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철인이십팔호 Sep 23. 2021

군주란 덕을 베푸는 자
신하는 윗사람에게 의탁하는 자

이제 예의염치를 습득해서 자발성을 보여줄 신민에 의해 군주-신민 간 관계의 규범성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 방법의 대략은 군주의 의무선행, 즉 사랑과 이익을 후하게 베풀면 백성을 가까이 할 수 있고 지식과 예절을 밝히면 백성을 교화할 수 있다는 사실에 달려 있다. 


이 점에서 [관자] 첫 편으로 「목민」을 편집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바로 ‘민심을 획득’하는 것이 ‘좋은 정치’라는 사실이다. “정치가 흥하는 것은 민심을 따르는데 있고 정치가 피폐해지는 것은 민심을 거스르는데 있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하는 [관자] 「목민」편의 구절은 앞서 언급했던 인간관에 기초해서 군주의 책무가 무엇인지 설명한다. 그것은 사순(四順)으로 명명되는 네 가지 군주의 실천덕목(德目)으로 다음과 같다: ① 백성은 근심과 노고를 싫어하므로 그들을 편안하고 즐겁게 해줘야 한다. ② 백성은 가난하고 천한 것을 싫어하므로 그들을 부유하고 귀하게 해줘야 한다. ③ 백성은 위험에 빠지는 것을 싫어하므로 그들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해줘야 한다. ④ 백성은 후사가 끊기는 것을 싫어하므로 그들이 잘 살도록 해줘야 한다. 그러므로 군주가 신민의 현실적인 욕망인 생명과 재산 그리고 명예의 보존을 충족시킬 경우 멀었던 사람도 저절로 가까워지고 반대로 백성이 싫어하는 네 가지를 행하면 가까웠던 사람도 배반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군주-신민 간 관계를 규범화하는 단서 역시 양자 모두의 합리적 선택이다.


그렇다면 예치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인 편견이 무너질 가능성이 등장한다. 왜냐하면 의무를 선행한 군주에 대한 복종과 순응, 즉 왕자(王者)에 대한 존군(尊君) 역시 신민의 교화에 의한 것보다 이익의 계산이라는 합리성에 의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일까? [관자]에서는 이런 위험성에 빠지지 않는다. 다만 “자신에게 죄를 돌리는 사람은 백성에게 죄를 얻지 않고 자신에게 죄를 돌리지 않는 사람은 백성이 죄를 준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불선하지 않는 사람은 어질다”는 표현에서 보이듯이 법치의 기제가 보장하는 합리성에 비해 예치의 기제가 요구하는 합리성의 수준이 덕(德)의 실천-최선(最善)-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옛날 현명한 군주는 천하의 백성을 사랑했기 때문에 천하가 귀부하고 폭군은 천하의 백성을 미워했기 때문에 천하가 이반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재화만으로 (백성에게) 사랑을 표현하기에 부족하고 형벌만으로 (백성을) 미워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점에서 재화는 사랑을 표현하는 수단의 말단이고 형벌은 미움을 표현하는 수단의 말단에 불과하다고 구별한다. 그것은 현실인간의 이기적 욕망충족을 도덕적 완성자로서 군주의 애민(愛民)을 반증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입장이며 인간의 이기성을 증오하고 불신(不信)해서 엄형에 기초한 법치의 적용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이익의 충족이 최선의 선택을 가져온다는 근거는 무엇일까? 바로 군주가 덕의 실천을 항상 인간의 이기성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이루기 때문이다. 이를 위한 [관자]의 논거는 흥미롭다. “물은 … 아름답고 추한 것, 현명하고 못난 것, 어리석고 뛰어난 것이 나오는 곳 … 성인은 세상을 교화할 때 물의 본성을 잘 이해했다. 그러므로 물이 순일하면 백성의 마음도 바르고 물이 맑으면 백성의 마음도 단순하다. 순일하면 더러워지지 않으려 하고 백성의 마음이 단순하면 행위에 사악함이 없다”는 대목은 [맹자]의 인성논쟁에서 제기되는 “물 자체에 정말 동서의 구분이 없기는 하지만 상하의 구분도 없겠는가? 사람의 본성이 선한 것은 마치 물이 아래로 흘러가는 것과 같다. 사람은 선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물은 아래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없다. 만약 물을 튀어 오르게 하면 이마 높이를 넘어 가게 할 수 있고 물결을 막아서 거슬러 올라가도록 하면 산 위에까지 오르게 할 수 있다. 이것이 어찌 물의 본성이겠는가? 밖으로부터 가해지는 힘이 그렇게 한 것이다. 사람이 불선한 것을 행하게 되는 것도 그 경우가 또한 이와 같다”는 ‘물’의 비유와 동일한 의미를 내포한다. [맹자]에서는 오직 외부조건에 의해서 선악이 결정될 경우 선행과 악행의 여부가 주어진 조건과 규범에 따라 결정된다는 위험성을 경고한 것이지만, 동시에 물이 가진 본성의 불변을 강조함으로써 인간본성에 내재한 도덕적 완성의 발현을 보장하려는 것이었다.  


[맹자]와 마찬가지로 [관자] 역시 백성이 이익을 좇음은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를 때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는 것과 같다는 물의 비유로 인간의 이기성을 인정하고, 이로 인해 군주의 덕이 실천되는지 여부에 따라 신민의 덕-존군(尊君)-이 실천된다는 사실을 인지할 경우, 다스림과 어지러움은 윗사람에게 달려 있는 문제라는 결론에 이른다. 즉 “기쁨을 백성에게 돌리고 두려워함을 나에게 끌어오는 것이 현명한 군주가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이라는 [관자]의 단정처럼 ‘좋은 정치’란 우선적으로 군주 스스로 신중함과 분별성을 실천지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군주의 덕행과 위엄은 남보다 현명하기 때문이 아니라 군주이기 때문에 그를 따르고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존군을 이끌어내는 군주의 지위의 높고 낮음과 권력의 경중은 3가지 요건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우선 군주인 자는 귀족을 신중히 대하지 않으면 안 되고 백성을 신중히 대하지 않으면 안 되며 부의 축적을 신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 것일까? ①귀족을 신중히 대한다는 것은 현명한 인재를 등용하는 데 달려 있고 ②백성을 신중히 대한다는 것은 관리를 임용하는데 달려 있으며 ③부의 축적을 신중히 한다는 것은 토지이용에 힘쓰는데 달려 있기 때문이다. 


만약 군주-신민 관계로부터 신민의 교화가 군주의 실천지에서 비롯하는 것이라면, 가장 중요한 정치과정에 참여하는 신하와의 관계에서 군주의 실천지는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 “신하와 군주는 욕망을 같이하면서도 직분을 달리하는 사이”라는 [한비자] 같은 법가적 인식뿐만 아니라 “이른바 오래된 나라라는 것은 우람한 나무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를 이어서 나라에 봉사하는 신하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고 지적하면서 도덕적 완성자의 참여여부를 군주의 의무이행 판단의 근거로 채택했던 [맹자]의 인식에 비추어 봤을 때, [관자]는 군신 관계를 “통괄하여 하나로 만드는 것은 군주의 도이고 나누어서 직책을 맡는 것은 신하의 일이다 … 군주란 백성에게 덕을 베푸는 사람이고 신하란 윗사람에게 의탁하여 사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그것은 군신 관계의 구별에 따른 명분의 확정과 함께 양자의 상호성에 의해 ‘좋은 정치’가 결정된다는 현실인식을 반영한다. 이로부터 [관자]는 군주가 여러 신하들을 통제하고 만백성을 통섭하려면 반드시 국가의 중앙에 있는 측근과 지위 높은 대신들의 화합된 협조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중앙의 좌우 대신들과 군주의 관계는 하나의 테두리로 묶여 있다고 단정함으로써 군신 관계에 대한 법가와 유가의 전통적인 인식을 모두 수용한다.


그런데 공적 행위자인 신하 역시 일반 백성과 마찬가지로 이익추구의 위험성을 안고 있다. 물론 신하의 욕망추구는 군주의 책무이행에 따른 교화로 인해 억제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있지만,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까? [관자]에서는 나날이 늘어도 근심 걱정이 주는 것은 오직 충심뿐이고 날로 줄어도 근심 걱정이 더하는 것은 오직 사욕뿐이라고 전제하면서 충심을 늘리고 사욕을 줄이는 것은 지혜로운 일로 신하된 사람의 보편적인 도리로 신하의 도(爲人臣之道)를 일반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군주가 덕을 베푸는데 사사로움이 없으면 천하의 사람이 모여들 것이고 신하는 맡은 일에 힘쓰고 충성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다투지 않으며 직무를 잊지 않고 헛된 이름을 탐하지 말아야 한다는 규범성으로 전개된다. 예를 들어 소백을 섬기라는 제희공(齊僖公)의 유훈을 거부한 포숙에게 신하가 군주에게 힘을 다하지 않으면 믿어주지 않을 것이고 믿지 않으면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며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사직은 안정될 수 없을 것이라고 충고한 관중의 일화는 책무 이행자로서 군주-신하 간 규범적 합리성을 다시 일깨운다. 따라서 군주는 인으로 신하를 거느리고 신하는 믿음을 지켜야 하는 것이 위아래의 예법인 셈이다. 


이처럼 군신 관계의 모범적 형태는 성인이 앞에 있고 바르고 염치 있는 인사가 측근에서 받들고 서로 다투어 의를 행하여 위아래가 모두 다스려진 유도한 군주와 군주가 알아주면 벼슬하고 알아주지 않으면 물러나고 의로 군주를 섬기고 예로 아랫사람을 부리며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나 서로 친하여 마치 형제 같고 국가에 충성을 다하여 위아래가 모두 체모를 얻었으며 군주에게 허물이 있으면 나아가 간하고 의심하지 않으며 군주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로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힘쓰는 유도한 신하의 조합이다. 반면 군주가 되어서 군신 사이의 원칙을 밝혀 신하를 바로잡지 못하면 신하는 신하의 도리를 알지 못하여 군주를 섬기지 않을 것이므로 군주가 군주답게 제 할 일을 못하면 신하도 신하 노릇을 다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윗사람의) 말이 아랫사람에게 베풀어지고 (아랫사람의) 힘이 윗사람에게 호응할 경우 군신관계는 완결된다는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삼왕오패의 정치는 시의(時宜)의 정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