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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n 09. 2017

여성도 액션도 잡지 못한 여성 원톱 액션 영화

김옥빈 주연의 액션 영화 <악녀>

 배급사와 제작사 로고가 지나가고, 휘파람 소리와 숨소리가 함께 들리며 영화가 시작한다. 문이 열리고, 1인칭의 화면 속으로 권총을 쥔 팔이 나타나 적들을 몰살한다. 권총부터 쌍칼, 도끼 등 다양한 무기들의 향연이 이어지고, 수많은 무기만큼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1인칭 시점으로 5분 가까이 이어지던 액션은 거울을 통해 1인칭 시점의 주인공 숙희(김옥빈)를 맞이하고 3인칭으로 바뀌어 액션을 이어간다. 100명에 가까운 적들을 죽인 숙희는 경찰에 체포된다. 국정원의 권숙(김서형)은 숙희와 같은 여성 암살자들을 스카우트해 10년간 헌신하면 자유를 주겠다고 이야기한다. 숙희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지시를 따르지만, 죽은 줄 알았던 전 남편이자 이전 조직의 보스 중상(신하균)이 나타나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여성 원톱 주연의 강렬한 액션 영화라는 점에서 뤽 배송의 <니키타> 나 조지 밀러의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가 떠오른다. 1인칭 시점을 활용한 액션 시퀀스는 영화 전체가 1인칭이었던 <하드코어 헨리>를연상시키며, 오프닝에서 등장하는 복도에서의 혈전은 가렛 에반스의 <레이드: 첫 번째 습격>이나 박찬욱의 <올드보이> 속 장도리 액션 시퀀스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밖에 없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숙희가 스나이퍼 라이플을 집어 든 장면에서는 <암살>의 안옥윤(전지현)이나 이두용의 <흑설>의 이미지가 겹쳐 보인다. 검은 옷을 입고 총기를 다루는 숙희의 모습은 <존 윅> 속 키아누 리브스의 모습을 연상시키시도 한다. 현수(성준) 캐릭터는 <차이나타운>의 석현(박보검) 캐릭터와 닮았다. <악녀>라는 제목은 김기영 감독이 다 완성하지 못하고 떠난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다. <우린 액션배우다>와 <내가 살인범이다>를연출했던 정병길 감독의 신작 <악녀>는 123분의 러닝타임 동안 수많은 영화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정말 아쉽게도, <악녀>는 앞서 언급한 영화들의 장점을 가져오는데 실패했다. 동시에 앞선 영화들의 단점이 <악녀>에서도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서울 액션스쿨 출신인 정병길 감독답게 액션에 대한 의욕이 넘친다. 예고편을 포함한 홍보 과정에서도 액션에 중점을 둔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악녀>는 다른 영화에서 이미 경험했던 것들을 답습하고 있을 뿐이며, 단점을 개선하지 못하고 재생산하고 있다. 가령 후반부 숙희와 중상의 칼싸움에서 자동차 추격전으로, 마을버스에서의 혈전으로 이어지는 액션 시퀀스는 1인칭과 3인칭을 넘나드는 10분가량의 롱테이크로 구성되어 있다. 숙희의 시점뿐만 아니라 중상의 시점까지 오가는 카메라는 현란하게 움직이고, ‘이렇게까지 카메라를 집어넣을 수 있어?’라는 놀라움을 가지게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런 현란함에 파묻혀 타격의 순간을 놓치고, 멀미 나도록 흔들리는 카메라는 배우의 액션 자체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 <악녀>를보고 나면 숙희가 영화 내내 펼친 액션의 동작보다 카메라의 현란함이 먼저 떠오른다. 이는 계속해서 움직이던 카메라가 정작 액션 자체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점을 오가느라 카메라가 움직여야 하기에 액션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이렇게 늘어지는 액션은 잘 짜인 액션 안무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게다가 1인칭임에도 관객이 액션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사방에서 적이 몰려들고 있고, 그들이 숙희를 공격할 시간은 벌어진 액션의 틈 사이에 충분히 존재하지만, 롱테이크와 1인칭 액션을 고수하기 위해 이를 무시하고 시퀀스가 진행된다. 액션을 이끌어가는 배우의 에너지는 스크린 밖으로 넘쳐흐를 정도이지만 그저 현란하기만 한 카메라는 이를 다 담지 못한다.

 그럼에도 번뜩이는 액션 시퀀스들은 존재한다. 가령 초반 5분 정도의 1인칭 시점이 끝나고 거울을 이용해 3인칭으로 넘어가는 순간의 아이디어는 신선하며 창의적이다. <하드코어 헨리>처럼 1인칭으로만 이끌어 나갈 영화가 아니기에 3인칭 시점으로 빠져나올 시점이 필요했는데, 그 타이밍에 대한 고민과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동시에 보여주는 장면이다. 숙희가 물병으로 자동차 엑셀을 고정시키고 도끼를 쥔 채 한 손으로 핸들을 운전하는 후반부 추격전의 아이디어 역시 훌륭하다. 굉장히 잔혹해진 <폴리스 스토리> 속 성룡의 2층 버스 액션을 보는 것 같다. 자동차의 앞뒤 양옆으로 바쁘게 오가는 와중에도 뚜렷하게 보이는 김옥빈의 표정은 액션 장면을 배우가 진심으로 즐기며 촬영했다는 것을 관객에게까지 전달한다. 그것에 대한 결과물 자체는 아쉽지만, 쌍칼을 휘두르는 김옥빈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김옥빈의 팬에겐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웨딩드레스를 입고 환풍기 구멍을 통해 라이플을 겨누고 있는 숙희의 이미지는 <악녀>의 가장 강렬한 이미지로 남는다. 

 사실 <악녀>의 가장 아쉬운 점은 (물론 아쉽긴 하지만) 액션이 아니다. 123분의 러닝타임이 액션 시퀀스들로 타이트하게 채워진 영화였다면 지금보다 만족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숙희와 중상의 관계, 숙희의 아버지를 죽인 사람에 대한 이야기, 숙희의 모성애, 숙희의 국정원 훈련과정, 숙희와 현수의 멜로드라마 등을 모두 한 영화에 집어넣으려다 보니 이야기는 물론 인물의 감정선까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다. 주인공읜 숙희의 감정선마저 들쭉날쭉한 상황인데, 영화는 현수와 중상의 감정선까지 담아내려 하니 이야기가 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나 성준이 연기한 현수 캐릭터는 그 존재 이유를 찾기 힘들다. 결혼식 장면을 넣기 위함이었던 것인지, 언더커버 남성 캐릭터를 넣고 싶다는 감독의 과욕이었는지, 숙희의 모성애를 강조해보려는 시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시선으로 현수 캐릭터를 바라보아도 실패한 캐릭터이다. <차이나타운>의 석현처럼 아이캔디 캐릭터의 미러링 정도로 존재했다면 오히려 더 깔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특히 현수와 숙희 사이에 애정이 생기는 과정을 그리는 장면은 마치 TV 드라마처럼 연출되어 지루하게만 느껴진다. 숙희와 중상의 관계를 담아내는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플래시백으로 둘의 과거를 그려내는 방식은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될 이야기까지 보여줌으로써 러닝타임을 연장시키기만 한다. 플래시백이 아닌 대사로 간단하게 넘어갈 수 있는 그들의 과거 이야기나,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는 정도의 이야기를 끝없는 플래시백으로 보여주는 방식은 <악녀>를 지루하게 만든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이다.

 이와 더불어 <악녀>의 이야기를 지루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는 악역의 부재이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를 생각해보면 악역의 부재가 영화를 얼마나 늘어지게 만드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두 영화는 거대한 액션 시퀀스로 영화의 포문을 연 뒤, 악역이 부재한 상태로 러닝타임의 3분의 2 정도를 흘려보낸다. 주인공 캐릭터의 목적이 명확하지 못한 채 러닝타임만 흘러가고 있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숙희의 복수의 대상이 누구인지, 국정원의 훈련부터 현수와 중상과 얽힌 이야기까지 진행되지만, 명확한 목적 없이 흘러가는 스토리는 따분하기만 하다. 불필요하게 많이 들어가 있는 현수의 이야기와 불필요한 플래시백으로 러닝타임만 잡아먹은 중상의 이야기를 덜어내고, 영화의 악역을 조금 더 빨리 드러내어 확실한 목적을 가진 숙희가 돌진하는 영화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의 아쉬운 점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악녀>는 제목에서부터 영화의 홍보에 이르기까지 여성 원톱 주연의 액션 영화로 홍보되었다. 여기에 김옥빈과 김서형이라는 캐스팅은 연기적으로나 비주얼적으로나 관객을 기대하게 만든다. 그리고 영화는 김옥빈과 김서형을 멋있게, 그것도 존나게 멋있게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 감독 스스로도 인정한 구린 대사들을 읊는 김서형을 보는 것은 아쉽긴 하지만, 이런 여성 캐릭터를 만나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대감이 치솟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악녀>는 여성이 없는 영화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는 몇 되지 않는다. 숙희, 권숙, 숙희의 딸인 은혜, 국정원에서 훈련받는 여성들, 은혜를 돌봐주는 아주머니들. 그들을 제외한 국정원 간부와 현수의 동료들, 숙희가 오프닝에서 몰살시키는 100여 명의 사람들과 중상의 조직원들, 단역으로만 등장하는 경찰마저도 모두가 남성이다. 다시 말해서 <악녀>는여성 원톱 영화이지만, 주인공과 관습적으로 등장하는 단역들을 제외하면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 작품처럼 느껴진다. 국정원에서 훈련을 받는 여성 킬러들의 수만 얼추 100여 명은 되어 보이는데, 어째서 밖의 악당들은 모조리 남성인 것일까? 국정원의 높으신 분들부터 여성혐오적 농담을 일삼는 말단 직원들까지 모두가 남성인 와중에 숙희와 권숙이 멋지다는 이유로 <악녀>를 여성을 내세운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현수와 중상의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 숙희의 감정선을 포기한 선택은 무엇을 위한 선택이었을까? 정병길 감독은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속 퓨리오사를 보고 숙희 캐릭터를 연상시켰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다. 그가 꽂힌 이야기는 그러한 멋진 여성의 이미지이지 여성 캐릭터의 서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악녀>라는 제목에 맞지 않게, 숙희는 영화 속에서 가장 선한 캐릭터처럼 느껴진다. 각자의 목적에 맞춰 숙희의 감정을 이용한 중상과 권숙에 비교하면 숙희는 전혀 악한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혼자서 조직 하나를 궤멸시키는 숙희의 모습은 안티 히어로처럼 느껴진다. 이름이 붙여진 영화 속 캐릭터에서 숙희보다 선한 캐릭터는 그의 딸인 은혜뿐이다. 사람을 죽이고 피를 뒤집어쓴 이미지만으로 악녀라는 제목을 붙여 놓고서, 모성애를 캐릭터 서사의 중심으로 정하는 것은 여성 캐릭터를 대하는 남성 창작자의 지루하고 게으른 발상으로만 느껴진다. 가부장제 중심 사회 속에서 자라난 모성애와 눈 앞에서 죽은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로만 쌓아 올려진, 수동적이기까지 한 캐릭터를 ‘악녀’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악녀>는 제목이 품게 하는 기대감을 전혀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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