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리즈 테론 주연, 데이빗 레이치 연출의 <아토믹 블론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의 베를린, MI6의 에릭 그레이(토비 존스)는전세계 모든 스파이의 신상과 행적이 마이크로필름에 담긴 리스트를 위해 로레인 브로튼(샤를리즈 테론)을 보낸다. MI6의 베를린 지부장 데이빗 퍼시발(제임스 맥어보이)과 공조하여 리스트를 회수하는 것이 로레인의 임무. 하지만 영국을 비롯해 독일과 미국, 소련 등 많은 국가에서 리스트를 노리고, 동독과 서독을 오가는 싸움이 벌어진다. 그러던 중 로레인은 프랑스의 신입 요원 델핀(소피아 부텔라)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그에게 묘한 감정을 느낀다. 로레인, 퍼시발, 델핀, 그 외 소련과 독일의 여러 인물들이 뒤엉킨 상황 속에서 그들은 각자의 생존과 임무를 위해 움직인다. <존 윅>을 통해 연출가로 데뷔한 스턴트맨 출신 감독 데이빗 레이치가 연출을 맡은 작품이다. <존 윅>처럼 단순한 스토리 위해 액션의 쾌감을 쌓아가는 영화일 것이란 예상보다 스파이 영화로써 이야기를 쌓고 캐릭터를 묘사하는데 공들인 작품이다. 감독의 전작에 비해 조금 복잡한 스토리를 지녔기에 늘어지고 꼬이는 부분이 있지만, 한 시즌을 책임질만한 오락영화라는 점에서 즐거운 작품이었다.
<아토믹 블론드>라는 영화를 이끄는 핵심 요소이자 마케팅 포인트는 역시 스타일이다. 희뿌옇지만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는 네온 불빛, “진실과 거짓말을 구분하려 하지 않는다”는 대사처럼 화면을 흐릿하게 채우는 담배연기, 퀸과 데이빗 보위의 ‘Under Pressure’부터 칸예 웨스트의 ‘BlackSkinhead’, 플록 오브 시걸스의 ‘I Ran’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삽입곡과 <존 윅>부터 데이빗 레이치와 함께한 타일러 베이츠의 오리지널 스코어는 하나의 균일한 스타일로써 영화를 쌓아 올린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로레인을 연기한 샤를리즈 테론이 있다. <존 윅>이 키아누 리브스의 영화이고, <007> 시리즈가 제임스 본드라는 인물의 영화라면 <아토믹 블론드>는 온전히 샤를리즈 테론의 영화다. 길게 뻗은 팔다리로 적의 급소를 정확히 타격하고, 멍으로 가득한 몸 사이에 도청장치를 숨겨 비밀을 캐내고, 여린 신입 스파이에게 다정한 사랑을 나누는 사람. 냉철하고 강하면서 감정과 자의식이 과잉되지 않고, 생존과 임무를 놓고 저울질하며 행동하는 여성 스파이 원톱의 영화가 지금까지 있었나? 내가 기억하는 한 <아토믹 블론드>의 샤를리즈 테론이 이 타이틀의 첫 주인공으로 느껴진다. 로레인은 “열쇠 내놔”라는 상대방의 말에, 주먹과 함께 열쇠를 쥐어 얼굴에 고이 쑤셔 박아 열쇠를 건네주는, 그런 친절함을 가진 사람이다.
<아토믹 블론드>는 데이빗 레이치가 자신이 <존 윅>의 연출자였다는 사실을 영화 전체에서 자랑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령 게임의 자막 스타일을 따온 듯한 오프닝 시퀀스와 시공간을 설정하는 자막들, 게임 속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듯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스타일 등은 <존 윅> 시리즈에서 <아토믹 블론드>까지 이어지는 감독의 인장으로 자리 잡은 것 같다. 동시에 자신이 영화적으로 좋아하는 공간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다. <존 윅>이 뉴욕이라는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세계관을 구축했듯, <아토믹 블론드>에서는 장벽이 붕괴되기 직전의 베를린이라는 공간을 통해 세계관을 빠르게 구축한다. 이미 여러 영화에서 수 차례 사용되어 클리셰가 되어버린 설정을, 클리셰이기에 관객에게 익숙하게 다가올 설정임을 알고 과감하게 자신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재미있을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로레인의 보드카, 퍼시발의 팔 깁스 등의 소품으로 캐릭터에 대한 힌트와 성격을 부여하는 디테일도 뛰어나다. 특히 퍼시발의 캐릭터는 등장부터 퇴장까지 감독이 시대와 베를린이라는 공간, 그곳에서 살아가는 스파이 캐릭터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모든 페티시를 쏟아 넣은 것과 같은 인물처럼 그려진다.
물론 <아토믹 블론드>의 각본이 치밀하지는 않다.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위해 로레인이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는 장면들은 중반부로 넘어가면 조금 늘어진다. 전체적인 이야기는 액션을 위한 징검다리처럼 보이기도 하고, 마지막 한 방을 위해 겹겹이 반전을 쌓아가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익숙하고 단순한 세계관 위에 쌓아 올린 복잡한 이야기에는 크고 작은 구멍과 비약이 가득하다. 이러한 간극을 채우기 위해 영화는 음악을 동원하고, 액자식 구조를 이용해 긴장감을 조성한다. 이것이 부족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영화 전체의 감흥을 해칠만한 큰 구멍은 없다. <아토믹 블론드>는 자신의 단점을 잘 알고 있고, <존 윅>과 마찬가지로 캐릭터의 매력과 액션을 통해 단점을 강렬하게 상쇄한다.
스턴트맨 출신 연출자답게 <아토믹 블론드>의 액션 시퀀스들은 <존 윅>과 유사한 쾌감을 준다. 다만 존 윅의 액션은 총기와 근접 격투를 배합해 만들어냈다면, 로레인의 액션은 공간과 주변 물건을 동원한 생존을 위한 액션에 가깝다. 때문에 로레인의 격투는 조금 더 처절하고 고통스럽게 묘사된다. 동시에 여러모로 창의적인 액션들이 등장한다. 가령 독일 경찰들이 들이닥치자 호스를 이용해 적들을 하나하나 쓰러트리고 탈출하는 과정을 이어 보여준다거나, 당시 시공간에 알맞은 영화(무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를 영화 속 극장 스크린에 영사한 채 액션을 진행하는 재치를 보여준다. 오프닝 이후 한 시간이 넘도록 총격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흥미롭다. 영화의 개봉 전부터주목 받았던, 거리-계단-방-카체이싱으로 이어지는 10여분의 롱테이크 액션의 시발점은 영화가 시작되고 한 시간 가까이 흐른 뒤 등장하는 첫 총격이다. 이 순간을 명백한 영화의 하이라이트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의지가 돋보이고, 성공적으로 영화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한다. 영화 전체에서 가장 처절한 액션의 순간인 이 장면에서는 음악도 등장하지 않은 채 둔탁한 격투의 사운드만으로 극장을 채운다. 언뜻 “내가 이렇게도 찍을 수 있다!”라고 자랑하는 차력쇼처럼 보일 수 있는 장면이었지만, 짜임새 있는 액션의 합과 리얼타임으로 진행되는 상황의 급박함이 10여분의 롱테이크 시퀀스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로레인의 총격 액션은 깔끔한 마무리를 선보이며 액션에 방점을 찍는 영화의 만듦새와 태도를 다시 한번 재확인시켜준다.
<존 윅>을 함께 만들었던 채드 스타헬스키와 데이빗 레이치는 2017년에 각각 <존 윅: 리로드>와 <아토믹 블론드>를들고 돌아왔다. 두 명의 빼어난 스턴트맨 출신 오락영화 연출자는 자신들이 사랑하고 출연까지 했던 액션 오락영화들의 클리셰를 가져오고, 그 클리셰에 관객/배우/연출자 모두가 동의한다는 생각 하에 영화를 만들어낸다. 영화 속에 고전 영화(<존 윅: 리로드> 오프닝 시퀀스의 <셜록 주니어>와 <아토믹 블론드> 중반부의 <잠입자>)를 삽입하는 씨네필적 재치도 돋보인다. 몇 가지 장치로 세계관을 뚝딱 정립시킨 채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대담하게 풀어가는 두 감독의 솜씨는 계속해서 둘의 영화를 보고 싶어지도록 만든다. 채드 스타헬스키의 차기작은 <존 윅 3>이고 데이빗 레이치의 차기작은 현재 촬영 중인 <데드풀 2>이다. 끝없이 자신들이 좋아하면서 관객들 역시 좋아할 영화를 만들어내는 두 연출자의 미래를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