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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Dec 22. 2022

2022년의 해외영화 10편

 지난했던 20세기가 마침내 끝나간다는 기분이 든다. 이건 영화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그 밖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불멸할 것만 같던 엘리자베스 2세가 사망한 것이 가장 상징적인 사건일 것이다. 영화로 돌아와서, 2022년은 장 뤽 고다르가 죽은 해로 기억될 것이다.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장 마리 스트로브가 죽었다. 요시다 기주도 죽었고, 피터 보그다노비치와 시드니 포이티어와 장 루이 트랜티냥 또한 죽었다. (개인적으로는 배우 로비 콜트레인의 죽음을 꼭 적어두고 싶다. 고마웠어요 해그리드) 20세기 영화를 대표하던 얼굴들이 세상을 떠났다. 물론 누군가는 계속 세상을 떠나고 있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나이든 이들이 세상을 떠나는 일은 얼핏 큰 변화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들의 말년은 매해 쏟아지는 영화와 관계 없는 것이었다. 노년의 배우들은 영화에 출연하지 못했고, 노년의 감독들은 투자 받지 못했다. 고다르와 동갑인 이스트우드는 새로운 영화를 위한 투자를 받는 데 실패했고, 역시 동갑인 프레데릭 와이즈먼은 마스크를 쓴 얼굴을 찍고 싶지 않아 픽션에 가까운 영화로 향했다. 다만 올해는 무수한 죽음들, 20세기의 거목들이 쓰러져간 해로 기억될 것만 같다.


 물론 이것이 '영화의 종언' 같은 것은 당연히 아니다. 영화는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다만 영화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하는 이들이 사라져갈 뿐이다. '엔데믹'이라는 말이 전세계에 나도는 동안 MCU는 계속해서 영화를 내놓고 있고, 제임스 카메론 또한 복귀하였다. OTT 플랫폼은 더욱 강력하게 전세계 영화 유통망을 뒤흔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톰 크루즈의 <탑 건: 매버릭>은 그가 추구하는 아날로그의 강력함을 다시금 전파하려 시도했다. 다큐멘터리스트들은 세계 곳곳의 전쟁과 운동을 담아내고, 넷플릭스는 여전히 너절한 영화들을 내놓으며, 새로운 OTT 플레이어들이 내놓은 영화들은 '엔데믹' 속에서도 극장보단 방구석으로 사람들을 유도한다. 여전한 복잡함 속에서 올해도 여기 저기서 이런 저런 영화들을 봤다. 올해 관람한 해외영화 중 10편을 꼽아보았다. 단편과 장편을 구분하지 않았고, 극장개봉 및 영화제나 기획전 등에서 첫선을 보인 신작들로 꼽았다. 가나다순으로 나열했다. 참고로 올해 이전에 관람하여 이전 리스트에 포함된, 가령 <우연과 상상>, <카우>, <프랑스>, <메모리아> 등의 작품들은 포함하지 않았다.

1. <내가 꿈꾸는 나라> 파트리시오 구즈만 2022

 영화는 "구즈만의 첫 영화 <첫 해>의 푸티지로 시작한다. 살바도르 아옌데를 보며 환호하는 칠레 민중의 모습이 담겨 있다. 구즈만은 크리스 마르케가 그 영화를 마음에 들어 했으며, 프랑스에 배급하는 것에 도움을 주었음을 언급하며 영화를 시작한다. 오랜만에 칠레를 찾은 그가 마주한 것은 거리의 돌들이다. 최루탄과 고무탄, 살수차 등으로 무장한 경찰에 맞서기 위해 시위대가 부순 길바닥의 잔해들이다. 구즈만의 전작 <꿈의 안데스>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돌들이다. 그는 세 편의 전작(<빛을 향한 노스탤지어>, <자개 단추>, <꿈의 안데스>)를 통해 피노체트 군부정권 하에서 진행된 투쟁을 되짚어 보았다. <내가 꿈꾸는 나라>는 2019년 10월 18일 시작되어 현재도 진행중인 새로운 혁명에 관한 이야기다. 구즈만은 자신이 목격한 칠레의 두 번째 혁명에서 일종의 데자뷔를 느낀다. 길바닥에 돌들, 무장한 경찰들, 길거리에 배치된 군인들, 그리고 무수한 군중들. 이 데자뷔에서 구즈만은 1970년대외 2020년대 사이의 차이를 하나씩 찾아간다. 우선 이 영화의 모든 인터뷰이는 여성이다. 언어학자, 영화인, 대학생, 사진작가, 체스 기사, 음악가 등 다양한 직업군의 여성들은 이번 혁명의 의의를 각자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보수적인 칠레의 문화를 철폐하고자, 신자유주의와 가부장제와 여성, 사회적 소수자, 노동자, 농민, 원주민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정치를 철폐하고자 이들은 거리로 나섰다. 백만이 넘는 인파가 몰린 광경이나 수많은 여성이 성폭력과 성차별에 반대하며 군무를 추는 광경은 엄청난 폭발력을 보여준다. 다만 이 폭발력은 피노체트 정권을 타파하고자 거리로 나섰던 이들이 동일한 목표로 모였던 것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구즈만이 이 영화에서 여성만을 인터뷰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물론 이들의 목표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하지 않는다. 이번 혁명에 참여한 이들의 이데올로기는 "차별과 배제의 철폐"와 같은 모호한 것에 가깝다. 마침내 자신이 꿈꾸던 나라에 가까워진 칠레의 모습을 목격하는 구즈만의 내레이션과 시선은 그가 느꼈을 감격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물론 한 인터뷰이의 말처럼, 그것은 실패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새로운 헌법 제정에 실패할 수도, 선거에서 극우파가 득세할 수도 있다. 하나로 조직되지 않은, 지도부도 이데올로기도 통일된 의제도 없는 투쟁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영화를 보는 내내 절반의 성공을 거둔 2016년 이후의 한국을 떠올리게 된다. 구즈먼은 이번 영화의 제목을 "My Imaginary Country"라 지었다. 그가 꿈꾸는 나라는 완수된 과거의 것도, 완수될 것이라 예측하기도 어려운 지향점이다. 70년대의 '칠레 전투'를 지켜보았던 구즈먼은 여전히 새로운 칠레를 꿈꾸고 카메라에 희망을 담아내려 한다. 언제든 절망으로 바뀔 수 있는 희망일지라도, 구즈먼의 카메라는 희망의 모호한 실체를 찍는다. 영화의 엔드크레딧에는 <칠레 전투>에 나왔던 칠레 민중의 모습이 등장한다. 동일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당시의 이미지는 영화 내내 그와 같은 움직임을 보여주던 2020년대 칠레 민중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단지 이미지에 담긴 이들의 모습이 변화하였을 뿐이다. 구즈만이 꿈꾸는 나라는 도래할 수 있을까? 다가올 미래를 확신하여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구즈만이 40년 간 품어온 절망이 희망으로 변화하는 순간을, 이 영화를 통해 엿볼 수 있다.

2.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미야케 쇼 2022

 선천적으로 귀가 들리지 않는 여성 복서의 실화를 각색한 작품이다. 주인공 케이코는 청인인 동생과 함께 살며, 낮에는 호텔에서 일하고 밤에는 복싱 훈련에 매진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귀가 들리지 않기 때문에 훈련은 물론 경기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지만, 케이코와 복싱장의 트레이너는 훈련과 경기 모두를 훌륭하게 해낸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복싱장이 운영의 어려움을 겪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체육관 회장의 건강도 악화된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케이코는 계속 복싱을 할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2020년 12월부터 2021년까지의 시간대를 담고 있는 이 영화는 얼핏 익숙한 휴먼 감동 드라마처럼 다가온다. 이를테면 "장애를 극복하고 성공한 운동선수의 이야기"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미야케 쇼가 집중하는 것은 신파적 감동코드라기보단, 케이코와 체육관의 사람들이 보내는 시간 자체를 담아내는 것이다. 케이코가 트레이너와 미트 훈련을 하는 영화 초반부의 장면은 이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듣지 못하는 케이코의 속도에 함께하는 이들의 시간, 경쾌한 리듬으로 울리는 미트 소리 등은 이 영화가 지향하는 바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영화 속 첫 경기가 끝난 후 회장은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케이코의 장점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재능은 없습니다. 리치도 짧고, 느리고. 하지만 솔직하고 정직합니다." 이 말은 케이코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회장이 자신과 체육관 트레이너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들의 장점, 혹은 재능은 솔직함과 정직함이다. 케이코와 함께 훈련하고 경기에 나가는 그들의 활동에서 다른 것은 없다. 어쩌면 케이코와 소통하는 그들의 모습은 극단적인 효율을 추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선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복싱만화 같은 것에서 보았던 그러한 인물상 말이다. 데뷔작 <플레이 백>부터 최근작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까지 미야케 쇼가 그려온 인물들은 꾸준히 그래왔던 것 같다. 자신이 다른 사람과 보내는 시간에 솔직하고 정직한 인물들. 때문에 미야케 쇼의 영화들은, 이번 영화에 대한 하마구치 류스케의 코멘트 "흘러가는 시간을 부드럽게 필름에 정착시킨 걸작"에 걸맞는 것을 보여준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그것을 가장 훌륭히 해냈다.

3. <레오노르는 죽지 않는다> 마르티카 라미레스 에스코바르 2022

 필리핀에서 찾아온 이 영화는 더 주목받아야 한다. 한물 간 액션영화 감독 레오노르는 아들에게 노망난 할머니처럼 대해진다. 어느 날 미완성 시나리오를 보던 그는 TV에 머리를 맞는 사고를 겪고 자신의 시나리오 속으로 들어간다. 자신이 쓰던 시나리오 속이기에, 그 세계 속에서 그의 존재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다름 아니다. 어린 시절 촬영장에서의 총기사고로 죽은 아들은 가족 앞에 유령으로 나타나 레오노르를 이해해줄 것을 요청하고, 사고 이후 혼수상태에 빠진 레오노르를 간호하던 아들 루디는 점차 어머니의 세계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 순간 이 영화는 또 하나의 묘기를 선사한다. 당신의 세계가 픽션으로 존재할 때만 오롯이 존재할 수 있다면, 자신이 오로지 그 세계 속에서만 살아있을 수 있다면, 타인은 그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며 그 픽션은 어떤 엔딩을 맞이해야 하는가? <레오노르는 죽지 않는다>는 거기에 답을 제시하는 영화는 아니다. 대신 살아있는 픽션의 세계가 지닌 타임라인의 아름다움을 펼쳐 보여주며, 무엇이 최선이고 무엇을 함께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고 손을 내민다. 이야기 속에서만 살아있을 수 있는 시네필 감독의 영화 만들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 자체로 살아있는 누군가의 이야기이기에 이 영화는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4. <리코리쉬 피자> 폴 토마스 앤더슨 2021

 <리코리쉬 피자>의 표면적인 설정은 1970년대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로맨틱 코미디의 형식 안에 담아내려는 것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영화는 그 길을 가지 않는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도리어 1970년대하면 떠오르는 요소들을 영화에서 배격한다. 부분적으로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삼지만 젊은 시절의 그가 탐닉하던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이미지 대신 싸구려 TV쇼와 프로파간다 전쟁영화를 추억하는 늙은 배우가 등장할 뿐이다. 대마초와 LSD 등의 약물, 베트남전, 각종 인권운동 등 70년대하면 바로 떠오르는 히피 문화의 구심점이 되는 요소들 또한 언급은 되지만 개리와 알라나의 이야기로 스며들지 못한다.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사건 중 그들의 이야기에 크게 연관되는 것은 석유파동 정도다. 개리의 물침대 사업이 그로 인해 망하기 때문인데, 사실 이 또한 개리의 무지함과 무능함을 드러내는 장치 정도로만 등장할 뿐 그의 물침대 사업이 망하는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리코리쉬 피자>가 주목하는 것은 1970년대 미국의 노스탤지어를 구성하는 익숙한 요소들, 즉 당대에는 주류가 아니었을지라도 현재 시점에서 주류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들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것에 속하지 못했던 비주류 인생을 담아내려는 것도 아니다. 주류 문화와 마이너리티 양자 어느 쪽에도 위치하지 못한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에 가깝다.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대화장면의 숏-리버스 숏 구도 중 청자의 신체 일부(주로 뒤통수와 어깨 부근)가 카메라에 잡힌 상태로 등장하는 숏은 카메라가 보여주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의 시선을 드러낸다. 이 숏들은 카메라보단 프레임에 포커스아웃된 채로 잡혀 있는 신체를 시선의 주체로 상정한다. 육화된 시선이라고 할 수 있을 이러한 숏들에서 시선의 주인은 대부분 알라나와 개리다. 두 사람은 주류와 마이너 양자의 시선을 갖추지 않은 사람이다. 다시 말해 (한국전쟁부터 베트남전, 이후 중동에서 미국이 벌인 전쟁까지를 포괄하는) 전쟁, 석유,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남성적 주류 문화와, 마약, (남성중심적) 성해방과 자유 등으로 표상되는 역시나 남성화된 마이너 문화 양쪽 모두에 속하지 않는다. 주류적 남성성과 마이너적 남성성으로 양분된 남성적인 세계, 고쳐 말하자면 폴 토마스 앤더슨이 <부기 나이트>의 포르노 업계, <데어 윌 비 블러드>의 개척시대 석유 업계, <마스터>의 사이비 종교 등을 통해 탐구해온, 남성성을 통해 기술된 미국이라는 세계가 알라나를 둘러싸고 있다. 알라나의 삶과 얽혀버린 개리는, 그러한 세계 속에서 아직 자신의 위치를 찾지 못한 사람이다. 어쨌든 <리코리쉬 피자>는 로맨틱 코미디다. 이상하게도 알라나와 개리는 두 사람의 파트너쉽이 연애라는 것과 무관한 것처럼 행동한다. 서로를 향한 마음이 두 사람 모두 일치하는 순간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알라나의 마음이 기울었을 땐 개리는 사업에 빠져 있고, 개리의 마음이 기울었을 땐 알라나는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달려간다. 개리가 경찰의 오인으로 긴급체포 되었을 때, 잭 홀든의 오토바이에 타고 있던 알라나가 오토바이에서 떨어졌을 때,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달려나간다. 영화의 마지막은 이들이 다시 한번 서로를 향해 달려가는 장면, 그리고 그들이 함께 달려나가는 모습이다. 이들은 어디로 달려가는 것일까? 확실한 것은 그곳이 수영복 차림의 여성들로 가득한 할리우드 스타의 파티장도, 전쟁과도 같은 사업가들의 영역도, 오컬티즘에 가까운 정치적 집회가 벌어지는 길거리도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그들 앞에 그들이 보낸 1973년의 세계와는 다른 무엇이 있을거란 바램만이 남을 뿐이다.

5. <바비 야르 협곡> 세르게이 로즈니차 2021

 꾸준히 아카이브 속 기록영상을 재구성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세르히 로즈니차의 신작. 이번 영화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유대인 33,771명이 살해당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1941년 9월에 벌어진 이 사건은 나치 특수작전부대 C대 소속 존더코만도 4a 부대의 소행이지만, 동시에 당시 키이우 지역 경찰과 지역민의 협조 하에 벌어진 일이기도 하다. 영화의 중간 지점 즈음에 그 사건이 놓이고, 사건 앞뒤의 사건이 연이어 등장한다. 이를테면 히틀러의 나치가 우크라이나 지역을 점령하고 지역민들이 그에 동조하는 모습, 1943년 소련군이 키이우를 탈환하는 모습, 전쟁 이후의 재판 과정과 같은 모습들 말이다. 역시 전주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전작 <위대한 작별>이 스탈린의 죽음을 맞이한 소련 인민의 모습 하나하나를 살펴보며 '정치'라는 거대서사의 가장 작은 구성체인 '인민' 혹은 '시민'이라는 미시적인 주체를 탐구했던 것처럼, <바비 야르 협곡> 또한 비슷한 작업을 수행한다. 정치, 전쟁, 제노사이드와 같은 말 속에서 인민 하나하나는 무력한 존재처럼 다가오지만, 결국 인민 하나하나의 선택과 행동이 "저항 없는 학살"과 "전범 재판"을 모두 가능케 한다. 물론 독일 시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나치당은 끔찍한 전범이 되었고, 스탈린을 지지한 소련/우크라이나 인민의 선택은 체제 붕괴와 독재를 불러왔다. 라고 단순하게 말하려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은 아니다. 도리어 정치나 전쟁 같은 거대한 단어들이 사람들의 머리 위를 둥둥 떠다니며 손에 잡히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개념이 아니라, 인민, 시민, 국민이라 불리는 미시적인 정치주체들이 항상 눈으로 목격하고 있고 피부로 감지하고 있는 것임을 다시금 짚어주는 것에 가깝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전쟁이 지속되고 있는 지금 찾아온 이 영화는 그러한 감각을 되살려준다.

6. <부부> 프레데릭 와이즈먼 2022

 이 영화는 프레데릭 와이즈먼의 두 장편 픽션 영화로 알려져 있다. (첫 번째는 2002년의 <La dernière lettere>) 때문에 영화가 베를린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었을 때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와이즈먼의 픽션 영화라니, 그것도 소피아 톨스토이의 편지를 소재로 했다니. 와이즈먼의 영화 대부분은 하나의 집단, 조직, 공동체를 다룬다. 발레단, 시청, 미술관, 마을, 도서관, 동물원과 같은 곳이 그의 카메라에 담긴 공간들이었으며, 와이즈먼은 그 공간들이 각자의 치열한 경합을 통해 하나의 집단으로써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부부>는 그것을 한 쌍의 커플이라는, 극단적으로 작은 집단, 조직, 공동체로 축소한다. 영화는 소피아 톨스토이의 역을 맡은 배우가 톨스토이 부부가 주고 받은 편지의 인용문을 읽는 것과 다양한 자연을 병치시키며 진행된다. 이러한 구성은 와이즈먼의 이전 영화들과 다르지 않다. 인서트로 건축물이나 자연을 보여주며 집단 내 사람들의 대화를 담아내는 것은 그의 영화가 언제나 고수하던 방식이다. 하지만 <부부>에는 대화의 상대가 없다. 이 영화엔 소피아 톨스토이는 등장하지만 레프 톨스토이는 등장하지 않는다. 종종 카메라를 직접 바라보며 인용문 낭독 연기를 선보이는 가상의 소피아는 자신의 편지를 읽는(듣는) 대상을 관객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만 같다. 혹은 그의 편지가 남편에게 온전히 닿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흥미로운 지점은 영화의 제목이다. 영화의 원제는 "Un Couple(영어로는 A Couple)", 그러니까 보통명사 '커플'이다(그래서 <부부>보다는 <커플>이 조금 더 맞는 제목인 것 같다). 다시 말해, 영화의 제목은 '톨스토이 부부'를 호명하고 있지 않다. <내셔널 갤러리>,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인디애나 몬로비아> 같은 제목과 <동물원>, <시티홀>, <주 의회> 같은 제목들을 떠올려보자면, 와이즈먼은 제목이 고유명사인 경우와 보통명사인 경우를 분명히 구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부부>의 대상은 톨스토이 부부이지만, 영화가 결론적으로 지칭하는 것은 보통명사로서의 부부 혹은 커플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영화의 형태를 다시 돌아보자. <부부>는 소피아 톨스토이(를 연기하는 배우)가 남편에게 쓴 편지를 읽는 모습을 담아내지만, 소피아의 말을 듣는 대상은 영화 속에 부재하고 심지어 스크린 바깥을 지목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와이즈먼이 톨스토이 부부의 이야기를 모든 커플에게 작동하는 일반원리로 사용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부부' 혹은 '커플'이라는 극소공동체는 어떻게 작동하느냐에 대한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는 있겠다. <동물원>의 마이애이 동물원이나 <시티홀>의 시카고 시청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부부>는 가장 작은 단위의 공동체, '두 사람'이라는 공동체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관한 재연된 기록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부>는 비록 픽션으로 분류되고 있다 쳐도, 와이즈먼의 필모그래피가 지닌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 어떻게 보면 1930년생 감독인 와이즈먼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최후의 대상을 다룬 다큐멘터리라는 인상마저 주게 된다.

7.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스티븐 스필버그 2021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이야기는 낡았다. 구시대적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기반에 둔, 1957년에 첫 선을 보인 뮤지컬의 이야기를 거의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몇 구시대적인 장면에 수정을 가하고, 스코어의 순서를 바꾸긴 했지만, 큰 틀에서 이야기가 변화하지 않았다. 새로이 ‘업데이트’된 장면에도 현재의 관객들은 충분히 불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작품 자체를 현대적 혹은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으로 수정하는 대신, 가능한 그대로 옮겨오는 것에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상황에 가깝다. 이러한 순간이 영화를 보는 내내 이어진다. 물론 폭력적인 불쾌함이 계속된다는 것은 아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닳고 닳은 모티프를 각색이나 변형 없이 고스란히 가져온다는 것에서 느껴지는 거리감에 가깝다고 설명할 수 있겠다. 이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단점이 아니다. 이 영화에 관한 스필버그의 비전은 구시대적인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각색해 선보인다던가, 구시대적인 구김살을 매끈하고 세련되게 펴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원형적인 이야기를 그대로 유지한 채, 이미지의 힘을 극대화하여 그것이 현대에도 통용되는 이야기임을 증명하는 것이 스필버그가 스스로 설정한 이 영화의 과업으로 다가온다. 국가-자본은 백인 빈민과 유색인 이민자 모두를 몰아내려하고, 경찰은 백인의 손을 들어주는 것만 같지만 은연 중에 두 집단의 공멸을 유도한다. 구역 없는 갱들이 쫓겨난 자리에 세워질 건물은 부르주아 예술의 상징과도 같은, 오케스트라와 오페라와 발레가 상연되는 링컨센터다. 도시 빈민을 짓밟고 예술의 전당이 건립된다는 아이러니를, 스필버그는 폐허가 된 슬럼의 밑바닥에서 링컨센터가 건설중이라는 표지판으로 상승한 뒤 버드-아이 뷰로 폐허와 공사가 동시에 진행되는 공간을 조망하고 다시금 땅으로 내려와 지하로 통한 문을 박차고 나오는 청년의 이미지로 보여준다. 마치 전쟁영화에서 폐허가 된 무인지대와 그 끝의 참호를 보여주는 것처럼 촬영된 영화의 오프닝 숏은, 비록 1957년을 배경으로 한 1957년도에 만들어진 이야기를 끌어오고 있음에도, 그것이 현재에도 통용되며 반복되는 이야기임을 납득하게끔 한다. 스필버그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변형하는 수정주의적 접근 대신 텍스트 자체의 동시대성을 믿고 그것을 극대화한다. 스필버그는 “슬프게도 어떤 의미에서는 (영토의 분할만이 아닌) 인종적 분할에 대한 이야기가 1957년 보다 오늘날의 관객들과 더 관련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분열은 봉합되는 대신 확대되었다. 스필버그가 1957년의 낡은 이야기를 다시금 끄집어낸 것은, 둘로 갈린 것으로 보이는 당시의 분열이 더욱 복잡한 형태로 지속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토니의 죽음 이후 제트파와 샤크파가 그의 시신을 함께 옮기는 것은 화합의 증표가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죽음과 사랑으로 잠시 봉합된 순간일 뿐이며, 토니를 쏜 치노는 1년 전의 토니처럼 감옥에 갔다. 치노가 감옥에 다녀오는 사이 웨스트 사이드는 다시금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구역을 놓고 싸우는 이들이 들어찰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은 두 가문의 화해와 화합으로 끝나지만,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비극은 사랑을 통해 죽은 이들의 동상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체포되는 모습을 비상계단 너머로 지켜보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 영화의 비극은 비극 자체로 마무리된다. 스필버그는 그 비극이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진실임을 보여주기 위해 60여년 전의 이야기를 꺼냈다.

8. <EO>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2022

 이오는 영화의 주인공인 당나귀의 이름이다. 서커스단에서 일하던 이오는 동물권 단체의 시위와 서커스단의 파산으로 인해 다른 곳으로 옮겨진다. 영화는 승마장, 농장, 동물보호소, 야생동물 불법거래단 등을 거치고, 시위대, 공무원, 소방관, 서커스단원, 다운증후군 환자들, 훌리건, 트럭운전수, 의문의 부자 등을 만나는 이오의 여정을 따라간다. 로베르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를 느슨하게 리메이크한 것만 같은 이 영화는 모든 인공적인 산물을 혐오하는 것만 같다. 그것은 불법동물거래소나 서커스단, 농장처럼 실체가 있는 장소일 수도, 시위대나 축구팀과 같은 집단일 수도, 법, 제도, 동물권 등의 관념일 수도 있다. 물론 동물권 앞에는 '인간 사고의 산물'이라는 것이 붙어야 겠지만. 영화 속에서 이오는 다양한 방식으로 대상화된다. 그것은 그가 말을 할 수 없는 비인간 동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의사표현을 할 수 없는, 하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의사표현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는 이오의 모습은 그것을 빗겨간다. 아니, 빗겨가려 한다. "빗겨가려 한다"라고 말한 이유는 결국 이오를 담아내는 것 또한 인공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핸드헬드, 클로즈업, 몸에 부착된 카메라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오의 여정을 쫓던 카메라는 종종 이오(혹은 주변의 인간들)을 완전히 벗어난다. 난데없이 등장한 뒤집힌 스키 장면이나 붉은 숲을 드론으로 보여주다 풍력발전기의 회전에 맞추어 회전하는 움직임, 혹은 댐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를 역재생으로 보여주는 것 등이다. 이러한 카메라의 움직임 혹은 이미지에 가한 조작은 카메라 자체의 인공성을 극대화한다. 과장된 붉은 조명과 음악이 동원된 서커스 장면에서 시작한 이 영화는 영화가 근본적으로 지닌 인공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벗어날 수 없음을 스스로 시인한다. 다시 말해, <EO>는 어떤 식으로도 이오를 대상화할 수밖에 없음을 자백하는 영화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이오는 공장식 축산농가의 소떼와 함께 어디론가 향한다. <옥자>나 공장식 축산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으레 보았던 동물의 행렬 속에 이오가 뒤섞인 채 영화가 끝난다. 이는 영화라는 인공은 언제나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인공이 아닌 것에 배패할 수밖에 없다는 노장의 자기고백이다.

9. <제로스 앤 원스> 아벨 페라라 2022

 아벨 페라라의 <제로스 앤 원스>는 팬데믹이 배경이다. 극에서 팬데믹은 주요한 소재는 아니다. 단지 대부분의 인물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열감지 카메라 같은 것이 등장하고, "우리 모두 음성이니 걱정하지 말아라" 같은 말이 나올 뿐이다. 아나키스트 테러리스트인 쌍둥이 동생 저스틴을 막기 위해 로마를 찾은 CIA 요원 제이제이의 이야기 속에서 바이러스 감염은 중요한 이슈가 아니다. 아벨 페라라는 언제나 장르영화를 만들었고, 언제나 장르가 지닌 질감을 영화의 표면에 쉼없이 덧바르는 일을 해왔다. <드릴러 킬러>와 <바디 에이리언>의 끈적함이나 <킹 뉴욕>의 차가움, <어딕션>의 무채색 등을 떠올려보자. <제로스 앤 원스>는 팬데믹 시기의 질감을 보여준다. 저화질의 화상회의 화면, 열감지 카메라의 화면은 영화 전체의 질감으로 확장된다. '외로운 늑대'에 가까운 저스틴과 그를 막기 위해 움직이는 제이제이의 상황은 그 자체로 락다운의 고독감과 맞먹는 정동을 발산한다. 두 사람은 마주하고 싶지만 마주하지 못하고, 두 사람의 대면은 취조당하는 저스틴의 모습이 담긴 화면을 통해서야 이루어진다. 러시아 정보국이 관여된 테러라는 둥의 이야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 영화는 그러한 방식으로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한 시기의 질감을 고스란히 떠안음으로써 정치적이다. "0들과 1들"이라는 제목은, 영화의 도입부와 마지막에서 에단 호크가 직접 친절히 설명해주듯이, 이분법적인 분할을 부정하는 대신 둘이 필연적으로 공존하는 세계에 관한 것이다. 팬데믹이 극단화한 세계의 대립과 공존이 이 영화에 맴돈다.

10. <축제의 여름(… 혹은 중계될 수 없는 혁명)> 퀘스트러브 2021

 대중음악사에서 1969년은 어떤 해로 기록되었는가? 그해 8월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열렸고, 반전과 평화의 분위기 속에서 히피이즘의 정점으로 기록되어 있다. 같은 해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고, 베트남전은 지속되고 있었으며,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살해된 지 한 해가 지난 시점이었다. 디즈니+를 통해 공개된 <축제의 여름>은 1969년 뉴욕 할렘에서 진행된 “할렘 문화 축제”의 기록영상을 복원한 뒤 재편집한 다큐멘터리다. 국내엔 지미 팰런의 <투나잇 쇼>의 하우스 밴드 리더로 조금 더 알려진, 힙합 밴드 더 루츠의 드러머이자 프론트맨인 아미르 “퀘스트러브” 톰슨이 연출했다. 질 스캇 헤론의 노래 “The Revolution Will Not Be Televised”를 조금 비튼 영화의 부제 “…혹은 중계될 수 없는 혁명(...Or, When the Revolution Could Not Be Televised)”는 “블랙 우드스톡”이라 불린 이 축제가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를 단박에 설명해준다. 축제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는 영화 초반부는 1969년 당시의 할렘을 짧게 스케치해 보여준다. 경찰은 흑인들의 축제를 온전히 보호해주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흑표당이 축제의 경호를 맡고 있다. 이 축제가 기록된 것은 <축제의 여름>에 담긴 1969년뿐이며, 40시간 분량의 촬영물은 당시 미국 CBS를 통해 단 한 번 방영되었을 뿐이다. 이후 “블랙 우드스톡”은 잊혔다. 할렘 문화 축제는 단순한 음악 페스티벌이 아니었다. 우드스톡이 냉전시기의 폭력에 반대하는 평화의 혁명이었다면, 할렘 문화 축제는 모든 참여자가 시민이라는 이름의 주체로 거듭나는 혁명이었음을, <축제의 여름>은 말하고 있다.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인터뷰에서, 당시 관객이었던 이는 이렇게 말한다. “때론 그게 진짜였는지도 확신이 안 서요. 제 기억이 진짜였다고 재차 확인받은 기분이에요. 고마워요!” 기록되었지만 알려지지 못했던 혁명은, 53년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방영(televised)되었다. 란 마누엘 미란다, 크리스 록과 같은 지금의 스타들은 당시의 어린 관객이었다. 축제는 혁명이 되었고, 혁명은 지금의 사람들을 만들었다. 마침내 방영된 혁명은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모니터 앞의 관객에게 다가온다. 역사는 언제나 새롭게 기록될 수 있다는 것을, <축제의 여름>은 넌지시 알려주고 있다.


+그 밖에 흥미로웠던 작품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 기예르모 델 토로, 마크 구스타프슨 2022

<나의 집은 어디인가> 요나스 포헤르 라스무센 2021

<노 베어스> 자파르 파나히 2022

<누가 우릴 막으리> 호나스 트루에바 2021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샘 레이미 2022

<불 속의 연인: 티아와 모리스 크래프트를 위한 진혼곡> 베르너 헤어조크 2022

<스크림> 맷 베티넬리-올핀, 타일러 질렛 2022

<RRR> S.S. 라자몰리 2022

<앰뷸런스> 마이클 베이 2022

<인체해부도> 베레나 파라벨, 루시엔 카스탱-테일러 2022

<탑건: 매버릭> 조셉 코신스키 2022

<퍼시픽션> 알베르 세라 2022

<풀타임> 에리크 그라벨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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