을 짜 넣었다. 보리는 침을 흘리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결국 약은 모두 들어갔다. 10여분의 조용한 전투가 끝났다.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고,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약봉투는 테이블 위에 올려졌고 보리는 천천히 박스로 걸어 들어갔다. 아무 말 없이, 터덜터덜.
그 작은 몸은 담요 위에 둥글게 말려 잠시 숨을 골랐다. 눈은 감지 않았고 조용한 기척만 방 안을 채웠다.
남자와 아내는 그 박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틀 뒤, 설사는 보란듯이 멈췄고 먹는 것에 대한 경계도 많이 허물어졌는지 음식과 간식 모두 "찹찹"소리내며 잘 먹었다. 괴짜 수의사에 대한 반발심은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기운을 차린 보리의 모습에 부부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랐다.
첫 고통은 언제나 큰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몸이 기억하게 되는 것은 아픔이 아니라 그때 곁에 있었던 온기가 아닐까. 시간은 그 온기를 조금씩 깊게 만들고 아픔은 그렇게 아주 서서히 작아진다. 인간도 고양이도 처음의 두려움 앞에서 쉽게 물러선다. 나약함은 때때로 침묵으로, 때로는 도망치는 몸짓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피한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결국엔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 몸과 마음은 서서히 배운다. 마치 '긴장성 긴장통'이 오는 것처럼 말이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아도 환경이 우리를 그 방향으로 이끌 때가 있다.
그렇게 우리는 겁을 안은 채 나아가고 언젠가는 그 겁을 이긴 자리에 서게 된다.
결국 두려움을 넘는 건 용기가 아니라, 시간을 견뎌낸 삶 그 자체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