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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l 12. 2017

겹겹이 쌓인 사회적 맥락의 공포

이란에서 온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어둠의 여인>

 영화가 시작되면 자막으로 이란의 상황이 설명된다. 이란-이라크의 전쟁이 한창인 1988년 테헤란, 쉬디(나제스 라쉬디)는 딸(아빈 만샤디)와 함께 아파트에 머무르고 있다. 데모 경력 때문에 복학을 거절당한 그는 같은 의대생인 남편(바비 나데리)과 다툰다. 곧 남편은 징집되고 쉬디는 딸과 단 둘이 남게 된다. 미사일 공습이 이어지며 다른 지역으로의 탈출을 고민하던 중, 딸의 인형은 자꾸만 사라지고 딸은 보이지 않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미사일이 떨어지면 유령이 나타난다는 옆집 여인의 말을 떠올린 쉬디는 유령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어둠의 여인>은 기본적으로 유령이 등장하는 하우스 호러의 형식을 취한다. 딸의 인형을 비롯해 쉬디의 비디오테이프 등이 사라지고, 딸이 보이지 않는 존재와 대화를 나누며, 금이 간 천장 사이로 무엇인가가 나왔다 들어가는 이미지는 여러 영화에서 여러 차례 반복된 장르 규칙이다. 하지만 <어둠의 여인>은 이런 단순한 트릭으로만 공포를 유발하는 영화가 아니다. 제니퍼 켄트의 <바바둑>이 육아와 가사노동의 공포를 하우스 호러에 녹여냈듯, 바박 안바리의 <어둠의 여인> 역시 육아와 가사노동을 호러에 녹여낸다. 여기에 문화혁명에 참여한 여성의 (극 중에선 학업과 관련된) 의식변화, 히잡 등 이슬람 여성 의복의 묘사를 통한 이슬람의 전통적 여성상이 주는 억압, 수없이 떨어지는 미사일의 이미지와 반복되는 방공호라는 공간 등 다양한 사회, 문화, 정치적 맥락이 공포의 요소로써 작용한다. 거대한 히잡을 쓴 얼굴 없는 여인의 이미지가 유령으로 등장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거대한 히잡이 쉬디와 딸을 감싸고 늪처럼 변해 발목을 잡는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이런 맥락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여성이라는 젠더는 억압으로 작용하고, 전쟁이라는 상황은 억압을 더욱 강화하여 보여준다. 

 영화의 배경을 설명하는 자막과 오프닝 크레딧이 지나가면 쉬디와 대학의 담당자가 상담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복학을 거절당하는 쉬디 옆의 창문으로 미사일이 떨어지고, 쉬디와 담당자 모두 한 번 쓱 쳐다만 볼뿐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듯 반응한다. 하강하는 미사일과 이를 따라 찾아온 유령, 늪처럼 변해 쉬디의 발목을 끌어내리려는 유령 등 하강의 이미지는 곧 공포의 이미지로 치환된다. 침대에 누워있던 쉬디가 인형이 사라졌다는 딸의 외침에 깨어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보통의 앵글이 아닌 카메라가 눕혀져 있는 앵글을 택한다. 넓은 시네마스코프의 화면비에서 이러한 앵글로 침대에서 일어나는 인물을 담아내는 것은 마치 추락/하강하는 미사일 등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이미지로써 공포의 겹을 드러내고 쌓아가는 <어둠의 여인>의 연출은 관객에게 공포를 고스란히 전도함과 동시에 사회적인 맥락을 놓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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