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년을 꾹꾹 눌러 담은 말들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아?"
신혼 초였습니다.
남편은 무표정한 얼굴로, 마치 선생님이 학생을 혼내듯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얼어붙었습니다.
결혼 전에는 들어본 적 없는 말투였고,
무섭게 인상을 찌푸린 그의 얼굴은,
나에게 처음으로 '이 사람은 나를 지배하려고 하는구나'라는 감정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 이후로, 소심했던 나는 더 그에게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무언가 잘못해도, 아니 잘못하지 않아도, 늘 내가 뭔가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그의 말투 하나, 표정 하나에 제 감정은 조용히 숨죽였고, 마음은 점점 말라갔습니다.
**
그는 자신의 행동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뭔가 문제가 생겨도 얼버무리거나 딴 이야기를 꺼내며 책임을 피했습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미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내 말도 번번이 부정당했습니다.
"내가 언제?", "그런 말 한 적 없어.", "그건 네가 잘못 기억하는 거야."
그 말들이 반복되다 보니,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내 기억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내가 그렇게 들은 게 맞나?'
'내가 예민해서 그렇게 느낀 건가?'
'혹시 내가 오해했나?'
그렇게 자꾸 내 안의 감정을 되짚고 조심하다 보니,
결국은 말하는 걸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말해봤자, 또 다른 말로 바뀌고,
내가 한 말은 사라지고,
그가 원하는 이야기만 남게 될 테니까요.
그 침묵은 점점 체념이 되었고,
체념은 곧 내면화된 '나의 탓'으로 굳어졌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 말들의 뿌리를 하나씩 되짚게 되었습니다.
**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남편의 주식투자로 빚을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살던 집을 팔고 작은 집으로 이사한 어느 날,
시어머니가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사주팔자가 그래서 그래."
남편의 주식 실패, 빚, 불안정한 생활.
그 모든 것은 당신 아들의 선택과 책임이었지만, 어머니는 내 팔자 탓을 했습니다.
그 말은 단숨에 제 삶 전체를 부정해 버렸습니다.
그때부터였습니다.
나는 내 삶을 감당해야 하는 걸 운명처럼 여겼습니다.
누군가의 잘못된 선택조차, 내 탓처럼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사람처럼 느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 조심스레 그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어머니, 예전에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모든 게 선명해졌습니다.
남편의 말투, 그의 회피, 왜곡된 기억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
그리고 내가 짊어진 그 모든 말들의 무게가,
상대에게는 단 한 마디로 부정되어 버릴 수 있다는 현실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때도 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오랜 세월, 마음속에 상처로 남아 있었던 말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진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기로 했습니다.
**
기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말들은 흩어져도, 마음속 어딘가에 꾹꾹 눌려져 상처로 남습니다.
그 말들에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
그 시간에 내가 얼마나 버텼는지를 이제는 나 스스로 인정해 주기로 했습니다.
나는 유난스러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외면당한 말들 속에서 조용히 살아내려 애썼을 뿐입니다.
이제는 말하려 합니다.
내 안의 기억을 내가 지워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다시 나로 살아가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