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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스리랑카 Apr 30. 2022

노가다는 나의 벗

이제 이 조선 톱에도 녹이 슬었네.. ​


2007.4.30. 와인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당분간 술을 마실 수 없다며 수술 전날 선생 내외분은 칠레(domus Aurea 2004) 호주(Stonehaven shiraz2000) 스페인 와인(Torre Muga2004)을 가져왔다. 치즈도 바리바리 싸서 먹으라고 챙겨주시고는 다신, 만날 수 없다는 듯 잔을 채운다. 사실 며칠간 과음한 탓으로 술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다. 이별의 잔은 푸짐한 신세계 와인들로 화려했지만, 그 뒤에 감추어진 쓸쓸한 술맛은 내게 많은 생각을 가져다준다.

 나와 선생과의 인연은 어디서부터 맺어진 것인가, 선생은 몇 잔을 끝으로 더 이상 손을 대지 않는다. 각 병마다 절반 이상씩 남겨진 와인을 두고 가면서 좋은 와인이라고, 며칠 지나도 끄떡없을 거라고 하면서 떠나갔다. 살다 보면 이처럼 귀한 와인도 측은할 때가 있구나. 그 후, 나 역시 마시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와인 쿨러에서 이리저리 뒹굴리다, 향기도 특유의 맛도 사라져버린 와인을 비우면서, 다시 선생을 생각한다.

 


그렇게 이천칠년 럭셔리한 봄이 지나갔다. 그 뒤 선생과의 인연은 간간이 이어지긴 했지만, 그 시절처럼 왕성하게 와인을 마셔대진 못했다. 선생의 건강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와인 선생이면서 물주였던 그의 건강이, 와인 수업의 최대 장애인 셈이었다. 그 뒤, 세상의 모든 와인 맛을 전수할 듯한 선생의  탐구 의지는 사라졌지만, 그래도 그때의 기억을 안주 삼아, 와인 일기장에 기록된 흔적을 들쳐보곤, 같이 즐거워했다. 또 그 뒤, 그리고 난 화류계(?)를 미련 없이 떠났다. 와인숍을 정리하고, 와인은 정말  몹쓸 술이라고, 아주 나쁜 부르주아 상징이라고 욕을 해대며, 정을 뗐다. 또 그리고 그 뒤, 세상의 궁금한 공기를 마음껏 마시자 하면서 이 땅을 떠났다. 그렇게 해서 선생과는 인연이 끝이 났고, 십수 년이 후딱 지나갔다.  




 광풍 같던 선거가 끝났다. 벗들에게 공개적으로 지지하던 후보가 낙선하면서, 이 몸 또한 대미지(국어사전에 의하면, 경기 중 상대편에게 많이 맞아서 신체가  부담을 느끼는 상태라고 정의)를 받아, 한동안 추스르냐고 마음이 아팠다. 지금은 뭐 그런대로 새로운 대통령의 좋은 점만 이쁘게 보려고 애쓰고 있다. 단, 최저 임금 일자리는 뺐어가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잔인한 춘삼월에 모질게 담배를 끊었다. 새로운 세상에 걸맞은 노가다의 변신 정도쯤 될까.. 거의 죽는 줄 알았다. 살다 보면 또 좋은 시절이 올 것이다. 그때 맛있게 또 피우자. 지금은  어찌어찌 구르다 시청 기간제 노무단의 일원이 되어 이산 저산 산속을 누비며, 산림을 돌보고 있다. 굳이 밝히자면,  ' 임도 관리원'  즉, 시유림에 설치된 임도의 배수로, 노면 및 배수관의 정비, 제초 작업, 임도 순찰 관리, 기타 관계 공무원이 지시하는 산림분야 업무 등이 주 임무이다. 작은 수입, 작은 책임, 작은 위험에 비교적 빨리 쫀쫀해져 가는 자신을 어여쁘게  반추한다. 바쁘게 살다, 바쁘게 죽기를 소망하며.




원주  정대교 선생 가옥

원주시 단구동 끝자락, 얼추 수천 평에 달하는 대저택,  한때 나의 와인 선생인 정대교씨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원주 유수의 반듯한 조선집이  2022.4.15 헐리고 있다. 강원도에서 둘째라면 서운할 만큼 재력가였던 선생의 집안도, 선생의 건강과 함께  급격하게 쇠락을 맞는다. 더 이상 관리가 어려워 건축업자에게 매도를 했다고 전해진다지만, 선생에게 돈은 그냥 종이호랑이 일뿐, 그에게 작은 일상 하나도 회복해 주지 못했다.  그렇게 천년만년 갈 것 같은 가문의 위업도, 어느 한순간 사라지고 만다. 선생은  건강을 잃고, 이 집의 허망한 보존보다도 먼저 찾아왔을, 세상의 '부질없음'에 항복하고 있었을 것이다. 포클레인의 강력한 펀치를 맞은, 백수십 년을 지탱해온 기둥과 기와들이 와르르 무너진다. 이를 곁에서 지켜보던 친구 '심재근'이 안타까움을 전해왔다. 그럼에도 난 현장에 달려갈, 그럴 용기가 없었다. 먼발치서 부서져 내리는 파편들을 상상할 뿐, 도저히 가질 수 없었기에 더더욱 애증이 교차했던 그런 그 집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 나의 부러움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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