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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y 25. 2017

감옥이 빚은 사람

자크 오디아르의 황금종려상 수상작 <예언자>

 아랍계 프랑스인 말리크 엘 제베나(타하르 라힘)는 19살에 6년 형을 선고받고 감옥으로 들어온다. 교도관이 그에게 건네는 질문들(“돈 부쳐줄 사람은 있고?” “없습니다” 등)은 친구도 가족도 원수도 없는 백지상태인 그의 과거를 짐작하게 한다. 감옥의 실세를 쥔 코르시카계 범죄자 세자르 루치아노(닐스 아르스트럽)는 그에게 레예브라는 사람을 죽이면 그의 뒤를 봐주겠다는 반강제의 제안을 한다. 두려움 속에서 그를 죽이고 세자르의 심복이 된 말리크는 교도소 안의 생리를 파악해가면서 점점 성장한다. 

 <예언자>는 감옥을 배경으로 한 흔한 갱스터 영화의 서사를 따르는 듯하다. 젊은 주인공이 감옥에 들어서고, 그곳의 실세를 쥐고 있는 사람과 접촉해 온갖 더러운 일을 하면서 신뢰를 쌓고, 결국 돈과 권력을 쥐고 마는 서사. <예언자>의 서사는 이러한 클리셰를 그대로 따라간다. 그러나 영화가 묘사하는 말리크의 모습은 조금 다르다. 말리크는 두려워하지만 죄의식을 갖지는 않는다. 레예브를 죽인 이후, 레예브는 환영으로, 꿈으로 말리크 앞에 여러 차례 나타나지만 그를 다독여주는 친구 혹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손가락에 불을 켜고 아무도 챙기지 않던 그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어느 순간엔 함께 춤을 추기도 한다. 처음엔 “자신의 성기를 빨면 대마초를 구할 돈을 주겠다”라고 말하던 레예브지만, 까막눈인 말리크에게 교도소 내에 학교가 있고 글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말한 것 도한 레예브이다. 환영으로 나타난레예브는 말리크에게 사죄를 요구하지도 않고 말리크 역시 그럴 생각도 없어 보인다. 155분의 러닝타임 동안 놀랍도록 이성적인 판단만을 내리는 말리크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로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성기로 시작해 글, 교육, 격려로 이어지는 레예브와 그를 죽이는 말리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흔한 재현처럼 보이지만, 죄의식을 걷어낸 채 재등장하는 레예브의 모습은 이를 뒤집는다.

 코르시카인 밑에서 일하는 아랍인이라는 설정은 인종적 함의를 품은 듯 보인다. 하지만 영화가 담아내는 인종적 코드는 단순한 편 가르기 수준에 그친다. 의도적으로 인종에 대한 이야기들을 배제한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자막으로 캐릭터 한 명 한 명의 이름과 인종을 호명하지만, 결과적으로 인종적인 측면은 한 인물을 호명하는 데 사용될 뿐이다. 영화에서의 인종은 “저기 키 큰 애” 정도의 호칭처럼 기능한다. 아랍인이지만 무슬림이 아니고, 돼지고기를 먹는 백지상태의 말리크에서부터 인종에 대한 이야기는 <예언자>의 이야기가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그만큼 백지상태의 인물이 감옥에 던져졌을 때의 이야기를 강조하기 위한 지점이었을까? 교도소 내 학교에서 글을 배우고 경제학까지 공부하며 식견을 넓혀가는 말리크의 성장은 관객에게 뿌듯하게 다가오기까지 한다. 대부분의 장면에서 핸드헬드로 진행되면 촬영은 마지막 장면에서 픽스된 카메라의 시선으로 변한다. 교도소에서 걸어 나오는 말리크의 뒤로 그를 따르는 것으로 추정되는 검은 차들이 따라오는 것으로 영화가 마무리된다. 인종적 쟁점 속에 갇히지 않고, 교육받지도 못해 온전한 백지상태였던 그는 6년 간의 수감 생활을 통해 권력을 쥔 인물로 변모한다.

 <예언자>라는 제목은 마치 앞을 내다보는 것처럼 정확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말리크를 빗댄 것으로 보인다. 극 중 말리크가 실제로 앞을 내다 보고 행동한 것처럼 묘사되는 상황이 등장하기도 한다. 또는 환영으로 존재하는 레예브가 나타나 조금 뒤의 일을 일러주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러한 묘사는 당연하게도 말리크가 실제로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대신 명석하고 이성적인 그의 판단을 보여주는 예시랄까? 동물 주의 표지판을 발견하고 사슴이 다가오는 것을 경고하는 말리크의 모습은 좋은 관찰력과 판단력을 보여주는 예시로 작용한다. 생존에 대한 두려움은 품고 있지만, 감옥이라는 공간 안에서 생존을 위해 하나하나 판단을 내려가는 말리크의 모습은 그야말로 하룻강아지가 범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영화가 담아내는 그의 명석함과 인내력, 집중력을 보고 있자면 감옥에 오지 않았을 때의 말리크를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된다. 그가 부모님을 잃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아랍계라는 편견과 가난이라는 상황이 없었다면? 결국 말리크를 감옥으로 집어넣고 마지막 장면의 말리크로 재탄생시킨 것은 그를 둘러싼 상황이라는 결론으로 닿게 된다. 감옥은 마치 학교처럼 말리크를 사회화하고 생존법을 교육했다. 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 만들어내는 가장 큰 요인은 상황이다. 적어도 <예언자>의 말리크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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