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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Dec 26. 2021

2021년의 해외영화 10편

 올해는 작년에 비해 풍족한(?) 한 해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대부분의 영화제들이 작년에 비해 안정적으로 운영되었고 (물론 그 사이에 사라지거나 대폭 축소된 영화제들도 있지만), OTT와의 타협점을 찾아낸 것 같은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다시금 극장을 찾기 시작했다.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를 시작으로 MCU를 비롯한 여러 대형 영화들이 개봉을 재개했으며, 나름대로의 흥행성적을 내기도 했다. 올해 초 일본(과 세계 곳곳)에서 대히트를 기록한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부터 팬데믹 시기에도 역대 박스오피스 기록을 세우고 있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까지, 비록 팬데믹이 끝나진 않았지만 (할리우드에 한정하자면) 나름의 루틴을 찾아가고 있는 듯한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블랙 위도우> 개봉 이후 제기된 극장개봉과 OTT 공개 시점 사이 홀드백과 출연료 문제처럼 해결해야 할 것이 많지만 말이다. 예년에 비해 늦은 시기에 진행되었지만 어쨌든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활기를 되찾은 칸 국제영화제를 비롯해 세계 곳곳의 여러 영화제들이 다시금 오프라인으로 진행되기 시작했고, 작년에 미쳐 선보이지 못했던 작품들이 영화제, OTT, 극장개봉 등 여러 경로를 통해 관객들을 다시 찾아오기 시작했다. 뭐랄까, 종종 올해의 영화들을 보며 작년 한 해 동안 창고에서 묵혀지고 있었던 작품들이 쏟아져 나온다는 인상을 받았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올해도 쏟아지는 영화 속에 파묻혀 지냈던 것만 같다. 다시금 활성화된 영화제들을 정신없이 돌아다녔고, 온라인으로 엑세스 가능한 경로들을 돌아다녔고, 새롭게 런칭한 OTT 플랫폼들을 돌아다녔다. 그 와중에도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와 완화, 델타/오미크론 변이 등 새로운 코로나19 변이의 등장 등의 이슈로 영화들의 공개일정이 뒤바뀌는 혼란도 있었지만... 모든 것이 휩쓸려 나가 사라져버린 작년에 비하면 비교적 안정적인 한 해였다. 온라인으로 자리를 옮겨간 영화제와 OTT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것은 작년에 했던 이야기에 반복인 것처럼 느껴진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개봉을 재개한 것을 제외하면 큰 변화는 없었다. 올해도 마스크를 쓰고 극장에 찾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거나 만나지 못했고, 이곳 저곳에서 영화를 봤다. 팬데믹 2년차를 맞이한만큼 무기력감에 시달리기도 했고, 졸업이나 등단 등 개인적 신변의 변화도 많았던 한 해였기에 여러모로 피곤한 한 해였지만, 백수에 가까운 상황에서도 피로감을 느낄만큼 이런저런 일들을 많이 진행해본 한 해였다. 그렇게 올해 본 해외영화 중 좋았던 10편을 꼽아보았다. 순위는 없으며, 단편과 장편을 구분하지 않았고, 극장개봉 및 영화제나 기획전 등에서 첫선을 보인 신작들로 꼽았다. 가나다순으로 나열했다. 참고로 올해 이전에 관람하여 전년도 순위에 포함된 <퍼스트 카우>나 <스파이의 아내> 같은 작품들, 뒤늦게 개봉해 <피닉스>나 <3개의 얼굴들>, <해피 아워>처럼 개봉연도와 제작연도가 크게 차이나는 작품은 리스트에서 제외했다.

1. <강은 흐르고, 굽이치고, 지우고, 되비춘다> 주셩저 2021

 코로나19와 팬데믹, 거리두기 등의 키워드를 소재로 삼은 영화들이 대폭 늘어났다. 몇몇 극영화와 TV시리즈에는 코로나 상황을 전제로 하거나, 그것의 존재를 의식한 듯한 설정을 선보였다. 그리고 다큐멘터리의 영역에서, 코로나19와 팬데믹을 정면으로 다루는 작품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새로운 해>, <프레젠트. 퍼펙트.> 등 몇몇 작품이 국내에 소개된 적 있는 주셩저 감독의 신작 <강은 흐르고, 굽이치고, 지우고, 되비춘다>는 그 중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중국 우한시를 배경으로 삼는다. 영화가 시작하면 텅 빈 거리가 등장한다. 청소부와 경찰 정도를 제외하면 길거리에 보이는 사람이 없다. 2020년 봄에 촬영된 이 장면은 CCTV 화면처럼 텅 빈 거리를 조망한다. 종종 등장하는 사람, 소리 없는 이미지 위로 울려퍼지는 경보음 등은 이렇다 할 사건 없이도 불길함을 만들어낸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의 한 장면을 다큐멘터리에서 만나는 것과 같은 느낌이랄까. 불길함이 가득 담긴 오프닝 시퀀스 이후엔 2019년 촬영된 우한시 곳곳의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공장, 수변공원, 레이저쇼와 불꽃놀이가 담긴 야경, 공장, 홍수로 인해 주기적으로 범람하는 강, 공장과 노동자, 산책을 나온 가족, 공을 차며 노는 아이들, 자전거를 탄 청소년들, 등하교를 반복하는 학생들... 이 영화를 가득 채우는 것은 팬데믹 이전의 일상이다. 마스크도, 거리두기도, 통제도 없다. 인구 1100만의 도시의 풍경은 사람들의 일상으로 가득하다. 일상의 이미지 위로 편지를 읽는 내레이션이 등장한다. 편지의 수신인은 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난 친구와 가족이다. 끝임없이 일상적 운동을 반복하는 도시 이미지-여기엔 범람을 반복하고 끝없이 흐르는 양쯔강의 이미지가 중심이 된다-위에 포개지는 내레이션에 담긴 편지글은, 일상적인 운동이 중지된 지금을 무덤덤하게 담아낸다. 무심함에 가까운 이미지와 내레이션의 배열은, 중지된 일상적 운동을 더욱 강하게 회상하고 갈구하도록, 그것을 되찾을 수 없게 된 망자들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도록 한다. 때문에 이 영화는, 중지된 일상에 대한,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들에 대한 최대한의 애도다.

2. <드라이브 마이 카> 하마구치 류스케 2021, <우연과 상상> 하마구치 류스케 2020

 두 작품을 한 곳에 몰아넣은 것은, 아래 "+그밖에 기억에 남는 영화들"에 올라온 영화의 갯수를 보면 알겠지만, 올해 마주한 좋은 영화들이 너무나도 많기에 한 작품이라도 리스트에 더 우겨넣으려는 발버둥이다. 게다가 올해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해라고 말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그의 작품이 자주 극장을 찾았다. 각본으로 참여한 <스파이의 아내>부터 정식개봉할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던 <해피 아워>, 그리고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를 뒤집어 놓은 두 작품. <드라이브 마이 카>는 12월 정식개봉했으며 <우연과 상상>은 2022년 초 개봉 예정이다. 전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며, 후자는 '우연과 상상'이라는 테마로 써내려간 7편의 시나리오 중 3편을 영화화한 옴니버스 영화다. 두 작품의 성격과 제작된 방식은 다르지만, 두 작품에 이르러 하마구치 류스케는 공인된 거장으로 자리잡은 것만 같다. 두 작품 모두 <해피 아워>와 <아사코> 등의 작품에서 드러난 분열된, 복수화된 정체성이라는 테마를 그대로 이어간다. 인물들은 고독한 개별자로서 존재하고, 그 고독함은 자신의 분열된 정체성에 기인한다. <우연과 상상>은 하마구치의 어떤 영화보다도 각본가로서의 하마구치 류스케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 속 우연들에서 영감을 받아 써내려간 우연에 대한 세 단편을 엮어낸 이 영화는 하마구치의 말처럼 '대화극'에 가깝다. 그가 전작들에서 에드워드 양, 히치콕, 클로드 샤브롤, 구로사와 기요시 등에게 받은 영향을 가감없이 드러내며 자신의 스타일로 만들어냈다면, <우연과 상상>에서는 로메르와 홍상수의 스타일을 자신의 것으로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각각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문은 열어둔 채로', '다시 한번'이라는 제목을 지닌 세 단편은 우연한 마주침, 재회, 충돌로 인해 발생한 이야기들을 상상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연극과 자동차를 통한 이동은 인물들이 갈등을 벌이는 장이 됨과 동시에 그것이 해소되는 장이기도 하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모든 캐릭터들이 고통을 표현하지만, 내가 촬영장에 있던 모든 배우들에게서 느낀 것은 연기의 즐거움이었다."라고도 말했다. 극 중 가후쿠는 연기를 펼치던 유나와 제니스를 보며 "두 사람이 연기하던 중 무언가 일어났다"며, "그것을 관객들에게도 일어나게 해야한다"고 말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그것을 해내는 영화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여러 저서와 인터뷰에서 "숏을 찍을 수 있는 감독"이라는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그는 필로와의 인터뷰에서 주목하는 일본의 신진 감독으로 하마구치 류스케와 미야케 쇼를 꼽았다. 하마구치의 영화를 보고 있자면 "숏을 찍는다"는 무책임한 발언이 어느 정도 이해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3. <모든 곳에, 가득한 빛> 테오 앤서니 2021

 이 영화는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한다. 미국 경찰이 사용하는 테이저건과 바디캠을 제작하는 액손의 CEO가 회사의 기술을 소개하고, 19세기 금성일식 관측의 역사와 마레의 사진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며, 무인항공기를 통한 실시간 감시체계 도입을 놓고 벌어지는 흑인 공동체의 토론 또한 등장한다. 이것들은 카메라의 존재 자체로 인해 발생한 기술적, 심리적, 도덕적 감시체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감독은 자신의 안구 뒤에 숨겨진 시신경을 보여주려 한다. 시신경은 각막이 수용한 시각적 정보를 뇌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지만 시각적 정보 자체를 수용할 수는 없는 사각지대에 다름없다. 테오 앤서니의 질문은 여기서 출발한다. 모든 곳에 카메라가 있는, 모든 곳에 있는 카메라에 모든 것이 촬영되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카메라라는 눈 뒤에 위치한 사각지대에 있는 것은 무엇(혹은 누구)인가? 영화는 카메라가 제공하는 객관성의 환상을 벗겨내고 카메라-눈이 만들어낸 판옵티콘을 가능한 직시하려 한다. 그리고 카메라의 사각지대인 카메라 뒤에 있는 사람의 방향으로 카메라를 겨눌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보자는 영화의 후반부는, 그 가능성에 대한 신뢰, 감시체계의 존재 자체로 분열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반대의 방향으로 카메라를 겨눌 수 있는 공동체의 가능성에 대한 신뢰를 제안한다.

4. <시티홀> 프레데릭 와이즈먼 2020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여러 영화처럼, <시티홀>은 시청을 찍는다. 정확히 말하면 트럼프 정권 집권기인 2018년의 보스턴 시청과 당시 시장이었던 마티 월시(현 미국 노동부 장관), 그리고 보스턴 곳곳에서 활동하는 시청 공무원들의 모습을 담는다. 때문에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나 <내셔널 갤러리>처럼 특정한 공공공간 하나에 집중한다기보단, <인디애나 몬로비아>나 <버클리에서>처럼 한 지역 전체를 다루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다. 와이즈먼의 카메라는 언제나 그랬듯 카메라 앞의 인물들을 인터뷰하지 않는다. 대신 보스턴이라는 공간을 기반으로 벌어지는 개인 간의 역동을, ‘도시’라는 유기체가 작동하는 모습을 관찰할 뿐이다. <시티홀>에서 흥미로운 것은 관료제의 함정 혹은 구멍을 드러내는 듯한 장면들이다. 2017년의 인디애나주 몬로비아를 담은 <인디애나 몬로비아>와 대비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인디애나 몬로비아>는 트럼프 정권 당시의 미국 남부를 보여준다. 이들의 공동체는 지극히 민주적이고, 지극히 보수적이다. 영화는 백인 기독교도들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낙농업이 주 수입인, 20, 30대는 도시로 떠났으며 지역에서 평생을 살거나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돌아온 이들만이 남은 몬로비아의 공동체를 보여준다. 동시에 이들이 등장하는 사이사이에 하수처리장의 오물, 우리에서 이송되어 나오는 돼지 떼 등을 보여준다. 그리고 “Make America Great Again”이라는 외침이 들릴 것 같은 미국 중서부의 농촌 정경, 독수리가 날개를 펴듯 가로로 길게 펴지는 농약 뿌리는 농기계의 모습이 등장한다. 결국 와이즈먼은 중서부 미국의 소도시라는 공간을 대하면서,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대신 회유적으로, 그리고 분산적으로 이를 드러낸다. <인디애나 몬로비아>의 마지막 장면에서 누군가의 장례식이 등장한다. 하지만 영화에는 누군가의 출생, 탄생은 담기지 않는다. 와이즈먼은 <인디애나 몬로비아>에서 공동체의 생명이 끝나가는 시기를 포착하려는 것만 같다. 즉 미국이 자랑스레 내세우는 민주주의의 방법으로 극적인 보수화 과정을 겪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티홀>은 그 대척점에 서 있는 보스턴의 모습을 보여주며, 반대로 민주적인 절차와 사상에 따라 모든 이를 배제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이들의 열정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노숙인 쉼터에 대한 이야기나, 대마초 사업에 대한 질의응답 모임에서 지역 공동체를 이루는 이들과 사업가 사이의 격렬한 토론을 보고 있자면, <뉴욕 라이브러리> 등 와이즈먼의 전작에서 드러난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엿보인다. 하지만 관료제의 함정이라 부를 수 있는 것, 혹은 아일랜드계 천주교인 시장이 보여주는 어떤 태도들에서 무엇도 배제하지 않으려는 민주주의적 열망의 실천 속 모순이 드러난다. <인디애나 몬로비아>는 지극히 민주적인 방식으로 보수화되는 곳을, <시티홀>은 보수화의 흐름 속에서 노력하지만 그 안에 내포하고 있는 모순을 조심스레 꺼내 보인다. 와이즈먼은 <시티홀>의 마지막에서야, 보스턴하면 떠오르는 항구와 바다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식민지 개척자들이 처음 들어온 곳, 그들이 유럽으로부터 독립한 사건이 벌어진 곳, 재향군인회 건물에 걸려 있던 그림 속 사건들이 벌어진 역사적 장소를 돌아보며, 이 영화는 끝난다.

5. <아네트> 레오 까락스 2021

 영화가 시작되면 으레 등장하는 제작사의 로고들이 등장하기 전 레오 까락스의 음성이 먼저 들려온다. 야유나 박수 같은 반응은 물론 하품과 방귀 같은 생리현상, 심지어 숨소리까지 금지하려는 폭력적인 경고와 함께 숨을 참는 관객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화면이 등장하면 녹음실에 앉아 있는 레오 까락스가 보인다. 녹음 부스 안에는 영화의 음악감독 스파크스(Sparks)가 있다. <아네트>의 첫 노래 “So May We Start?”가 시작되면 스파크스와 코러스 보컬은 녹음실 바깥으로 나간다. 각각 헨리, 안, 작곡가로 출연하는 아담 드라이버와 마리옹 꼬띠아르, 사이먼 헬버그가 대열에 합류하고, 레오 까락스 또한 동참한다. 오프닝 크레딧은 화면 속 인물이 누구인지 알려주듯 각 인물의 등장에 맞춰 나타난다. 아담 드라이버와 마리옹 꼬띠아르는 연기를 준비하는 배우처럼 누군가가 건네주는 의상을 받아 입는다. 모든 이들이 무릎을 꿇고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을 끝으로 롱테이크가 마무리되고, 두 주연배우는 자신의 배역이 되어 떠난다. <아네트>의 오프닝 시퀀스는 철저히 반(反)뮤지컬적이다. 헨리와 안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에도 <아네트>는 계속하여 ‘영화적’이길 거부한다. 길에서 촬영되지 않았음이 느껴지는 뉴스 장면, 영화 밖 현실에서 벌어진 캘리포니아 산불 뉴스와 대비되는 화사한 창밖 풍경, 파도를 비추는 거대한 스크린을 뒤로 한 요트 세트, 인형으로 태어난 아네트 등등… 때문에 <아네트>는 스타 코미디언 헨리 맥헨리의 어처구니없게도 지루한 스탠드업 코미디 쇼 [신의 유인원]이 관객에서 웃기를 요구하는 것처럼, 혹은 ‘스타 코미디언’인 자신을 설명해내려는 것처럼 작동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다시 말해 뮤지컬적이지도 영화적이지도 않은 장면과 세부들을 빼곡히 밀어 넣은 뒤, 그럼에도 이것이 영화로 성립하고 있다고 까락스는 말하는 듯하다. 까락스의 전작 <홀리 모터스>는 영화의 존재방식에 대한 고찰이었다. <아네트>는 그것을 한편의 영화로 통합하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가 어떻게 찍히고, 편집되고, 이미지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홀리 모터스>라면, <아네트>는 붕괴와 성립을 반복하는 모순적인 이미지 덩어리다.

6. <카우> 안드레아 아놀드 2021

 영화는 영국의 어느 축사에서 살아가는 젖소 루마와 그가 출산한 새끼소의 일생을 쫓는다. 제목을 제외하면 영화의 내용을 설명하는 자막도 등장하지 않는다. 빅토르 코사코프스키의 <군다>가 그랬던 것처럼, <카우>는 계속해서 젖소의 삶을 카메라에 담아낼 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카메라의 위치다. 카메라는 축사의 다른 소가 루마를 지켜보는 것처럼 소의 눈높이에 맞춰진 핸드헬드를 보여준다. 종종 젖소들과 부딪히기도 하는 카메라는 인간의 시점을 최대한 배제하려는 것만 같다. 때문에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아이들을 담아낸 윤가은의 <우리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들>이 그 눈높이를 통해 공감을 유도했다면, <카우>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아이들의 눈높이를 가져보았지만 젖소의 눈높이를 경험해본 적은 없다. 공감, 연민, 동정은 이 영화의 목적이 아니다. 물론 평생을 축사에서 보내며 우유와 새끼소를 생산하는 루마의 삶과 대비되는, 개방된 공간에서 달리며 살아가는 새끼소의 모습을 통해 공장식 축산업에 대한 비판을 가하긴 한다. 다만 그 도구로 공감, 연민, 동정을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오히려 이 영화는 인간과 소의 차이를 인간과 자연의 대립구도로 놓지 않는다. 농장의 상품이자 소유물인 루마는, 마치 픽사의 영화 속 비인간 주인공들처럼, 하나의 캐릭터로 등장하지만 인격화되지 않는다. 동시에 루마가 비인간 동물이라고 해서 자연으로 표상되는 것도 아니다. 루마가 새끼소를 낳자마자 젖을 짜게 되고, 새끼에게 직접 젖을 물리는 대신 인간이 젖병을 통해 새끼소에게 우유를 먹이는 장면은 축사의 모든 존재가 인위적인 존재임을 드러낸다. <아메리칸 허니> 같은 안드레아 아놀드의 전작들이 자연의 풍광 속에서 같은 길을 반복적으로 돌아가는 인간들의 이야기였다면, <카우>는 인위성 속에서 반복되는 길을 평생 오가는 젖소의 이야기다. 영화 속 카메라는 젖소의 눈높이를 종종 벗어나기도 하지만 이내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길 반복한다. 카메라의 시선이 젖소의 눈높이를 벗어나는 순간은 루마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뿐이다. CCTV 화면처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지극히 인위적인 그 시선은 평생을 축사에서 보내는 루마와 그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농장 직원을 동일선상에 위치시킨다. 그 순간 하나만으로, <카우>는 비인간 존재를 어떻게 촬영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에 가장 가까운 영화가 된다.

7. <파편> 나탈리아 가라얄데 2020

 영화의 감독이자 주인공인 나탈리아 가라샬데와 그의 가족이 8mm 캠코더로 촬영한 홈비디오 푸티지들로 구성된 다큐멘터리. 1995년 아르헨티나 리오테르세르 군수품 공장이 폭발하여 도시가 초토화되고, 7명의 사망자와 2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지만 아무도 처벌받지 않은 당시의 사건을 재구성하는 작품이다. 재난과 국가폭력이 겹치는 영역에 놓인 사건을 사적인 기록과 기억을 통해 접근한다는 점에서 김응수가 만든 두 편의 세월호 영화나 주현숙의 <당신의 사월>이 떠오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홈비디오라는 매체를 사용함으로써, 지난달 콜리그를 통해 공개된 나의 글 [기억의 조건(들)](https://colleague.co.kr/forum/view/483428)에서 이야기한 국내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홈비디오 푸티지를 활용한 방법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파편>은 이러한 내용적 형식과 매체적 형식의 화학작용이 매우 흥미로운 방식으로 드러난 사례다. 감독과 그의 가족이 겪은 사적인 기록들은 재난의 상황과 국가폭력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소위 '사적 다큐멘터리'라 불리는 영화들이 액티비즘이나 더 큰 사회를 논의하는 것으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이라는 단어가 그 작품들의 함의를 폄훼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었다는 의심이다. 다시금 <파편>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영화는 홈비디오의 재편집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매체를 주요한 방법론으로 채택하였으나, 그것은 처음부터 액티비즘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김응수의 <오, 사랑>이 사건 자체와 관련 없어 보이는 이의 내레이션과 동선을 통해 사건 자체에 다가가는 역동을 담아낸다면, <파편>은 처음부터 사건의 중심부에 위치한 인물이 기록해낸 것이 근본적으로 지닌 역동 자체에 대한 것이다. 특히 사건 당시를 직접 촬영한 장면에선 동일본 대지진이나 작년 베이루트에서 있었던 폭발사고 당시 개인들이 SNS에 공유한 영상들을 연상시킨다. 사건의 가장 근본적인 기록, 증거, 기억으로서 존재하는 영상들은, 사적인 매체와 채널을 통해 생성된 것이지만 동시에 근본적으로 그것을 초과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음을, <파편>은 증명한다

8. <프랑스> 브루노 뒤몽 2021

 <잔 다르크> 연작 이후, 현재로 시간대를 옮긴 브루노 뒤몽의 <프랑스>는 다소 미니멀하게 꾸려진 두 전작이 비해 큰 스케일을 선보인다. 주인공은 레아 세이두가 연기하는 스타 배우 못지 않은 인기를 구사하고 있는 TV 저널리스트 프랑스 드 뫼르, 영화 시작부터 마크롱 대통령에게 곤란한 질문을 던지며 다른 언론과 시민들의 이목을 끄는 그는 중동의 분쟁지역을 직접 취재하며 유명세를 이어간다. 파리, 중동 분쟁지역, 알프스 등을 바쁘게 오가는 영화는 추락과 재기를 반복하는 드 뫼르의 삶을 보여준다. 그의 삶은 연출된 뉴스의 연속이다. 그가 중동 분쟁지역을 취재하는 장면은 실재 벌어진 사건을 담아냄과 동시에 그것이 상당히 연출된 장면임을 보여준다. 취재 영상에 영화 주인공처럼 등장하는 드 뫼르의 모습은 그 스스로가 취재 영상의 주연이자 감독임을 증명하는 것만 같다. 이는 영화의 역사 중 적지 않은 기간 동안 뉴스릴이 영화의 한 장르로 생산되었음을 상기시킨다. 이를 더욱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것은 취재 영상 이외의 장면들이다. <프랑스>에는 현장과 스튜디오에서 촬영된 TV 뉴스 영상 뿐 아니라 드론이나 액션캠을 종종 사용한다. 드 뫼르의 취재진이 드론 폭격 지역에 가 있는 동안 폭격용 드론이 아닌 드론의 시선으로 촬영된 취재진이 화면에 등장하고, 드 뫼르의 남편과 아들이 해안도로를 따라 이동하던 중 사고가 나는 장면에 사용된 수많은 액션캠 숏들은 사고 자체를 잘 담아내는 것보다 카메라의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만 같다. 더욱이 해당 장면이 스튜디오에서 촬영된 것임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자동차 탑승 장면들의 스크린 프로세스는 종종 자동차라는 물리적인 벽을 무시해버린다. 누군가는 자동차의 문이 없는 것처럼 차에 들어오기도 하고, 분명 지붕이 있던 자동차의 지붕이 사라진 것만 같은 숏이 등장하기도 한다. 촬영상의 실수라기엔 너무나도 자주 반복되는 이 장면들은 드 뫼르가 영화처럼 연출해낸 취재영상 위로 <프랑스>라는 영화 자체를 겹쳐보이게끔 유도한다. 카메라를 무기이자 수익수단으로 사용하는 이 또한 자신을 대상으로 한 카메라들이 구성하는 시각장의 권력 앞에 무릎 꿇는다. 카메라로 성공한 그는 카메라로 인해 추락하고 카메라를 통해 재기한다. <프랑스>는 뒤몽의 근작들에 비해 스펙터클하다지만 여전히 (끈적거린다 느껴질 정도로) 느리게,  현대의 잔(Jeane)이자 시지프스인 드 뫼르를 쫓는다.

9. <프리 가이> 숀 레비 2021

 <프리 가이>는 그간 게임을 다뤄온 수많은 영화와 유사한 것처럼 다가온다. 가령 <슈퍼 소닉>이나 <몬스터 헌터> 같은 게임 원작 영화부터 <레디 플레이어 원>처럼 게임의 가상 세계를 다룬 영화, 게이머들의 이야기를 담은 <내언니전지현과 나>와 같은 다큐멘터리까지. NPC가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프리 가이>는 <주먹왕 랄프>처럼 게이머가 아니라 게임 캐릭터의 이야기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프리 가이>는 게임 플레이가 다변화된 상황을 썩 훌륭하게 다뤄낸다. 가이는 타임루프처럼 반복되는 NPC의 삶에서 벗어난 뒤, 첫눈에 사랑에 빠진 밀리에게 다가가기 위해 ‘레벨업 노가다’를 시작한다. 그 방식은 다른 플레이어들처럼 폭력적인 미션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폭력을 막아냄으로써 미션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이는 밀리를 비롯한 게이머와 운영자 앤트완 뿐 아니라 여러 트위치 스트리머, 유튜버의 주목을 받게 된다. 가이의 행동은 실시간으로 스트리밍되고, 편집되어 유튜브에 올라가고, 하나의 밈이 된다. 영화의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가이의 존재는 밀리와 앤트완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즉, 가이의 존재는 그 자체로 동시대 게임 플레이의 집대성이다. 가이의 비폭력적인 플레이를 통해 <프리 가이>가 폭력적인 게임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았다는 평가는 이 영화의 많은 부분을 놓치는 것이다. NPC의 일과를 쫓는 초반부가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NPC와 상호작용하는 부분을 재치 있게 선보인다면, 가이가 NPC에서 벗어난 자아를 얻게 되는 순간부터는 그 또한 한 명의 플레이어로서 흥미로운 게임 플레이를 보여주는 존재가 된다. 그의 플레이에 열광하는 이들은 그를 따라 하고 돕는다. 가이는 NPC임과 동시에 플레이어로서 플레이어, 다른 플레이어, 그리고 게임 사이의 소통과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존재가 된다. “자아를 얻은 NPC”를 만들어낸 게임개발자는 <레디 플레이어 원>의 할리데이와는 다르게 자신을 창조주로 여기지도, 자신이 많은 가상 세계의 신이 되지도 않는다. 그 또한 한 명의 게이머로서 자신이 원하는 게임을 만들고 게임의 NPC를 자신과 동등한 플레이어로 제작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 <프리 가이>는 자신이 온라인에서 마주치는 모든 존재를 동등하게 대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메타버스라는 용어는 잠시 뒤로 미뤄두자. <프리 가이>는 모두가 언제나 온라인에 접속해 있는 시대의, 디지털 원주민(Digital Native) 세대의, 이른바 ‘자동 로그인된 세대’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의 게임 플레이는 무엇인지에 관한 화두를 던진다.

10. <테라 팜므> 코트니 스티븐스 2021

 <테라 팜므>의 초반부에서 감독은 자신이 병으로 인해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될 뻔 했다고 언급한다. 무작정 인도로 떠난 감독은 그곳에서의 여행을 카메라에 담지만, 그가 보기에 자신의 숏은 1920~40년대 여성들이 촬영한 홈 무비 속 여행 푸티지에 비해 부족하게 느껴진다. 침몰하는 신체는 자신이 담을 수 없던 숏을 과거의 여성들이 담아냈음을 확인하고, 아카이브를 통해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한다. 이 여행은 당시 여성들이 촬영한 이미지에 대해 계급, 제국주의 등이 개입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여성이 카메라를 잡았기에 그들의 홈 무비들이 여성적 응시/시선을 보여줄 것이란 생각을 뒤집는 부분이다. 이들은 같은 곳을 여행했을 때 같은 방식으로 그곳을 촬영했다. 그 시선은 지금의 페미니즘/퀴어 영화들이 담아내는 여성적 응시와는 관련없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여행이 (물론 상류층의 전유물인 해외여행이 중산층에게까지 확대되었지만) 보편적인 것은 아니던 시기, 카메라를 챙겨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계급적인 행위다. 물론 <테라 팜므>는 그러한 행위가 계급적이며 제국주의적이라 비판하는 영화가 아니다. <테라 팜므>는 100여년 전의 일상적인 여행의 기록을 2021년의 시점에서 해석함에 있어서 충만함을 더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코트니 스티븐스는 이 영상들을 통해 시공간을 여행한다. 여행은 여행자가 도달한 공간에 대한 일종의 해석행위다. 그의 여행에 즐거운 마음으로 동참하자.


+그밖에 기억에 남는 영화들

<티탄> 쥘리아 뒤쿠르노 2021

<파워 오브 도그> 제인 캠피온 2021

<다함께 여름!> 기욤 브락 2020

<프렌치 디스패치> 웨스 앤더슨 2021

<메모리아>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2021

<북스마트> 올리비아 와일드 2019

<새드 필름> 바실리 2021

<지오라마 보이 파노라마 걸> 세타 나츠키 2020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안노 히데아키, 츠루마키 카즈야, 나카야마 카츠이치 2021

<젠더레이션> 모니카 트로이트 2021

<말을 타는 모습을 보여주는 36가지 방법은 없다> 니콜라스 주커필드 2020

<매트릭스: 리저렉션> 라나 워쇼스키 2021

<크라이 마초> 클린트 이스트우드 2021

<미나마타 만다라> 하라 카즈오 2020

<스트라툼 2> 충펑 2021

<팜 스프링스> 맥스 바르바코우 2020

<잘리카투> 리조 조세 펠리세리 2019

<트레인 어게인> 피터 체르카스키 2021

<말리그넌트> 제임스 완 2021

<일 부코>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 2021

<루치오를 위하여> 피에트로 마르첼로 2021

<베네데타> 폴 버호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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