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한 당신들에게> 김태양, 이종수, 손구용, 이미랑 2025
문주화 영화평론가의 기획을 통해 진행된,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의 유일한 작품 <미망인>(1955)의 유실된 결말을 상상한 네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옴니버스 영화. 처음에는 극장이 아닌 전시를 통해 공개되었다. 김태양의 <무관한 당신들에게>는 <미망인> 후반부의 장면과 <미망인>을 언급하는 감독의 작품(장편 <미망> 속 두 번째 에피소드로, <서울극장>이라는 단편으로 사전에 공개됐었음)을 교차편집한다. 이종수의 <이신자(異晨者)>는 바뀐 한자 이름(본래 <미망인>의 주인공 이신자의 한자 이름은 李信子다)처럼 이신자가 칼을 고르는 장면을 통해 극의 분위기를 변화시킨다. 본래 서로 마주 본 스크린을 통한 2채널 작업으로 구성된 손구용의 <보이지 않는 얼굴(들)>은 마주하지만 마주하지 못하는 두 인물의 동선을 뒤쫓는다. 이미랑의 <미망인: 다시 맺음>은 '아프레걸' 이신자에게 합당한 결말을 부여하길 시도한다. 한국영화사의 기념비적인, 하지만 필름의 마지막 릴이 유실되어 결말을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영화의 끝을 상상하고 재구성한다는 기획은 분명 흥미롭다. 누군가는 그것을 지금의 조건(자신의 전작이나 2채널 영상)을 통해 에세이나 구조영화 속에 위치시키고자 하고, 누군가는 문자 그대로 유실된 장면 속에 담겼기를 소망하는 이미지를 재현한다. 사실 그 정도의 차이, 네 감독이 얼마나 다르게 영화를 만들고 있으며 그것이 러닝타임 50분의 '극장용' 옴니버스로 묶였을 때 서로 강하게 불화한다는 지점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굿 럭> 아다치 신 2024
찌질한 영화감독 타로는 여자친구에게 의지하며 생활을 이어간다. 어느 날 여자친구를 찍은 단편 다큐멘터리가 영화제에 가작으로 선정되고, 영화제에 방문하길 꺼리던 그는 여자친구의 말을 듣고 뱃푸로 향한다. GV를 진행하던 극장 관계자는 타로의 영화를 매몰차게 힐난한다. 상심하여 숙소에 돌아간 그는 우연히 자신의 영화를 본 미키라는 여성을 만나고, 두 사람은 얼떨결에 함께 짧은 여행을 하게 된다. 영화 속에서 두 사람이 말하듯 <비포 선라이즈>의 두 주인공처럼 말이다. <굿 럭>의 흥미로운 점이랄까, 타로를 제외하면 그와 교류하는 대부분의 캐릭터는 여성이다. 그를 무조건 지지하는 여자친구, 어딘가 엉뚱한 표정과 말투로 동행을 요청하는 미키, 영화의 구림과 감독의 찌질함을 지적하는 모더레이터, 거의 귀신과 같은 인상을 주는 여관 주인 등, 이 영화는 타로와 타로를 둘러싼 여성들로 구성되어 있다. 중년의 나이의 남성감독이 만든 작품이지만, <굿 럭>이 그려내는 남성 주인공과 여성들 사이의 관계는 어딘가 <체인소 맨>을 비롯한 최근의 일본 콘텐츠에서 목격되는 남성성과 그것을 둘러싼 여성들의 구도를 연상시킨다. 지금의 '일본 남성'이라는 대상은 이렇게만 묘사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얼마 전 카페크리틱에서 <태풍클럽>을 다루며 비슷한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집으로> 차이밍량 2025
차이밍량과는 <데이즈>부터 함께 작업한 라오스 출신의 배우 아농 호웅흐앙시가 고향으로 향한다. 차이밍량은 카메라를 들고 이 길에 동참한다. 버스에서 시작한 영화는 아농의 집이 있는 라오스의 시골에서 마무리된다. 아무런 각본도, 사건도, 이야기도 없이, 영화는 아농의 여행길을 쫓을 뿐이다. 차이밍량의 카메라가 담아낸 것들은 그 길의 풍경이다. 오랜 기간 행자(行者) 시리즈를 이어오던 그와 이강생은 이동의 행위를 하나의 영적 수행으로 탈바꿈시켰었다. 하지만 <집으로>에서의 이동은 그러한 수행과는 거리가 멀다. 국경을 넘어 고향을 방문하는 이민자, 그의 발걸음을 따라 마주하게 되는 풍경과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 영화는 문자 그대로 '해맑게' 그것을 담아낸다. 차이밍량이 <집으로>에서 찍고 싶었던 것은 한없이 맑고 밝은 평화가 아니었을까.
<힌드의 목소리> 카우타르 벤 하니야 2025
2024년 1월 29일 오후, 팔레스타인 적신월사에 전화가 걸려온다. 전화를 건 사람은 만 5세의 소녀 힌드 라잡, 친척들과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이스라엘 점령군의 총격을 받았다. 친척들이 학살당한 차 안에 숨어 구조 전화를 건 힌드를 구조하기 위해 적신월사 직원들은 고군분투한다. 힌드의 목소리는 소셜미디어를 타고 생중계에 가깝게 전 세계에 퍼졌다. 힌드의 사진은 팔레스타인 해방에 연대하는 이들의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힌드의 목소리>는 이스라엘의 민간인 학살이 극적으로 드러난 한 사건을 영화로 옮겨왔다. 다만 이번 영화의 감독인 카우타르 벤 하니야는 전작 <올파의 딸들>에 비해 '고용감독'처럼 느껴진다. 오프닝 크레딧에서 그의 이름에 앞서 등장하는 할리우드 스타 감독과 배우들(알폰소 쿠아론, 조너선 글레이저, 루니 마라, 호아킨 피닉스, 그리고 브래드 피트와 플랜B가 제작자로 이름을 올렸다)의 이름은 강력한 무게감을 가진다. <올파의 딸들>이 튀니지의 이슬람 가부장제에 관한 다큐-픽션이자 일종의 연극치료였던 것과 유사하게, <힌드의 목소리> 또한 힌드와 적신월사 직원의 실제 통화 녹음을 사용하며 경계를 흐리는 전략을 택한다. 다만 영화의 카메라는 적신월사 사무실을 벗어나지 않는다. 카메라는 힌드가 있는 처참한 학살의 현장으로 향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은 적신월사 직원들의 감정, 그들이 느끼는 분노와 답답함, 무기력과 책임감에 동기화된다. 힌드 라잡을 비롯해 이스라엘에 의해 살해당한 민간인 세 가족을 중심으로 구성된 알자지라의 다큐멘터리 <끝나지 않는 밤>(The Night Won't End,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CFpW5zoFXA)가 현장을 다각도로 재구성하며 이스라엘의 제노사이드와 전쟁범죄를 생생하게 목격하게끔 했다면, <힌드의 목소리는 (마치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그랬던 것처럼) 모종의 윤리적 거리를 유지하려는 제스처를 취한다. 실제로 힌드 라잡의 목소리와 사건 현장이 묘사된 (사진이 아니다) 글이 한국 트위터에서 리트윗 될 때, 적나라한 현장을 묘사하는 것에 대한 윤리적 문제에 대한 지적이 이어졌다. 나는 그러한 지적이 불필요한 순간이 존재하며, 그것이 팔레스타인을 비롯해 제노사이드, 내란, 내전, 학살을 겪는 지금의 세계 곳곳에 요구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힌드의 목소리>는 지극히 우회적인 방식으로 힌드 라잡 살해 사건을 다룬다. 영화는 관객이 학살당하는 힌드와 그의 가족이 아니라 그를 구하지 못한 적신월사 직원들에 동일시하게끔 구성되었다. 물론 그것은 전 세계 관객을 타겟으로 한 영화의 특성상 외부인의 시점과 가장 맞닿아 있는 인물의 시점을 택한 전략일테다. 그 결과물은 힌드 라잡 살해 사건을 다룸에 있어 이미지의 '위생학'을 윤리적 방어막으로 사용하는 전략에 다름없다. 다시 말해,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사진으로 남은 힌드 라잡의 과거이지 이스라엘 점령군에 의해 삭제당한 그의 미래가 아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힌드의 목소리>는 오프닝 크레딧에 등장하는 무수한 이름들의 무게감에 힘입은, 모범적인 캠페인 영화이자 임팩트 시네마다. 영화는 동시대에 요구되는 자신의 쓸모를 잘 알고 있고, 그 쓸모에 자신을 투신한다. <힌드의 목소리>는 자신이 수행하고자 하는 캠페인에 필요한 요소들, 정보가 부족한 관객을 위한 친절한 설명(유리벽에 마커로 도표를 그리며 설명적 대사를 내뱉는 적신월사 직원과 같은),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야 할 사건, '임팩트'를 더할 수 있는 이름, 최신의 영화 기교와 스토리텔링, 그리고 플랫폼(베니스영화제에서의 수상은 <힌드의 목소리>가 수행하고자 하는 캠페인을 위한 최고의 플랫폼이었으며, 아마도 오스카 국제영화상 수상이 마지막이 될테다). 나는 이 영화가 몇 년 뒤에도 영화적 가치를 지닌 작품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힌드의 목소리>에 요구되는 지금의 쓸모가 빠르게 소진되길 바랄 뿐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제노사이드를 멈추고, 팔레스타인 해방이 이루어진 순간일 테니까.
<충충충> 한창록 2025
엄마와 떨어져 홀로 살아가는 고등학생 용기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지숙을 흠모한다. 어느 날, 훤칠한 외모의 국가대표 유도선수 우주가 전학을 오고, 지숙은 우주에게 반한다. 하지만 우주는 지숙을 포함한 여학생들을 그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성적 상대로만 보고, 용기는 그러한 우주로부터 지숙을 구하고자 한다. <충충충>은 '찐따' 고등학생 용기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건 더이상 '잉여'도 아니고 '벌레(충)' 취급을 받는 지금 세대의 잉여인간들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관점을 영화 내적인 구성으로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 장선우의 <나쁜 영화>가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을 통해 사회적 도덕성(혹은 윤리)에서 탈피한 청소년들을 담아냈던 것처럼, 혹은 이응일의 <불청객>이 '디씨인사이드'라는 플랫폼을 경유해 2000년대 '88만원 세대'와 '잉여인간' 담론을 흥미롭게 극화했던 것처럼, 그간 한국영화에서 밑바닥 인생 청소년을 그려낸 영화들의 선구적인 시도들이 있어왔다. 아쉽게도 <충충충>은 소셜미디어, 딥페이크, 스트리밍, 보이스채팅, 넷카마 등 지금의 청소년이 놓인 미디어환경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개별적인 에피소드의 소재로만 끌어올 뿐 하나의 전체로 엮어내는 데 실패한다. 애정에 기반한 용기의 행적을 뒤쫓는 영화는 영화 속 사건들이 실제 사건들을 모티프 삼은 것이라 밝힌다. 다만 그것으로 족한가? <충충충>의 의도된 산만함은 여러 방향으로 에너지를 발산하지만 (이환 감독의 영화들이 그러했듯) 그것의 뚜렷한 방향을 설정하는 데 실패한다.
<지느러미> 박세영 2025
오랜 기간 추가촬영과 후반작업을 거쳐 공개된 박세영의 새 장편영화. <지느러미>는 통일 한국을 배경으로, 자세한 설명은 나오지 않지만 (아마 핵전쟁 여파일 듯한) 오염으로 인해 발생한 돌연변이 물고기 인간 '오메가'들에게 해안의 오염물질 제거를 일종의 노역으로 부과하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이다. 영화는 오메가라는 돌연변이 인간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혐오를, 오메가 관리국의 신입 직원 수진, 비밀리에 운영되는 실내 낚시터 직원 미아, 죽은 동료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장벽을 넘어 도시로 넘어온 오메가, 세 사람의 이야기로 풀어낸다. 전작 <다섯 번째 흉추>나 <기지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어딘가 기괴하게 멸망한 (혹은 멸망을 향해 나아가는 듯한 존재들) 세계가 등장하는 <지느러미> 또한 박세영 특유의 거친 질감과 어두우면서도 강렬한 색감을 통해 표현된다. 비교적 단순한 내러티브를 직선적으로 밀고 나갔던 단편 극영화와 달리 앞선 두 편의 장편 극영화에서 스토리텔링의 불친절함을 되려 내러티브의 징검다리로 사용했던 것처럼, <지느러미> 또한 감각의 덩어리들을 제시하는 것으로 스토리텔링을 갈음하는 시도를 선보인다. 여기에는 <지느러미>가 세팅해둔 세계관이 (명확히 설명되는 부분이 많지 않음에도) 나름의 정합성을 가지고 작동한다는 점에서 전작들과 차별화된 지점이 발생한다. 이 영화의 세계-짓기(worldbuilding)는 타 종족에 대한 차별과 혐오라는 포인트를 다양한 감각의 덩어리, 이를테면 오프닝 시퀀스에서 철벅철벅 걸어다니는 오메가들, 북한 선전물을 닮은 통일 한국의 선전물들,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공통적으로 묻어 있는 검은 때, 친-오메가 시위대와 반-오메가 시위대의 충돌과 같은 순간들이나 이미지적으로 두드러지는 요소들을 통해 기능한다. 여기에는 그 요소들이 우리가 영화 바깥에서 봐온 것들의 SF적 변용이라는 점이 한 몫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지느러미>는 다소간 판타지에 가까웠던 앞선 두 장편보다는, 되려 우리의 현실을 새로운 세계에 이식한 모습을 선사한다.
<단지, 우리가 잠시 머무는 곳> 왕민철 2025
각각 동물원과 야생동물 구조대를 다룬 두 편의 전작에서 왕민철은 사람과 동물 사이의 비중이 균형 있게 담기기를 꾸준히 고민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영화들이 최근의 무빙이미지나 실험영화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비인간 존재로서 동물을 담아내거나 탈인간적 관점을 위한 시도를 보여준다던가 했던 것은 아니다. 왕민철의 영화에서 핵심은 동물을 상대하는 '인간'이었고, 그렇기에 그의 영화는 수의사, 사육사, 야생동물 구조대원, 동물권 활동가 등을 담아냈다. 본작 <단지, 우리가 잠시 머무는 곳>은 그의 전작에도 출연한 최태규 수의사를 주축으로 2018년 설립된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의 구성원들을 중심으로 삼는다. 2021년 화천의 곰 농장을 매입하고 이곳을 임시적 생츄어리 삼아 사육곰을 보호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는 이들의 사계절이 영화에 담긴다. 그의 전작들은 동물권이라는 공통된 주제 하에 치열한 논의가 요구되는 주제를 직시해왔다. 동물원은 전시를 위한 공간인가, 보존과 보호의 공간이 될 수도 있는가? 야생동물 구조라는 활동의 범주는 어떻게 정해질 수 있는가? <단지, 우리가 잠시 머무는 곳>은 곰 생츄어리를 두고 그와 같은 치열한 논의를 벌이지 않는다. 이번 영화는 그러한 논의를 고민하는, 정의, 열정, 복지, 사랑과 같은 대의를 명분으로 자신의 몸과 시간을 활동에 투여하는 활동가들이 주인공이다.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의 활동가들은 자신의 활동이 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경력으로 자리잡을지 알지 못한다. 수의사나 간호사 등 전문성을 갖추지 않은 채 활동에 뛰어든 이들에게, 다양한 직무를 일당백으로 수행하며 곰을 돌보는 업무는 특정 카테고리의 경력으로 쉬이 인정받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이들은 왜 곰을 돌보는가? 정답이 없는 질문 앞에서 고민하는 활동가들을 왕민철의 카메라는 담아낸다. 영화가 직접적으로 다루는 대상은 아니지만, 이 영화를 보며 지난 몇 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동물권단체 카라의 노조파괴와 그에 맞서는 노조원들의 투쟁이 스쳐지나간다. 활동가는 어떤 존재인가? 활동가와 노동자, 돌봄제공자와 피돌봄자, 대립항인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단어들의 조합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영화.
단편 몇 편과 독립영화 아카이브, 프로그램노트를 쓰거나 모더레이터를 했던 영화도 봤지만 이런저런 일이 밀려 후기는 여기까지... 여러 일정도 겹치고 체력 관리에도 실패해서 보려던 영화 네댓 편을 놓쳤더니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 하나 덧붙이자면, 올해 트레일러는 정말 다방면으로 최악이었다. 영화 상영 직전 관람에 대한 의지를 꺾어버릴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