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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Dec 21. 2022

2022년의 한국영화 10편

 천만 영화도 나왔고 국제영화제에서 수상도 했다. 얼핏 올해의 한국영화는 2019년, 그러니까 팬데믹 이전의 모습을 되찾은 것만 같다. 여름시즌 빅4 중 두 편의 손익분기점을 넘는 모습이라던가, 추석 시즌 큰 흥행을 거두는 영화가 등장하는 것도 얼핏 과거와 비슷해보인다. 올해 극장산업의 적은 바이러스보단 OTT 플랫폼 자체다. 팬데믹 시기 완벽히 자리잡은 OTT 플랫폼으로 인해 한국 상업영화의 경쟁자는 MCU나 <아바타: 물의 길>이라기보단 <환승연애>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되어버렸다. 지난 8월 팟캐스트 '카페 크리틱'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영화관은 영화와 만나는 유일한 장소가 아니라 '또 하나의 플랫폼'이라는 지위로 격하되었다. 영화의 장소에 관한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반복되고 있지만, 지금만큼 모두가 각자의 말로 이야기하는 상황은 꽤나 흥미롭다. 과거였다면 모두가 개봉작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향했겠지만, 지금은 보려던 영화가 구독하는 OTT 플랫폼에 입고되길 바란다. 각 플랫폼은 성장을 위해 콘텐츠를 독점적으로 수급하려 한다. 그러한 와중에 <한산: 용의 출현>이 쿠팡플레이에서 독점공개되었으나, 이후 확장판 <한산 리덕스>가 넷플릭스에도 공개되는 일도 있었지만.


 <킹메이커>부터 <영웅>까지 지난 2년 동안 개봉연기를 반복하던 영화들이 올해 대거 개봉 혹은 공개되었기에 얼핏 한국영화의 부피가 불어난 것만 같다. 물론 정말로 그러한지는 따져봐야 할 일이다. 이를테면, 올해 한국의 독립/예술영화 최대 흥행작은 <그대가 조국>이다. 6월 지방선거로 각 지자체장이 바뀐 이후, 강릉국제영화제가 폐지되었고 평창국제평화영화제는 예산삭감으로 내년도 개최를 포기하였으며 전주국제영화제는 배우 정준호가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며 논란이 되고 있다. 내년 한국의 영화제들이 어떻게 될 지 모르겠다. 독립영화가 자신을 선보일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장인 영화제의 독립성은 그 어느 때보다 흔들리고 있고, 독립영화의 흥행 또한 그와 같은 흐름 속에 놓여 있다. 영화제에서 큰 기대와 환호를 받으며 개봉한 작품들은 영화제의 관객규모가 개봉 이후의 관객규모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실감하게 된다. 늘어남 부피감을 체감하는 주체는 거의 없다. 상업영화의 관객수가 일정 부분 회복되었다 하더라도 모든 것은 텐트폴 영화와 OTT 플랫폼 간의 다툼으로, 최종적으로는 (극장) 플랫폼과 (OTT) 플랫폼의 경쟁으로 이어질 뿐이다. 시장과 정책이 포괄하지 못하는 무언가는 팬데믹 이전보다 더 좁은 영역으로 밀려나고 있다. 


 물론 영화는 계속해서 나온다. 화제작은 많았지만 대부분이 실망스러웠고, 흥미로운 작품은 많았지만 놀라운 작품은 많지 않았던 한 해였다. 언제나처럼 올해도 극장에서, 집에서, 영화제에서, OTT에서 여러 영화들을 보았다. 올해 본 한국영화 중 좋았던 10편을 꼽아보았다. 순위는 없으며, 단편과 장편을 구분하지 않았고, 극장개봉 및 영화제나 기획전 등에서 첫선을 보인 신작들로 꼽았다. 가나다순으로 나열했다. 참고로 올해 이전에 관람하여 이전 리스트에 포함된, 가령 <수프와 이데올로기>, <성덕>, <애프터 미투> 등은 제외하였다.

1. <2차 송환> 김동원 2022

 <송환>으로부터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 나온 후속작이다. 전작은 비전향 장기수들의 송환운동을 다루었고, 실제로 송환된 장기수들을 보여주며 끝났다. <2차 송환>은 '2차 송환'을 바라는 '전형 장기수'들의 이야기다. 국가폭력 속에서 결국 전향을 택한 이들은 김대중 정부 당시 송환되지 못했고 여전히 남한에서 살아가고 있다. 김동원 감독은 전작에도 등장했던 김영식 선생을 중심으로 그 이야기를 담아낸다. 사실 앞의 문장은 옳지 않다. 이 영화의 절반, 그러니까 <송환>의 개봉시점부터 2008년까지의 상황을 기록한 부분은 공은주 감독이 연출을 맡고 있던 시기다. 한동안 촬영이 중단되었다가 김동원 감독이 다시 연출을 맡은 2010년대의 내용이 나머지다. 물론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줄기는 김동원 감독의 편집과 내레이션으로 만들어졌지만. 한국의 많은 액티비즘 다큐멘터리가 다루는 이슈들은 대부분 실패한다. 간척사업과 미군기지는 결국 들어서고, 무기가 배치되고, 진상조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무수한 실패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2차 송환> 또한 실패의 기록이다. '2차 송환 운동'은 실패했고, 김영식 선생은 이 글이 쓰여지는 지금도 남한에서 살아간다.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촬영된 이 영화는 공은주 감독이 끝내 완성하지 못한 영화이며, "제작지원은 받지 않는다"는 김동원 감독이 스스로의 원칙을 지키지 못한 영화이고, 전작에서 이루지 못한 김동원 감독이 직접 넘어가 진행하는 북한 촬영의 꿈을 이루지 못하며, 당시 다큐멘터리 최다관객을 기록했던 전작과 달리 흥행과 대중의 관심도 측면에서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2차 송환>을 둘러싼 실패의 겹들은 꽤나 당황스럽다. 실패 속에서도 사건을 이슈화한다는 것에 의의를 둔다던가, 현장을 기록한다던가 하는 등의 목표마저 이 영화에는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무엇보다 김동원 감독은 자신의 다른 영화들보다 이 영화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지게 실패를 고백하는 이 영화는 실패에서 무엇을 길어 올릴 수 있는지 가늠하고자 한다. 문재인과 김정은의 판문점 선언에도 2차 송환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2차 송환은 시민운동의 영역에서 성공할 수 없는 영역에 놓여 있다. 남한과 북한만의 문제도 아니다. <2차 송환>은 개인이 넘어설 수 없는 문제 앞에서 개인의 실패를 고백하고 개인일 수밖에 없는 이의 초상을 제출한다. 어쩌면 담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라는 고백, 이 고백은 여전히 같은 하늘 아래서 숨쉬고 있는 이를 기억하게 만든다.

2.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 박송열 2021

 이 영화의 두 주연배우는 영화의 감독과 프로듀서다. 박송열과 원향라는 연출과 제작, 각본, 촬영 등 대부분의 역할을 두 명이 소화하며 이 영화를 만들었다. 사실 영화의 이야기 자체는 익숙하다. 각자의 일로 성공하지 못한 부부는 일용직을 전전하며 살아간다. 제3금융에 손을 대기도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공유하는 긍지다. 없는 살림에도 먹고 싶은 버블티와 회를 먹을 수 있게끔 살아가고자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얼핏 <소공녀>의 미소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소공녀>의 정반대 방향에 놓여 있다. <소공녀>는 미소가 궁핍함 속에서도 지키고자 하는 취향을 '맥시멀하게' 보여주었다면,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는 자신의 제목이 말하는 바를 꿋꿋이 지켜나간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추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영화를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어떤 방식의 영화이든 말이다. 이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돈의 가치가 아니라 돈의 심리적 가치다. 이 영화는 최근 영화제에서 화제가 된 장편 독립영화 중에서도 극소수인, 어떠한 제작지원사업도 받지 않은 작품이다. 어쩌면 그 사실 자체가 이 영화가 가진 태도에 관해, 돈이라는 존재에 부여되는 심리적인 가치와 경제적이며 합목적적인 영화의 쇼트들에 관해 증명하고 있는 것만 같다. 영화의 두 주인공이 살아내려는 삶은 거창한 꿈이나 야망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단계 같은 비인간적인 직업이나 사채처럼 착취의 굴레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을 선택하지 않는 것, 인격모독에 가까운 말을 들어야 하는 일을 감내하지 않는 것, 돈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가끔씩 삼겹살이나 회를 먹는 것, “삶의 질”이라는 추상적인 용어를 구체적인 삶으로 만들어내는 것.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는 그러한 삶을 가장 투명한 방식으로 보여주고, 그러한 삶을 담아내는 최선의 영화 만들기를 실천한다.

3. <다섯 번째 흉추> 박세영 2022

 얼핏 박세영의 전작들이 떠오른다. 서울과 수도권 곳곳으로 향하는 매트리스-크리처의 여정은 <캐쉬백>과 <갓스피드>의 이동들을 연상시킨다. 그 때 이동하는 것은 사람과 사물들이었다. 중고거래를 위해, 조직의 물건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의 손에 들려 이동되는 물건들과 물고기. 그것들이 교환되고 전달되는 장소는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 이동의 교차점들이었다. <다섯 번째 흉추>가 흥미로운 지점은 만남(들)이 성사되던 교차점 자체가 끊임없이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매트리스-크리처는 캐릭터임과 동시에, 윤아랑 평론가의 말처럼 장소로 작동한다. 매트리스-크리처가 사람들의 흉추를 갈취하는 사건들, 매트리스에 몸을 뉘이고 나누는 사연들. 사건이 발생하고 사연이 전개되는 장소로써 이 매트리스는 이곳 저곳을 떠돈다. 연애에 실패한 사람들, 생명이 꺼져가는 환자, 실패와 상실의 사연들이 매트리스-크리처 위에서, 옆에서, 아래에서 펼쳐진다. <다섯 번째 흉추>는 이상한 방식으로 그러한 순간들을 성립시킨다. 이 매트리스는 분명 곰팡이로부터 발생한 생명체이지만 서사를 움직이는 캐릭터가 아니라 서사가 벌어지는 어떤 곳이 된다. 박세영 감독은 월례비행 상영 당시 자신의 작업물이 어떤 곳에서는 영화로, 다른 곳에서는 미술로 소화되는 경험에 관해 이야기했다. 캐릭터와 장소의 지위를 넘나들며 영화 속 무수한 사연들을 성사시키는 매트리스-크리처의 존재는, 타의에 의해 이곳 저곳을 넘나들게 된 감독 자신의 처지를 그 위에 겹쳐보이게끔 한다. 그것이 감독의 '의도'가 아니었음을 알지만, 그 곤란함 속에서 소속이 규정되지 않는 이러한 영화가 탄생하는 것 아닐까.

4. <사갈> 이동우 2022

 갈(蛇蝎)은 뱀과 전갈이라는 뜻으로, “남을 해치거나 심한 혐오감을 주는 사람”을 뜻한다. <사갈>은 이동우가 영화과 동기인 박건호를 오랜만에 만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사채업자이자 도박중독자인 그는 돈을 버는 족족 술과 도박으로 탕진한다. 성실하게(?) 사채 일을 하며 빚을 갚아 다른 생활을 꾸릴 수 있는 상황이 충족되는 순간에도 그의 손은 도박을 향한다. 전작 <셀프-포트레이트 2020>이 우정의 순간이라는 찰나를 담아내기 위해 168분의 시간을 동원했다면, <사갈>은 156분 동안 박건호와 그 주변 인물들의 끝없는 실패를 담아낸다. 이 영화에서 자막을 통한 이동우의 발화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다. <사갈>은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자막으로 시작해서 "이 영상이 내가 만드는 마지막 다큐멘터리였으면 좋겠다"는 자막(서울독립영화제 상영본에서는 "고민중이다~"의 뉘앙스로 자막이 변경되었다고 한다)으로 끝난다. 전작이 이상열의 이야기였던 만큼이나 그와 함께하는 이동우의 이야기였다면, <사갈>은 박건호의 이야기를 담아내지만 다큐멘터리 자체에 관한 이동우의 복잡한 생각을 그대로 끄집어낸 이야기다. 영화 중반 즈음의 자막은 박건호를 왜 찍기 시작했는지 까먹었다고 고백한다. 그와 더불어, 이동우는 자신의 영화 때문에 박건호가 불행해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와 함께 영화는 잠시 <셀프-포트레이트 2020> 이후의 이상열을 잠시 보여준다. 이동우는 이상열이 영화 촬영 이후 조울증이 심해지고 구치소를 들락거리며 살고 있음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다큐멘터리가 헛된 희망을 심어준 것 같다는 죄책감을 토로한다. 그 죄책감은 <사갈> 전체에 맴돌고 있다. <셀프-포트레이트 2020>이 촬영된 ‘함께’의 순간을 ‘우정’으로 만들어가는 영화였다면, <사갈>은 어느 순간 ‘함께’일 수 없는 이와의 동행을 담아낸다. 우정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이후에도 이동우는 카메라를 들고 박건호를 찍었다. 그렇다고 <사갈>이 절교를 찍은 영화라고 할 수는 없다. 관객은 이 영화 이후의 박건호를 모른다. 관객이 볼 수 있는 것은 이동우가 박건호와, 이상열과, 동료 펑크들과 보낸 시간들이다. 관객은 영화 이후의 그들을, 그들과 이동우의 관계를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가능한 우정의 순간과 우정이 불가능해지는 순간을, 그 순간을 찍고자 그 순간과 뒤엉켜버린 영화를 보고 있을 뿐이다.

5. <상실의 집> 전진규 2022

 작년 한 해 동안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에 관심을 가졌었다. <상실의 집>은 전승일의 <금정굴 이야기>와 함께 올해 공개된 몇 안 되는 국내의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다. 요양원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했던 감독 자신의 경험담인 이 영화는 어쨌거나 '군인' 신분으로 그곳에서 노동하는 자신과 꺼져가는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요양원 입소 노인들이 체감하는 서로 다른 시간의 이야기다. 기미가요를 부르는 할머니, <람보>를 보며 월남전의 기억을 떠올리는 할아버지와 같은 이들이 이 영화에 등장한다. 그들의 육체는 사회복무요원과 같은 현재에 놓여 있지만, 그들의 정신은 여전히 과거에 속박되어 있다. 초현실적인 애니메이션 이미지들, 특히 요양원에 입소하며 머리카락이 밀릴 때 마치 기억들이 밀려나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한 연출이 인상적이다. 사실 <상실의 집>에서 다큐멘터리적인 이미지나 사운드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입소 노인들의 음성이 담겨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구술사를 애니메이션으로 옮긴 것도 아니다.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에 가까운 톤으로 덤덤히 자신이 목격한 바를 이야기하는 감독의 목소리가 이 영화의 유일한 다큐멘터리적인 요소다. <상실의 집>은 그것만으로도 기록되지 않은 기억들, 요양원이라는 삶의 마지막 장소에 속박된 기억들을 이미지로 보여준다. 강희진의 <메이•제주•데이>나 김윤정의 <선율>처럼 카메라로 직접 기록할 수 없는 현장을 애니메이션으로 되살린 흥미로운 작품 중 하나다. 무엇보다,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요양원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했었기에 이 영화가 더욱 가깝게 다가왔다. 

6. <소설가의 영화> 홍상수 2022

 <소설가의 영화>에는 ‘소설가의 영화’가 나온다. 소설가 준희는 배우 길수의 조카의 도움을 빌려, 길수와 그의 남편이 주인공인 영화를 찍고자 한다. 세원의 책방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던 준희의 궤적이 중단되고 영화는 서울 서대문구의 작은 영화관으로 향한다. 준희는 이곳에서 자신의 영화를 길수에게 보여줄 참이다. 준희가 길수를 비롯한 이들에게 설명하던 영화는 얼핏 홍상수의 작업을 설명하는 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배우와 장소가 결정된 뒤에야 이야기를 쓸 수 있다고,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아내겠다고 말하는 준희의 모습은 홍상수 자신의 작업을 준희로 하여금 설명하게끔 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영화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고야 마는 ‘소설가의 영화’는 그것과 다르다. 길수와 그의 모친으로 추정되는 나이든 여성만이 출연하는 이 영상은 핸드헬드로 촬영되었고, 흑백이었다가 컬러로 전환된다. 즉 준희의 말을 통해 홍상수 영화의 형식들을 떠올렸다면,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에서 부정된다. ‘홍상수 영화’라는 껍데기에 대한 홍상수의 코멘트가 이 영화라고 할 수도 있겠다. 많은 이들이 ‘홍상수 영화’라는 단어에서 떠올리는 것과 홍상수의 영화는 다르기 때문이다. 바쟁의 말을 빌리자면, 영화는 영화 이전부터 존재하던 것이며 기술을 통해 1895년 실현된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화라는 관념은 언제나 사람들 앞에 존재했으며, 영화, 유성영화, 컬러영화, (실패했지만) 3D영화 등은 관념 속에만 존재하는 영화에 다가가기 위한 시도들이다. 그렇다면 ‘홍상수의 영화’, 혹은 준희가 생각하던 ‘소설가의 영화’, 혹은 <소설가의 영화>에서 보고싶었던 영화는 대중의, 준희의, 관객의, 홍상수의 관념 속에 있던 것에 가까울 것이다. 영화는 만들어지는 순간 그것은 관념과 상상 속에 존재하던 것과 다른 것이 된다. 다시 ‘소설가의 영화’로 돌아와보자. <소설가의 영화>의 러닝타임은 준희가 책방을 중심으로 하남을 돌며 여러 인물과 갖는 우연한 만남으로 채워져 있다. 때문에 준희의 궤적을 따라가던 관객들은 ‘소설가의 영화’가 우연한 만남들을 통해 준희가 습득한 무언가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라 막연히 상상하게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소설가의 영화’는 그런 것이 아니다. ‘소설가의 영화’는 준희가 보낸 우연한 만남들의 시간을 담아낸 것도, 자연스러움에 가까운 길수의 모습을 담아낸 것도(자연스럽다기엔 흑백에서 컬러로 전환되는 인위적 조작이 너무나 강렬하게 다가온다) 아니다. 상상을 빗나간 영화, 혹은 관념적인 영화를 따라올 수 없는 실제 영화 이미지의 등장. ‘소설가의 영화’는 <소설가의 영화>의 시공을 가르고 관객을 급습한다. 어쩌면 영화를 보고 나온 길수의 오묘한 표정은, 홍상수가 관객에게 공감을 보내는 흔치 않은 광경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과거를 보여주는 영화는 그럼으로써 미스터리하며, 그럼으로써 우리의 뒤통수를 노린다는 것에 대한 공감 말이다.

7. <수라> 황윤 2022

 영화의 제목인 '수라'는 군산에 위치한 갯벌의 이름이다. 황윤 감독은 2006년 새만금 간척사업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촬영중이었으나, 정부의 무리한 사업 중 사망자가 발생하자 상실감에 촬영을 접는다. 이후 군산으로 이사 온 감독은 여전히 매달 새만금의 자연을 기록하는 시민조사단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이 영화는 시민조사단 멤버인 오동필과 감독 자신을 중심으로, 2003년부터 시작되 시민조사단의 활동을 담아낸다. <수라>의 시놉십스를 적어보자면 액티비즘과 성찰적 다큐멘터리 사이에 놓인 영화처럼 다가온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아무도 이득을 본 사람이 없다는 외침부터 간척지 위에 건설하려는 군산 신공항이 사실상 군산 미군기지 확장에 가깝다는 이야기 등을 담아내는 것, 감독이 자신의 내레이션으로 새만금에 관해 시시각각 변화하는 인상을 말하고 있다는 것 등을 생각해보면 그러하다. 하지만 영화 자체의 이미지적인 인상은 생태 다큐멘터리 내지는 자연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오동필과 황윤은 영화 속에서 수차례 갯벌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오동필은 간척사업 이전 도요새들의 군무를 본 것을 두고 "아름다운 것을 본 죄" 때문에 계속 조사단을 하는 것 같다 말하기까지 한다. 실제로 영화는 오랜 기간 촬영되었기에 가능한 다양한 새들의 이미지들, 간척사업으로 갯벌에서 염습지가 된 수라갯벌(조사단은 '갯벌'이라 계속 불러야 다시 갯벌이 살아날 것이라 믿기에 더이상 갯벌의 모습이 아님에도 갯벌이라 부른다)의 풍광 등은 BBC의 <살아있는 지구>나 넷플릭스의 <우리의 지구> 같은 다큐멘터리에서 보던 영상에 가깝다. 황윤이 오동필의 아들인 오승윤과 쑥새의 노래를 녹음하기 위해 일출 시간부터 염습지를 찾는 영화의 첫 장면은, "아름다운 것을 본 죄"와 같은 오동필의 말을 고스란히 납득하게끔 한다. 사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여줌으로써 생태주의나 환경주의를 납득시키려는 시도 대부분은 그 이미지만 남을 뿐 대체로 실패한다. 하지만 <수라>는 그 '아름다움'으로 기어이 관객을 납득시킨다. 이는 <수라>가 지닌 액티비즘적, 수행적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 초반 황윤이 2006년의 실패와 상실감을 고백하는 것, 부안과 군산의 어민들이 간척사업 이후 살아가는 모습, 오랜 시간 새만금을 관찰한 황윤과 오동필이 갖는 심경의 변화 등은 '아름다운' 수라갯벌의 이미지와 함께 영화에 담겨 있다. 황윤과 오동필이 매료된 수라갯벌의 아름다움은 관객을 그 현장에 오게끔 하는, 관객의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일종의 촉매제에 가깝다. <수라>는 자신이 목격하고 담아낸 이미지에 관한 자신감으로 가득하다. 자신이 매료된 그곳을 지키기 위해 그 이미지로 관객을 매료시키고자 하는, 다시 실패하는 것의 위험을 감수하고 그 이미지를 관객 앞에 보여주는 마음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관객 앞에 다가온다.

8. <잠자리 구하기> 홍다예 2022

 홍다예 감독의 <잠자리 구하기>는 입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은 불안에 관한 고백이다. 고3이었던 2014년 입시생활에 관한 다큐멘터리 <시발.>을 시작으로 <개새끼>, <관종쓰레기> 등으로 이어지는 감독의 필모그래피의 연장선상에 놓인 작품이기도 하다. <잠자리 구하기>는 <공부의 나라>와 같은 다큐멘터리처럼 입시 제도를 분석적으로 비판하는 영화가 아니다. 고3, 재수생, 대학 신입생, 20대 중반인 현재 등 다양한 시간대의 모습이 계속하여 교차되는 영화의 형식은 ‘입시’와 ‘대학생활’이라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도 않다. 더 나아가, 이 영화는 그러한 불안을 떨쳐내고 마침내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는 성장담도 되지 못한다. 감독 자신은 이 영화를 “20대 청년의 인류학적 반(反)-성장 보고서”라 말하고 있다. “잘 지내지 못한다는 고등학교 친구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라는 시놉시스가 무색하게, 이 영화는 결국 편지를 부치지 못했다는 고백을 포함하고 있다. 불안 속에 놓여 있는 감독은 친구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을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다만 부치지 못한 편지를 이 영화로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이 영화는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촬영된 감정을 유일한 진실로서 제시한다. 홍다예 감독과 친구들이 입시 과정에서 어떠한 실패와 성공을 경험했는지는 그저 그들이 경험한 사실의 기록으로서 제시될 뿐이다. <잠자리 구하기>가 제시하는 기록은 입시라는 과정 속에서 경험한 사실들의 진술이 아니라,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누적된 감정들이다. 자기 파괴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날것의 감정들을 파헤치고 공개함으로써 자신의 반-성장을 고백한다. 이는 원하던 대학에 진학했음에도 여전히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는, 끝없이 성장기에 머무를 뿐 성인기에 도달할 수 없는 청년의 초상이기도 하다. 대학 진학이라는 지표는 여전히 강력한 성인기의 지표임과 동시에, 너무나도 추상적이라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다.

9. <탑> 홍상수 2022

 최근의 홍상수는 안과 밖이라는 경계에 천착했던 것만 같다. <인트로덕션>와 <소설가의 영화>의 저화질은 창밖의 저기와 건물 안의 여기를 완전히 구분시켰으며, 그것은 공간의 구획을 오감에 따라 변화하는 인물로, 더 나아가 프레임의 내부와 외부 중 어느 곳에 위치함에 따라 변화하는 인물로, 더욱 나아가자면 영화라는 큰 틀 속의 인물과 영화와 완전히 구별되는 ‘배우’라는 자연인 사이의 경계를 가늠해보는 것으로 나아갔다. 그 경계가 모호해지거나 뒤집힐 때마다, 혹은 인물이 그 경계를 오가며 서로 다른 여기와 저기를 기이한 방식으로 통합시키는 순간마다,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있다는 인식에 모종의 교란이 일어난다. <탑>은 이 교란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끌어온다. 1부와 2부에서 이는 크게 두드러지진 않는다. 다만 홍상수가 직접 연주한 음악이 이전의 영화들에서와 다르게 악기 이외의 현장음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바깥은 이미 “탑”의 각 층을 구별하는 무언가로 영화에 기입된다. "탑"의 각 층에서 병수는 어딘가 다른 사람이 된다. 성격이 달라지기도 하고, 채식을 하다가도 육식을 하고, 연인이 바뀌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는 무엇일까?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동일한 병수가 맞을까? <소설가의 영화> 속 “소설가의 영화” 속 김민희의 모습이 길수인지 김민희인지 알 수 없었던 홍상수의 관객은 <탑>에서 같은 문제를 더욱 압축된 긴장 속에서 마주한다. 영화의 마지막, 1부에서 영화사에 잠시 일 보러 떠났던 병수가 편의점에 다녀온 정수를 우연히 마주친 것만 같은 상황이 컷 없어 이어진다. 하지만 정수는 1부 마지막의 모습과 다르게 우산을 들고 있고, 병수에게 존댓말을 쓰지도 않는다. 병수는 1부에서 피웠던 것과는 다른 담배(4부에서 연인이 준 담배)를 들고 있다. 이 순간 <탑>이 <북촌방향>이나 <풀잎들>에서 홍상수가 횡적으로 펼쳐 놓은 구조를 수직으로 세워놓은 것만 같다는 기시감과 함께, 그것만으로 이 영화를 설명할 수 없다는 괴리감을 느낀다. <소설가의 영화>가 영화 바깥의 이미지를 통해 이것과 저것, 여기와 저기, 영화의 안과 밖을 충돌시켰다면 <탑>은 그것을 오로지 영화 내부에서 선보인다. 건물 앞 나무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병수의 모습은 마치 “탑”이라는 영화적 장치가 그를 소화해낸 뒤 뱉어낸 것만 같다. 탑에 들어가기 전과 후의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는 2부에서 탑에 들어간 이후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야 바깥에 나온다) 논현동 한 복판에 놓여 있다기엔 기이한 외관과 인테리어를 한 이 탑은, 한 사람의 여러 모습을 낱낱이 분해한 뒤 다시 하나로 합쳐 세워둔다.

10. <헌트> 이정재 2022

 <헌트>는 다른 영화들이 피해가려 했던 것을 피해가지 않는다. 특정한 사건 하나를 재현하기보단 신군부 시기 벌어진 여러 사건들을 경유하며 짜여진 영화의 이야기는 일종의 우회로를 통하여 당시를 더욱 명확하게 포착하려 한다. 이 시도는 꽤나 성공적이다. 남파간첩과 공수부대라는 두 주인공의 서로 다른 조건은 이상한 방식으로 두 인물과 영화 <헌트>가 함께 서 있는 공통의 지평을 만들어낸다. 영화는 무수한 실제 사건들을 재료 삼아 만들어낸 가상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이는 교조적인 어투로 관객을 훈계하거나, 결정적 순간에 몸을 빼거나, 사극의 외피를 빌려 누군가를 성인군자로 추대하거나, 장르영화의 외피를 빌려 끔찍한 방식으로 지지선언을 내보내던 것 같은 한국의 무수한 정치영화와도 다르다. 언급한 영화들이 역사와 장르를 현실정치에 대한 알레고리로 끌어들이며 영화와 정치 사이의 간극을 좁히려 할 때, <헌트>는 스스로가 서 있는 위치를 명확히 함으로써 두 주인공을 주축으로 다양한 집단이 가상의 시공간에서 벌이는 시뮬레이션이 된다.물론 <헌트>에서 그러한 시뮬레이션이 실제 역사를 초과한 사건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그 시물레이션 그 자체다. 이를테면 <헌트>가 내세우는 지평은 이러한 것이다. 시민을 학살한 독재자는 어떤 외교적, 경제적 이점이 있다 하더라도 ‘악’이다. 그러한 ‘악’이 사라진 이후의 세계는 알 수 없다. 김정도의 신군부 내부의 반-군부 세력은 새로운 신-신군부가 될지도 모른다. 전쟁이 아닌 평화통일을 원하는 박평호의 바람은 수많은 변수 속에 한반도를 밀어 넣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군부독재를 끝장내고 청산해야 한다는 공통의 지평은 두 사람이 손을 잡게 한, 서로 다른 영역에 있던 두 사람이 만나게 된 회색지대다. 수많은 이분법이 작동하는 신냉전 체제 속의 80년대 위에 마련한 회색지대는 그 자체로 당시를 다르게 조망할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헌트>는 보수적이다. <헌트>는 먼저 한발 앞서 나가 세계를 바꾸자고 말하는 대신, 우선 함께 서 있을 수 있는 공통의 지평을 상상해볼 것을 제안하는 정치적 SF다. 마침내 독재자의 면전에 총부리를 겨누는 대체역사 판타지가 아니라, 갈라진 세계를 우선 봉합해보자는 정치적 다중우주를 시도한다. <헌트>가 보여주는 보수적인 면모는 단순히 어떤 정당이나 정파, 정치인에 대한 간접적인 지지가 아니다. 많은 이슈들이 왜곡하고 있는 청산대상을 우선 청산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의지표명에 가깝다. 때문에 <헌트>는 너절한 지지선언과 지겨운 음모론이 가득한 한국의 여러 정치영화 가운데서 독특한 위치를 선점한다.




+그 밖에 흥미로운 작품들


<경아의 딸> 김정은 2022

<괴인> 이정홍 2022

<금정굴 이야기> 전승일 2022

<너와 나> 조현철 2022

<네임리스 신드롬> 차재민 2022

<늑대사냥> 김홍선 2022

<로봇이 아닙니다.> 강예솔 2022

<보드랍게> 박문칠 2020

<복지식당> 정재익, 서태수 2021

<씨티백> 황선영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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