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ug 18. 2023

한국영화의 한국없음

2023년 한국영화 빅4에 관한 메모

 작년 여름시장의 한국영화 빅4, <외계+인 1부>, <비상선언>, <한산: 용의 출현>, <헌트>의 성적표는 초라했다. 팬데믹 이전부터 있었던 영화시장 ‘대목’에 벌어지던 공멸의 역사는 지난 3월 한국영화 위기론이 다시 화두에 오르던 시기 적었던 글(https://blog.naver.com/dsp9596/223036574430)에서 간단하게 언급했었다. 그러니까 한국영화, 특히 한국 텐트폴 영화들은 스스로 망해가는 중이다. 3월에 적었던 내용을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3~4주 동안 제작비 200~300억에 달하는 영화들이 연달아 개봉하면서 모두가 흥행하길 기대하는 것은 다 함께 망하자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올해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밀수>가 개봉하기 한 주 전에는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1>이 개봉했고,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개봉한 다음 주인 광복절 연휴에는 무려 <오펜하이머>, <보호자>, <달짝지근해: 7510>, <메가로돈 2>가 동시에 개봉 예정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평단과 관객의 지지를 받는 작품일지라도, 현실적으로 상영관이 급속히 축소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국영화 빅4’가 잡아야 할 관객층이 새로운 두 편의 한국영화로 분산되는 상황에 놓였다. 극장 바깥에서도 여름시장의 경쟁자들을 수두룩하다. 넷플릭스는 <D.P.> 시즌2를, 디즈니+는 <무빙>을 내놓았다. 한국 TV드라마의 전통보다는 한국영화의 파생상품이나 다름없는 두 작품 또한 ‘빅4’의 대결상대다. 거리두기의 시간이었던 2020~2022년은 전통적인 영화시장의 ‘대목’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범죄도시>의 2편과 3편은 5월에 개봉해 두 차례 모두 천만을 넘겼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시기에 관객이 늘어나는 것은 맞지만, 텐트폴 영화 4편이 개봉해 3편이 손익분기점을 넘기던 시기는 이미 먼 과거의 이야기다. 개별 영화의 퀄리티와 상관없이, 지금의 배급방식은 필연적인 실패로 이어진다.     

 시장분석을 하려고 글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렇게 시작해보고 싶었다. 빅4라 불리는 텐트폴 영화들이 연달아 개봉하는 시기는 여러 편의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들을 염두에 둔 선택이다. 네 편의 영화 중 하나만 보는 것이 아니라, 네 편의 영화 중 몇 편이나 관람하게 만드느냐가 여름시장의 핵심이다. 하지만 이 영화들이 관객에게 주는 경험은 무엇인가? “티켓값이 비싸다”와 “재미있으면 비싸도 본다”라는 의견이 동시에 등장하는 상황에서, 이 영화들은 왜 “티켓값을 못 하는” 것으로 분류될까? 빅4를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팬데믹 이후 유이한 천만영화인 <범죄도시2>와 <범죄도시3>를 이야기해 보자. 두 영화는 마석도(혹은 그저 마동석)라는 인물이 자유롭게 범죄자들을 두들겨 팰 수 있는 치외법권을 구성한다.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진실의 방’은 두 작품이 담아내는 공간 그 자체다. <범죄도시2>는 일종의 슈퍼히어로인 마석도의 활동반경을 동남아시아로 확장한다. 그는 1편의 배경인 가리봉동 일대에서 그랬던 것처럼, 법을 초월한 주먹을 통해 범죄자를 상대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악역 강해상(손석구)의 본거지인 베트남이 아니라 고양시 일대에서 마무리된다. 비슷한 배경으로 태국을 택했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가 한국 바깥에서 모든 서사를 마무리한 것과 대조된다. <범죄도시2>는 ‘한국’을 한국 바깥까지 확장하려 한다. 시리즈의 첫 영화는 조선족이 거주하는 곳을 배경으로 삼았다가 인종차별적이라는 비판을 들었다. 이 비판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시리즈가 가상의 행정구역을 만들어내는 대신 ‘금천구’나 ‘가리봉동’이라는 지명을 그대로 옮겨온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조금씩 범죄의 성격은 바뀌지만, 꾸준히 실존했던 사건들에서 모티프를 끌어오는 <범죄도시> 시리즈가 노리는 것은 일종의 장소특정적 상상력이다. 가리봉동, 베트남, 인천 등 각 영화가 배경으로 삼는 공간이 일종의 우범지대로 묘사하며 비판받을 지점을 남기지만, 그곳에서 활약하는 마석도의 모습을 통해 하나의 모습으로 통일된 한국의 모습을 그려낸다. 마블코믹스의 히어로들이 활약하는 도시나 동네에 따라 정의 내려지고, 그의 역도 성립하는 것처럼 말이다. 여담이지만, 최근 화두에 오른 사건들을 본 이후 <범죄도시> 시리즈를 다시 본다면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2편과 3편에서 마석도의 첫 등장은 길거리에서 난동을 피우는, 칼을 든 (혹은 칼을 꺼낼 예정인) 범죄자를 제압하는 장면이었다. 지금 시점에서 되짚어보자면, 두 장면은 관객이 원하는 한국의 모습을 마동석의 강인함을 경유해 제시한다.      

 그런데 작년과 올해 개봉한 한국영화 대부분에서 한국이라는 장소는 사라진 것만 같다. 중동지역에서 고립되거나 납치된 이들을 다룬 세 편의 영화 <모가디슈>, <교섭>, <비공식작전>은 배우와 사건만 바꾼 같은 영화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세 편의 영화들은 내전이 이어지고 극단주의 단체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중동~아프리카 국가들의 야만을 한국과 대비시키고 있다. 세 편의 영화는 각기 다른 배경, 소말리아, 레바논, 이란을 갖고 있지만 이들 모두는 사실상 동일한 공간처럼 묘사된다. 세 영화는 ‘야만의 땅’인 중동과 한국을 대비시키며 그곳과 다른 한국을 강조한다. ‘구별짓기’의 논리는 세 편의 영화에서 동일하게 작동한다. 이들 작품은 한국 바깥에서 한국의 장소를 찾아내려 한다. 한국 바깥에서 이야기하는 민족애, 한국 바깥에서 기어이 한국인을 구조하는, 국가권력이 승인하지 않은 ‘비공식작전’들로 자국민을 구하는 사람들. 이들 작품은 사건이 벌어진 당시의 한국, 한국의 과거를 비판하는 표면을 내세운다. 동시에 이들 작품은 한국의 과거를 ‘야만의 땅’에 함께 폐기처분함으로써 더 나은 지금의 한국을 이야기하려 한다. 무엇보다 조국의 정책에 의해 중동에 내팽겨진 판수(주지훈)가 이란에서 만난 여자친구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음이 언급되는 영화의 마지막은, 과거의 폐기가 성공적으로 성취됐음을 알리는 승전보나 다름없다.      

 <더 문>은 아예 미지의 땅으로 나아간다. 사고로 인해 달 착륙선의 세 우주인 중 둘이 사망하고, 홀로 남은 새내기 우주인 황선우(도경수)가 남은 임무를 수행한다. 두 우주인의 사망소식이 비통한 소식으로 전파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선우가 무사히 달 착륙에 성공하자 분위기는 반전된다. 미지의 땅을 정복하기 위한 선발대였던 이들은 일종의 소모품일 뿐이다. 달 표면에 내린 유성우로 인해 기존 계획대로 귀환할 수 없게 된 황선우를 귀환시키려는 김재국(설경구)의 노력은, 5년 전 실패로 인해 선우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동료였던 황규태(이성민)의 자살로 인한 부채감 때문이다. 게다가 황선우의 아버지가 김재국의 파트너였다는 사실은 영화의 도입부를 장식하는 세 우주인의 전사가 담긴 홍보영상에서는 숨겨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 사실이 사고로 두 우주인이 사망한 뒤의 뉴스와 뉴스의 자료화면에서 그대로 밝혀진다는 점인데, 이 순간은 서사적 반전이라기보단 이야기의 밑바탕을 구성하는 설정이다. <더 문>은 자연스럽게 가족주의와 유사부자관계를 엮어내 국뽕의 형상을 그려낸다. 게다가 나사(NASA)의 디렉터는 김재국의 전처인 윤문영(김희애)이며, 그는 보안규정을 어기고 재국에게 정보를 전달한다. 이 모든 것은 김용화 감독이 덱스터 스튜디오를 설립하며 의욕적으로 선보여온 VFX 기술에 관한 욕망, 기술을 통해 한국 바깥의 영화시장과 대적하겠다는 욕망의 발현일뿐이다. <국가대표>에서 출발한 욕망은 <미스터 고>의 실패와 <신과 함께> 2부작의 성공을 거쳐 <더 문>에 당도했다. 꾸준히 한국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은 국뽕의 외피를 두른 로켓으로 변해 인물을 달로 보낸다. 다시 말해, 김용화의 욕망에 한국은 그저 벗어나야 하는 곳으로만 전제되어 있을 뿐이다. 그의 작품이 스포츠 드라마이건, 저승을 다룬 판타지이건, 달로 향하는 SF이건, 그가 관심을 두는 것은 얼마나 ‘가성비 있게’ 할리우드를 모사할 수 있는가이다.      

 <밀수>는 흥미로운 경험을 제시한다. 1974년을 배경으로 장기하가 선곡한 당시의 가요들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영화는 ‘군천’이라는 가상의 행정구역을 제시한다. 조춘자(김혜수)와 엄진숙(염정아)을 비롯한 해녀들이 활동하는 이곳은 공장의 폐수로 인해 어획량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때문에 해녀들은 생계를 위해 밀수에 뛰어든다. 그러면서 벌어지는 배신과 우정을 다룬다는 게 <밀수>의 큰 줄거리다. 그런데 왜 이 영화는 군천이라는 가상의 항구도시를 제시한 것일까? 영화 초반부 등장하는 지도는 군천이 군산과 서천 사이 즈음에 위치해 있음을 명확히 제시한다. 그런데 왜 군산도, 서천도 아닌 군천이라는 가상의 지명을 내세웠을까? 류승완의 인터뷰(https://www.kukinews.com/newsView/kuk202307280187)에 따르면 영화의 출발은 조성민 외유내강 부사장이 군산의 박물관에서 본 “1970년대, 해녀들이 밀수에 가담했다.”라는 문구이지만, 동시에 완전한 장르적 공간을 위해 가상의 도시를 설정했다고 밝힌다. 그의 말은 현실의 지명을 가지고는 장르가 성립할 수 없다는 이야기인가? <다찌마와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의 만주나 제목부터 지명인 <베를린>은 실제 지역을 장르적으로 활용한 작품들이었다. <군함도>에서 어설프게 시도한 역사의 장르화가 그에게 모종의 트라우마를 안겨준 것이라 추측할 수도 있겠지만, 역시 지명을 내세운 그의 전작 <모가디슈>는 영화의 최종장에 이르러 장대한 카체이싱을 통해 모가디슈를 장르적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밀수>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다루는 판타지가 아닌 이상, 군천이라는 가상을 내세울 이유는 없다. 오히려 이러한 행태는 실재하는 지역을 영화적 가상으로 재현하길 포기했다는 말로 읽힌다. 그렇지 않은가? 류승완의 필모그래피에서 지명이 제목이었던 작품은 모두 해외를 배경 삼았다. <짝패>에서 한 차례 가상의 한국 도시를 만들어냈던 그는 같은 방식을 <밀수>에서 되풀이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지명, 서울이나 부산 등은 <밀수>가 장르적으로 작동하기 위해 언급될 뿐이다. 이 지명은 실제 공간과 상관없는, 이를테면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샤이어, 리븐델, 모르도르 같은 지명이나 다름없다.     

 

 이는 앞서 이야기한 <범죄도시>의 사례와 정확히 대비된다. 여러 비판 지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도시>는 어쨌거나 한국에 관한 이야기다. 반면 <비공식작전>과 <더 문>은 한국에서 벗어나는 방식을 택하지만, 이는 한국의 확장이라기보단 ‘상상된 한국’을 공고히 하기 위한 설정이다. <밀수>는 한국을 장르화하는 대신 가상화한다. 마틴 스콜세지의 범죄영화들이 미국의 지명을 가상의 것으로 바꾸어 진행한다고 생각해 보자. 이 영화는 그럼에도 미국에 관한 영화일 수 있는가? 물론 [GTA V]와 같은 게임이라던가 은유와 알레고리를 통해 풀어내는 SF와 판타지 영화들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이 작품들이 우회로를 택함으로써 훼손되는 지점들은 간과될 수 없다. 특정한 국가, 도시, 장소와 공간에 관한 이야기는 그곳에서 촬영되거나 그곳을 이미지화해야 한다. 한국 (텐트폴) 영화에서의 ‘한국 없음’은, 마치 케이팝의 다국적성 혹은 무국적성과 유사한 맥락에서, 한국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거나 한국이라는 장소에 관한 담론을 만들어내는 데 실패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2023년 한국 여름시장의 마지막 텐트폴 영화인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흥미로운 사례다. 대지진으로 인해 모든 게 무너진 서울을 배경 삼는 이 영화는 서울의 특정한 일부를 포착하는 작품은 아니다. 모든 게 무너져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 관객이 알아챌 수 있는 서울의 이미지는 극히 미세하다. 말라붙은 한강 위에 붕괴된 동호대교, 가까스로 외관을 유지하는 옛 서울역의 지붕 등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씨네21 기사(http://cine21.com/news/view/?mag_id=103306)에 따르면, 극 중 황궁아파트의 위치는 3호선 금호역 인근이며, 민성(박서준)이 대지진을 목격하는 도로는 약수역 인근의 도로다. 제작진은 장충체육관을 비롯한 해당 도로의 인근 건물을 스캐닝해 영화에 활용했다고 밝혔다. 영화에 잠시 등장하는 지도도 금호역 인근의 실제 지도를 가공한 것이다. 무엇보다, 영화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다큐멘터리 시리즈 <모던 코리아> 팀의 영상이 이 영화의 배경을 강력하게 지시한다. 서울의 아파트 붐을 아카이브 푸티지의 몽타주로 담아낸 오프닝은 흑백의 화면에서 컬러로, 과거 TV의 좁은 화면비에서 영화의 화면비로 확장되며 영화와 영화가 염두에 둔 현실로 확장된다. 아파트에 관한 욕망, 살아가는 집으로서가 아니라 사고파는 재산으로서의 집을 원하는 욕망. 그러한 지점에서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한편으로는 모순적이다. 아파트는 삶의 터전이라기보단 거쳐 가는 공간, 갭투자를 비롯한 투자와 투기의 공간으로 그려져 왔다. 아파트를 소유하는 욕망은 그곳을 자신의 생활과 취향에 맞추어 가꿔가는 공간이 아니라, 금애를 연기한 김선영 배우의 전작 <드림 팰리스>에서 묘사된 것처럼 소유의 권리를 얻기 위해 분투하는 공간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재난 이후에 펼쳐지는 생존에의 투쟁과 연관된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문법을 가져와 이를 은유한다.      


 이 이야기가 굳이 서울이 아니어도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일산이나 분당이어도, 과천이나 안산이어도, 이 이야기는 가능할 것이다. 한편으로 이 이야기는 대전이나 광주, 대구나 울산에서는 불가능하다. 물론 아파트 붐은 전국 모두에서 벌어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신축 단지와 구축 단지가 가까이 마주하는, 아파트의 역사가 오래되었으며 단지나 블록 단위로 재개발이 이루어지는 공간에서만 가능하다. 이제 막 재개발의 단계에 진입하는 1기 신도시나 현재의 아파트 붐을 따라 지어지는 신도시 혹은 기존 도시의 외곽지역에서 이러한 이야기 설정은 다소 어색하다. 무엇보다 한강 이남(설정상 압구정에 위치한 곳으로 보이는)의 백화점 식품관에서 식량을 구해오는 장면 같은 것, 서울에서 ‘땅값’의 중요한 기준인 말라붙은 한강의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서울이라는 장소는 요구된다. 때문에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우리가 아는 서울의 이미지를 활용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서울이라는 장소가 작중 배경임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라는 김영탁(이병헌)의 구호는 전세와 자가, 임대 아파트 등으로 구별되는 ‘아파트 생태계’의 약육강식을 요약한다. 이 모든 것은 그저 황량할 뿐인 서울이라는 장소에서만 기능하는 상상력이다. 이를테면 서울에서 <해운대>를 만들 수 없는 것처럼, 포스트-아파트-아포칼립스는 서울에서 가능한 상상력이다.

      

 이러한 전략하에서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증명하는 것은 <밀수>가 장르화를 위해 ‘군천’이라는 가상을 내세운 것, <비공식작전>과 <더 문>이 한국을 증명해내기 위해 한국 바깥으로 향한 것과 반대에 놓인다. 물론 변형된 군산시인 ‘군천’의 지위를 수도 서울과 같은 것으로 둘 수는 없다. 사실 군천이라는 지명 자체는 영화의 중심과 전혀 상관이 없다. 혹은, 그렇기에 지도까지 펼쳐 보이며 군산을 군천이라 부르는 모습이 어색하게 다가올 뿐이다. 이러한 한국영화의 한국없음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곤란함에 빠트린다. 이 영화들은 ‘한국’이라는 이름의 상상계를 관객에게 제시하지 못한다. <밀수>, <비공식작전>, <더 문>, 세 편의 영화가 제시하는 한국은 관객이 직접 걷고 만지며 활동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제시되지 못한다. 한국 없는 한국영화는 한국을 다른 방식으로 볼 기회를 스스로 걷어찬다. 더 나아가 스스로를 발언자의 위치에서 각하시키며 자신이 기능할 수 있는 방법을 거부한다. 각자의 한국을 그려온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을 떠올려보자. 그곳이 통일에 관한 일종의 국가-프로파간다(<쉬리> 등)이건, 아버지의 이름으로 쓰인 역사(<국제시장> 등)이건, 코스모폴리타니즘적인 인물들의 공간이건(<도둑들> 등), 이들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한국을 그려왔다. 일본영화가 일본을 담아내고, 홍콩영화가 홍콩을 담아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그려진 한국이 어떤 모습인지는 그 이후의 이야기다. 지금의 한국영화는 그 이후를 이야기할 방법을 잃어버린 것만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