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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Dec 24. 2023

2023년의 한국영화 10편

 드디어 마스크 없이 극장에 갈 수 있는 때가 되었다. 물론 코로나19(와 독감)는 여전히 기승을 부리곤 있지만, 마스크 없는 생활을 시작한지도 어느덧 반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올해의 한국영화는 위기론에 휩싸였다. 여러 기대작들이 줄줄이 실패했던 팬데믹의 3년을 지나, 지난 3월 윤제균과 최동훈 감독의 발언에서 시작된 위기론은 (<서울의 봄>의 천만관객 달성 소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올해 여름시장은 작년의 상황을 고스란히 옮겨온 것만 같았다. <밀수>, <비공식작전>, <더 문>, <콘크리트 유토피아> 등 200억 이상의 예산이 투입된, 손익분기점 400~500만명 가량의 영화들이 3주 동안 차례로 공개되었다. 승자는 <밀수>였지만 손익분기점을 살짝 넘긴 정도였고,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간신히 손익분기점을 맞출 수 있었으며, 나머지 두 편의 영화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했다. 추석 시즌의 영화들은 더욱 심각한데, 손익분기점을 넘은 영화가 없다. 한국영화 위기론에 관해 KBS와 인터뷰했던 지난 3월 이야기했던 '양적 거품'과 '출혈 경쟁'이 올해는 더욱 위험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런 지점에서 11월 말 개봉을 택한 <서울의 봄>과 그로부터 4주 뒤 개봉한 <노량: 죽음의 바다>의 선택은 꽤나 흥미롭게 다가온다. 다수의 텐트폴 영화가 정면대결하는 것은 결국 공멸뿐이라는 것을 드디어 깨달은 것일까? <노량>으로부터 다시 한 달 뒤인 1월 중순에야 <외계+인: 2부>가 개봉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매년 반복되어 온 전략의 수정을 시도하려는 것만 같다. 


 관객수 이야기는 이쯤하자. 얼마 전 업로드된 팟캐스트 [카페 크리틱]의 12월 에피소드에서 윤아랑, 손시내 평론가와 나는 한국영화가 점점 '잘 만든 콘텐츠'처럼 되어간다고 이야기했다. 이는 단지 여름과 겨울 혹은 명절 대목을 노리고 개봉하는 상업영화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영화제나 독립영화전용관을 통해 소개되는 독립영화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아가 이는 극영화에만 국한된 말은 아니다. 다큐멘터리 영화가 일종의 스타일적 혹은 방법론적 다양함을 보여주는 장이었다면, 지금 시점에선 모종의 평준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벌어지는 이 평준화에는 (물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여러 영화제에서 진행되는 인더스트리/인큐베이터 시스템이 한 몫 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예측해본다. 작년의 연말결산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제 한국영화의 경쟁상대는 할리우드가 아니라 <나는 솔로>다. 모든 것이 기획의 승리로 이야기되는 와중에, 영화들은 계속 길을 잃는다.


 그럼에도 영화들은 있었고, '콘텐츠'라는 이름에 넘어가지 않으려는 영화들은 있었다. 올해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극장에서, 영화제에서, 집에서, OTT에서 많은 영화들을 보았다. 개인적인 신변의 변화(대학원에 입학했다...)로 인해 작년만큼 꼼꼼하게 영화들을 챙겨보진 못했다. 그럼에도 올해 본 한국영화 중 좋았던 10편을 꼽아보았다. 순위는 없으며, 단편과 장편을 구분하지 않았고, 극장개봉 및 영화제나 기획전 등에서 첫선을 보인 신작들로 꼽았다. 가나다순으로 나열했다. 참고로 올해 이전에 관람하여 이전 리스트에 포함된, 가령 <다섯 번째 흉추>나 <괴인> 등은 제외하였다.


1. <낙원> 홍민키 2023

홍민키 감독처럼 일관된 주제와 형식을 이어가는 감독도 흔치 않을 것이다. 미술과 영화를 오가며 작업하는 그에게 '가상성'은 언제나 중요한 화두였다. 혹은 어려서부터 게임과 인터넷을 자연스레 접해온 세대에게 가상성은 화두라기보단 기본적 전제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낙원>은 을지로에 위치한 바다극장의 이야기다. 지금은 운영하지 않지만, 과거 게이들의 크루징 장소로 유명했던 공간이었다. 유사한 소재를 다룬 임철민의 <야광>이 크루징 장소들의 비가시성을 영화의 기법(데이 포 나이트)를 활용해 다루었다면, <낙원>은 가상을 통해 존재했으나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모순의 역사를 되살려낸다. 영화는 역사학자 토드 A. 헨리가 진행한 과거 바다극장에 다녔던 중노년 게이들의 인터뷰 음성을 극장에 버려졌음직한 사물들, 이를테면 영화티켓, 맥주캔, 담배갑과 같은 것들을 캐릭터 삼아 극장 곳곳을 탐방한다. 내래이터의 역할을 맡는 '이야기꾼'은 기록될 수 없었던 이야기가 기록되는 순간 발생하는 불균질한 지점을 땜질한다. 그럼으로써 <낙원>은 '서울'의 도시사(史)에서 부재했던 '도시 뒤의 공간'을 담아낸다. 감독의 전작 <들랑날랑 혼삿길>이 게이로서 가족, 결혼, 도시 사이에서 휩쓸려가듯 방랑했던 것의 기록이라면, <낙원>은 그 방향을 한국 게이의 역사로 슬며시 옮겨 본다.

2. <되살아나는 목소리> 박수남, 박마의 2023

난치병으로 시력을 잃어가는 박수남은 오랜 기간 재일 조선인의 역사를 카메라에 담아 왔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에서 살아남은 부모님 아래에서 태어난 그는 학창시절 조총련 활동가가 되었으며, 강제징용/징집된 조선인, 원폭 피해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의 목소리를 꾸준히 담아낸다. 그는 1958년 재일 조선인 이진우가 또해 여자 고등학생을 살해한 코마츠카와 사건을 취재하며 본격적으로 재일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펜으로 이야기를 적던 그는 그것에 다 담기지 않는 목소리를 담기 위해 녹음기를, 목소리에 다 담기지 않는 몸짓을 기록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게 된다. 영화 초반부 영화의 공동감독이자 딸인 박마의와 다투는 장면에서 박수남은 카메라 담긴 것을 볼 관객을 위해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곧 카메라이자 영화라고 말한다. 자신이 카메라-눈(키노-아이)라는 지가 베르토프의 선언이 다분히 '영화'적 실천에 관한 것이었다면, 자신이 곧 카메라라는 박수남의 호통은 목격자이자 기록자인 자신 자체가 영화임을 선언한다. 박수남에게 영화는 촬영된 실재를 상상계로 조작해내는 것이 아니라, 실재계 그 자체다. 자신의 기억력이 상당하다는 것에 감사하라는 영화 말미의 말은 <되살아나는 목소리>라는 영화가 박수남(과 그의 기억)을 저장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점차 시력을 잃어가는 그의 상황을 반영하듯 영화는 갈수록 심도를 옅게 잡는 촬영과, 종종 박수남을 포커스아웃하는 화면을 보여준다. 그럴수록 두 감독이 되살려내는 목소리와 이미지들, 박수남이 오키나와와 군함도, 히로시마와 도쿄, 대구와 서울 등지에서 촬영한 이미지들은 열화되어가는 필름의 물성을 이겨내고 관객들 앞에 선명하게 나타난다. 자신의 기억력이 대단하다는 박수남의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 이미지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증거할 뿐 아니라 '박수남=영화'라는 등식을 증거한다.

3. <드림팰리스> 가성문 2021

좋은 이웃이 된다는 것은 뭘까? 모두가 입을 모아 이웃 간 소통이 단절된 시기라고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웃에 관심이 많다. 층간소음이나 담배냄새 같은 일견 사소해 보이는 문제부터, 집값, 전세사기, 임대아파트 차별…. 이웃에 관한 지금의 관심은 구별짓기에서 비롯된다. 나의 집을 침범하는 소음과 냄새에 관한 것부터, 다른 계급, 직종, 국적, 인종, 종교의 이들이 나의 이웃이라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까지, ‘집’은 나와 이웃을 구별짓는 수단이 되었다. 단순한 자본의 욕망을 넘어, 집으로 대표되는 구별짓기의 욕망은 일종의 행동양식이다. <드림팰리스>는 그 속에 놓인 인물의 이야기다. <드림팰리스>가 그려내는 상황은 모든 개인을 피해자이며 가해자로 만들어낸다. 영화에서 여전히 비가시화된 대상, 혹은 본성 자체가 추상적이기에 그 실체는 건물이나 말단직원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대상들은 각자도생의 천박함을 알리바이로 내세우며 자신의 책임을 전가한다. <드림팰리스>는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질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불행을 혜정의 삶에 기입하며 이 구조를 보여주려 한다. "좋은 이웃 되기"라는 불가능한 미션을 이 세계의 입주자에게 부여하는 구조 말이다. 김선영 배우의 출연과 '드림팰리스'라는 명명 때문에 종종 비교되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떠올려 볼 때, <드림팰리스>는 굳이 포스트-재난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같은 문제를 더욱 직설적이고 강력한 방식으로 발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이 영화가 그려내는 상황 자체가 이미 포스트-재난의 것이기도 하니까.

4. <물안에서> 홍상수 2023

<물안에서>의 모든 장면은 아웃포커싱 되어있다. 실내외를 막론하고,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모든 장면의 포커스는 맞지 않는다. 카메라 렌즈에 바셀린을 바르거나 스타킹을 씌우는 등 몇몇 감독들이 실험적으로 도입한 촬영수단들과 이 영화의 아웃포커싱은 질적으로 다르다. 전자는 어쨌든 대상을, 그것이 배우이건 건물이건 풍경이건 그 표면을 선명하게 포착한다는 목적을 잃지 않았다. <물안에서>는? 이 영화의 전부를 보았지만 배우들의 얼굴, 특히 홍상수 영화에 처음 등장한 김승윤 배우의 얼굴은 잘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배우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할 수 있을 만큼의 포커싱조차도 제공하지 않는다. 선명한 서체의 타이틀 크레딧과 다르게, 이 영화는 엔딩 크레딧마저 흐릿하게 처리해두었다. <물안에서>의 흐릿한 이미지들은 홍상수가 오랫동안 흠모해 온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닮았다. 세잔의 대한 홍상수의 애정을 알고 있다면, <물안에서>를 보며 인상주의 회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인상주의는 대상이 우리 눈에 들어와 닿는 그대로를 포착하고자, “자연과 인간이 근원적으로 만나는 현상 그 자체를 포착”(메를로-퐁티)하고자 하였다. 물론 홍상수가 인상주의 회화의 방법론을 그대로 차용했을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일견 귀신의 시선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이 영화의 흐릿한 이미지들을 보고 있자면, 홍상수가 제주도에서 본 것은 과연 무엇이냐는 의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물안에서>의 이미지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남희가 새벽에 들었다는 “정신 차려!”라는 누군가의 외침은 영화 바깥의 객석에서 날아온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물안에서>의 이미지는 이례적인 선명하지 못함 때문에 발생한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죽음, 정확히는 죽음충동이 아른거리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물안에서>의 마지막 장면은 아웃포커싱의 흐릿함으로 인해 죽음으로 향하는 듯한, 소멸하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바닷속으로, 물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는 성모의 모습은 <물안에서>의 마지막 장면이자 ‘성모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카메라의 ‘자동적인 눈’이 홍상수의 시선을 인상주의 회화의 그것처럼 대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여기에 답할 수 있는 것은 홍상수뿐일 것이다. 다만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맞나?”라는 관객들의 질문엔,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이 맞다”는 홍상수식 선문답을 남길 수밖에 없다.

5. <뿌리이야기> 김광인 2023

이른 아침, 건설노동자들이 잠에서 깨어나 일터로 나간다. 칸막이 진 구석에서 옷을 갈아입고, 보도블럭을 새로 깔고, 건물이 올라갈 터를 닦는다. 5분가량 이어지는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의 감독이자 한 명의 건설노동자인 김광인의 노동현장들을 담아낸다. 와이드스크린에 광각으로 담긴 노동의 현장은 그곳의 추위와 더위를, 흙과 벽돌의 냄새를 스크린 바깥으로 뿜어낸다. 영화의 주인공 승태는 호주로 이주할 예정이다. 살던 집을 정리하고 어머니 집에 머무르며 목공 일을 배우는 그는 새로운 곳에서의 삶을 착실히 준비한다. 낮선 곳으로 이주하려는 그는 함께 노동했던 동료들을 찾아가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다. <뿌리이야기>의 이야기는 그것이 전부이다. 오랜만에 재회한 이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먼저 떠나간 동료를 추모하며 그가 작업한 보도블럭 위에서 셀카를 찍으며, 한국에 머무를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함께 시간을 보낼 이들을 찾아 나선다.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는 <뿌리이야기>의 순간들은 평범한 시간들의 반복 그 자체를 동력으로 삼는다. 낯선 곳으로 이주한다는 것의 불안감이나 헤어질 사람들과의 아쉬움 같은, 소재만으로 떠올릴 법한 정념들은 이 영화의 중심을 차지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스쳐지나간 대사처럼 "서로 몸 비비고" 노동해온 동료들의 기억을, 무수한 사람들이 밟고 지나갈 견고한 보도블럭처럼 자신의 토양이 되는 시공간에 시공한다. 승태에게 침을 놔주던 중국동포 동료 아저씨는 의술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아픈 나무를 땅에 심어 정기를 빨아들이게끔 하는 것". 새로운 땅으로 향할 청년 노동자는 자신의 땅을 떠나기 전 그 정기를 빨아들이는 만남의 반복을 수행한다. 영화의 마지막 즈음 다시 등장하는, 시공이 완료된 오프닝 시퀀스의 노동현장들과 그 위로 유령처럼 디졸브된 노동자의 모습은, 우리가 밟고 서 있는 공간에 무엇이 함께 새겨져 있는지를 되새기게끔 한다.

6. <우리의 하루> 홍상수 2023

올해의 홍상수는 작년의 두 영화 <소설가의 영화>나 <탑>과는 또 다른 영화들로 우리를 찾아왔다. 작년의 영화들이 꽉 짜인 형식들로 관객을 서늘하게 조여왔다면, <물안에서>의 흐릿한 이미지는 마치 "영화에서 무엇까지 비워낼 수 있는가?"를 실험하려는 것만 같았다. <우리의 하루>는 <물안에서>만큼 극단적인 실험을 행하진 않는다. 단지 이전의 홍상수 영화에서 내레이션으로 처리되었을 법한 말들이 자막으로 등장하여 영화의 장면을 구분해준다는 점에서 과거의 홍상수와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 것처럼 다가올 뿐이다. '둘로 나뉜 영화'라는 그의 오래된 형식 또한 여전히 유효하게 등장한다. 한편으로 <우리의 하루>는 홍상수의 영화를 가득 채워왔던 선문답으로 가득한 것만 같다. 젊은이가 "잘 산다는 게 무엇입니까?"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건강이 좋지 않은 늙은 시인이 이에 답한다. 고양이는 갑작스레 집을 나서고, 우연히 집을 찾은 지인에게 발견되어 되돌아온다. <우리의 하루>는 특별할 것 없는 어떤 하루(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단지 반복되는 어떤 하루에 관한 것이라기보단, 어떠한 방식으로는 앞을 향해 열려있는 하루에 관한 것이다. 기주봉이 연기한 시인이 끊었던 술과 담배를 기름진 치킨과 함께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예측 가능하지만) 열려 있는 다음 하루로 향하는 개방된 제스처로 다가온다.

7. <잠> 유재선 2023

<잠>은 현수의 몽유병으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의 나열, 혹은 그것들이 제시하는 소름끼치는 사건들의 일회적 효과들의 모음집이 아니다. 많은 호러영화가 단순히 순간적인 놀람, 점프스케어를 통해 무서움을 ‘착각’하게 만드는 것과 달리, <잠>은 그것들을 효과적으로 배열한다. 이를테면 무당을 거절하던 수진이 그것을 수용하게 되는 계기, 동시에 (현수는 보지 못했지만 관객은 본) 침대 밑의 부적을 현수가 발견하는 장면 같은 것을 떠올려보자. 현수의 몽유병이라는 사태는 해결되지 않고, 부적의 발견은 사태를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는 순간이 된다. 이는 몽유병으로 인해 발생한 수진과 현수 부부의 불안감, 그 속에서 자신의 신념과 다른 것을 택하며 스크린 바깥까지 그 불안을 전염시키는 방식은 다소 일회적으로 느껴지는 기능적 장면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어낸다. 앞서 한국영화의 '콘텐츠화'를 이야기했지만, <잠>은 올해 개봉한 무수한 상업영화 중에서도 유독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다. '기획상품'이자 '콘텐츠'로서의 영화가 지닌 지루함을 다소간 떨쳐내고, 영화의 최종장에 이르러 장르적 전회를 통해 폭주하는 방식은 안전한 기획 바깥으로 나아간다. 물론 <잠>이 한국 호러/스릴러 영화의 손꼽힐 수작이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올해의 한국영화들을 떠올렸을 때, 충분히 기억할만한 순간들을 담아낸다.

8. <퀸의 뜨개질> 조한나 2023

감독이자 주인공인 조한나는 할머니가 신부 수업을 해주겠다며 10살 때 알려준 뜨개질을 취미로 삼고 있다. 여성성이라는 사회적 규정에 대해 의문을 품으면서도, 그는 '여성적 행위'로 다뤄지는 뜨개질을 놓지 못한다. 그는 '만다라 매드니스'라 불리는 거대한 뜨개질의 수행을 택한다. 흥미롭게도 감독은 그 행위를 드랙(drag)의 수행성과 함께 놓는다. 거대한 만다라 문양 카페트를 뜨개질로 만들어내는 것이 과장된 여성성이라는 한 축에 놓인다면, 뜨개질로 만들어진 수염과 음경을 착용하고 춤을 추며 드랙을 수행하는 감독의 모습은 과장된 남성성을 드러내는 드랙킹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에 할머니라는 사적 존재와 얽힌 개인적 기억이 뒤얽힌다. <퀸의 뜨개질>은 세 이야기를 축으로 "여성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강력한 활력을 부여한다. 물론 여기에 대한 대답은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혹은 등장할 수 없는 것으로서 이 질문은 점차 영화의 후면으로 자리를 옮긴다. 다만 여성성과 남성성, 그리고 사적인 기억을 뜨개질바늘 삼아 영화를 꾸려가는 힘을 영화 내내 보여준다. 영화는 그것만으로 이 답없는 질문을 관객들의 머리속에서 활성화시킨다. 

9. <포수> 양지훈 2023

*12월 진행된 양지훈의 개인전 [다르게 총 쏘기]의 리뷰로 대신한다. 본 전시에서도 <포수>가 전시되었다.

함연선의 전시서문이 언급하는 것처럼 ‘shot’ 혹은 ‘shoot’이라는 영단어는 영화를 ’찍는‘ 것이고, 총을 ‘쏘는’ 것이며, 나아가 구기종목애서 ‘골을 넣기‘ 위한 행위이기도 하다. <포수> <테이큰> <도라지> 세 작품에서 양지훈의 카메라는 대상을 다르게 ’shoot’한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구성된 대상에의 익숙한 방식의 재현과 다르고, 스펙터클을 찍고자 하는 카메라먄의 욕망이 향하는 방향과도 다르다. 흥미롭게도 양지훈은 자신 주변에 놓은 대상들(4.3사건 생존자인 할아버지, 대학에서 만난 재일조선인 형, 집 뒷산에 난 산불)을 찍는다. 그 과정에서 자신 또한 카메라에 노출된다. <포수>에서는 할아버지와 함께, <테이크>에서는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도라지>에서는 브이로그의 형식을 빌려 얼굴 없는 신체로. 그의 카메라는 자신 주변의 대상들을 역사 속의 객체로 밀어넣는 대신, 촬영자인 자신까지 같은 객체로 위치시킨다. 그럼으로써 양지훈의 이미지들은 작가와 대상 사이의 사적인 관계와 대상과 역사 사이의 통사적 관계 사이에서 중층결정된다. 그의 'shot'은 카메라의 전면을 향하는 광학적 발사행위이자, 카메라의 뒷편에 놓인 작가 자신을 향한 예리한 백패스이기도 하다. 재일조선인 다큐멘터리스트 박수남은 최근작인 <되살아나는 목소리>에서 카메라 뒤에 있는 것은 관객이 아니라 자신이며, 카메라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역사의 당사자이자 기록자, 증언자로서의 박수남과 달리, 우연한 목격자인 양지훈은 그와 같은 방법론으로 대상과 이미지를 통합하려 하지 않는다. 이미 벌어졌거나 권한이 없기에 개입할 수 없는 사건들 앞에서, 작가는 비-당사자로서 갖는 사후적인 시선을 대상과의 관계에 부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는 그와 같은 분열의 상태로, 역사적 대상이 재현되던 방식에서 찢어져 나온 상태로 그것을 대한다. [다르게 총 쏘기]가 겨냥하는 것은 우연하게 자신 주변에 놓인 것과 작가 자신 모두이며, 카메라 앞의 대상과 사건(혹은 역사) 사이에서 벌어진 찢어짐의 상태다.

10. <희망의 요소> 이원영 2021

<희망의 요소>는 몇 가지 반복되는 숏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부부가 사는 집의 현관을 찍은 숏이 그렇다. 남편이 가지런히 정리해둔 신발, 출근을 위해 구두들을 꺼내는 아내와 남편의 허름한 운동화와 슬리퍼, 술에 취한 아내의 발걸음과 대충 벗어둔 신발, 낯선 신발을 남편보다 먼저 발견하는 관객의 눈과 낡은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서는 남편의 모습. 현관을 잡은 숏 외에도 이 영화는 유독 두 사람의 발과 손을 많이 담아낸다. 일반적인 대화장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희망의 요소>는 두 사람의 얼굴보다 발과 손을 담아내는 것에 더 많은 숏을 할애한다. 손과 발에는 표정이 없다. 다만 그것들이 움직이는 방향, 방식, 속도가 있다. 똑같이 된장찌개를 끓이는 장면일지라도, 요리를 하는 손은 언제나 동일하지 않다. 영화 초반 빨래를 널고 개던 남편의 손짓에서 느껴지는 무력감과 불륜을 목격한 이후 이불 빨래를 하는 남편의 발길질에 가까운 행위는 모두 “빨래”를 하는 것이지만 다르다. 영화가 시작할 때는 하나의 발, 아내의 두 발 중 하나의 발만이 등장한다. 마사지를 해주겠다는 남편의 손을 격렬하게 거절하는 아내의 발, 영화 내내 요리와 청소를 하며 아내에게 ‘기여’하는 남편의 손, 그리고 아내를 떠나는 남편의 발. 손과 발은 두 사람의 표정과 내면을 대리하여 움직인다. 아내의 불륜현장을 목격한 남편은 강원도 고성으로 떠난다. “1년 후”라는 자막과 함께 영화는 다소 긴 에필로그를 보여준다. 두 사람은 다시 결합했다. 아내와 남편은 손을 잡고, 두 사람의 발은 해변의 모래 위에 나란히 서 있다. 좁은 화면비에는 두 사람의 발이 모두 담길 수 없었다는 것처럼, 에필로그의 넓어진 화면비는 두 사람의 손, 발, 몸을 나란히 담아낸다. 좁은 화면 속에서 불화하던 두 사람의 발이 같은 방향성을 보이는 순간, 기울어져 있던 애정은 본래의 기울기를 되찾는다. 이는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아가는 과정의 기록이 아니다. 오히려 희망이 도래하는 그 순간까지 기다리고자 한 이들을 찍고자 했으며, 기다리는 마음을 이 영화는 담아내려 한다. 이 영화의 무수한 발과 손이 그것이다.



+그 밖에 흥미로웠던 작품들

<시민 여러분, 반갑습니다> 민아영 2023

<안 할 이유 없는 임신> 노경무 2023

<애국소녀> 남아름 2023

<에스레베르> 권희수 2023

<조용한 선박들> 정여름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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