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이 노래를 통해 숨긴 진짜 의미
조커 1을 감명 깊게 본 후 2편이 나오기만을 학수고대했다. 티저가 공개되자마자, 큰 기대를 안고 골드클래스로 바로 예매를 했다. 하지만 영화가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별점은 절반도 채 되지 않고 혹평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서 기대보다 걱정이 더 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기대를 모두 내려놓고, ‘감독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뭔지 들어보자’는 마음으로 영화관에 들어갔다.
영화를 보기 전에 가장 많이 들었던 혹평은 ‘노래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부분 자체가 이 영화의 정체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아서는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받는다. 아서는 변호사와 함께 재판을 준비하게 되는데, 변호사는 조커가 아서와 별개의 인격이며, 그가 저지른 살인사건은 어린 시절 학대와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어린 아서가 만들어낸 조커라는 인격의 짓이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아서는 원치 않게 자신의 불우한 과거가 라이브 방송으로 모두에게 공개되고, 자신이 가장 벗어나고 싶었던 ‘불쌍한 아서’라는 열등감의 틀에 갇히게 된다.
그 과정 속에서 아서는 점점 ‘조커’의 모습으로 변해간다. 그리고 이 변화는 ‘노래’라는 매개체로 표현되었다. 아서가 리를 만나고 나서부터 노래가 시작된다. 리는 아서에게 ‘진짜 당신의 모습은 조커’라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조커는 마치 그 노래에 홀린 듯, 그 기대에 맞추려 하듯이 자신의 억눌린 분노와 열등감을 혼란 속에서 표출하기 시작한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흔히 말하는 ‘도파민 터지는 순간’마다 조커 또는 조커와 리가 노래를 부른다. 노래가 나올 때마다 조커는 ‘모두가 기대하는 조커’의 모습을 보였고, 그를 통해 혼란, 자유, 표출을 형상화했다. 영화 중반부, 아서는 완벽한 조커의 모습으로 재판에 출석한다.
그러나 자신과 일했던 동료 개리가 증인으로 나오면서 영화의 흐름은 달라진다. 개리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조커의 조롱과 질타에도 불구하고, “너만이 나를 비웃지 않고 인간적으로 대해줬는데, 왜 이렇게 된 것이냐.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아서가 아니라 조커라서 무섭다”라고 말한다. 그 후, 조커를 보호하려던 리키가 교도관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조커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 변론의 기회에서 아서는 “조커는 없다”라고 말한다. 그 순간, 자신을 따르던 지지자들과 리가 모두 떠나간다.
그 후 폭탄 테러가 발생하고 아서는 다시 리와 마주하게 된다. 리는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지만, 아서는 그녀를 붙잡고 “그만 노래하고, 말을 해줘”라고 말한다. 이 장면에서 노래는 결국 조커로서의 정체성과 혼돈을 표현하는 매개체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아서는 변호사가 기대했던 ‘불쌍한 아서’도 아니고, 지지자들이 기대했던 ‘혼란의 조커’도 아닌, 그저 아서 자신일 뿐이라는 모습을 보여준다.
돌아서는 지지자들 vs 실망한 우리들
영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조커가 아니라고 느끼고 등을 돌린다. 그 모습을 보며, 우리가 이 영화에서 기대했던 조커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많은 혹평의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조커 1에서 기대했던 모습을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더 많은 액션을 기대했을 수도 있고, 만화에서처럼 우리가 할 수 없는 짓을 해내는 조커를 보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 속 조커는 노래만 주야장천 부르다가 (=정체성의 혼란) 결국 이도 저도 아닌 모습으로 죽은 조커일 뿐이었다. 그들이 기대했던 조커의 모습이 아니자 등을 돌린 지지자들과 지금의 우리 모습이 과연 얼마나 다를까?
영화 속 악당 조커는 결국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한 것을 형상화한 실체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영화에서 어떤 아서를 기대했을까? 그가 진짜 아서였을까, 아니면 우리가 원하는 아서였을까?
오히려 감독이 우리에게 던진 메시지는 이것일지도 모른다.
당신이 기대하는 아서는 누구인가 - 진짜 아서가 누구인지는 우리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이 낮은 별점과 혹평이야말로, 감독이 영화를 통해 나타내고자 했던 메시지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