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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Sep 14. 2017

역사의 피해자를 그려내는 윤리적 태도의 모범답안

나문희&이제훈의 영화 <아이 캔 스피크>

*스포일러 포함


 원칙주의자인 9급 공무원 박민재(이제훈)가 명진구청으로 발령 오면서 영화가 시작한다. 범령과 조례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그는 금세 구청의 에이스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런 그의 앞에 나옥분 할머니(나문희)가 나타난다. 그는 도깨비 할머니라고 불리며 수많은 민원을 들고 오는 구청의 유명인사다. 민재는 막무가내로 민원을 들이대는 옥분에게 원리원칙에 따라 처리하겠다고 말한다. 어느 날 옥분은 자신이 다니던 영어학원에서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민재를 보게 된다. 자신이 한 평생 품고 살며 꼭 말해야 될 것이 있던 옥분은 민재에게 영어를 가르쳐달라고 한다. 사실 언론시사회를 통해 영화의 소재가 기사로 알려지기 전까지 크게 관심 있던 작품은 아니었다. <스카우트>, <시라노: 연애조작단> 등의 재미있는 영화도 연출했지만 <쎄시봉>, <열한시> 등의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김현석 감독의 근작들을 보면서 <아이캔 스피크>라는 작품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위안부 할머니를 소재로 삼았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이를 나문희가 연기하며, 이미 <스카우트>를 통해 우회적으로 5.18이라는 사건을 윤리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깊은 감정선을 잃지 않는 연출로 담아냈던 김현석 감독이라는 것에 영화에 대한 기대가 올라가게 되었다.

 사실 <아이 캔 스피크>는 기대에 비해 아쉬운 부분이 많은 작품이다. 영화 속에 수많은 단점들이 있으며 이를 가릴 생각도 크게 없어 보인다. 족발집 혜정(이상희) 등의 에피소드로 드러나는 시장이 들어선 상가 골목의 재개발 문제, 고등학교 3학년이면서 부모도 없이 민재와 둘이 사는 동생 영재(성유빈)의 이야기,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민재의 모습 등 많은 이야기가 영화의 서브플롯으로 제시되지만 대부분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거나 급하게 마무리된다. 또는 영화에서 그냥 증발해버리기도 한다. 우연에만 기대는 몇몇 장면, 가령 구청에서 민재가 옥분에게 소리 지르는 장면을 고등학생인 영재가 (분명 수업시간이라던가 할 텐데) 뜬금없이 나타나이를 목격한다던가 하는 장면들은 약간 당황스럽다. 이문세의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으로 이어가는 아재 개그 역시 통한다면 통한다고 할 수 있지만 유치하고 촌스러운 한국 코미디 영화의 전형을 이어간다. 구청 양 팀장을 연기한 박철민의 주절거림으로 대표되는 김현식 감독의 코미디 양식이 <아이 캔 스피크>의 코미디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위안부 할머니라는 소재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아이 캔 스피크>는대단한 성취를 보여준다. 우리는 이 영화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성격이 있고, 생활이 있고, 인간관계가 있으며, 강인한 개인으로 존재하는 극영화 속 위안부 할머니 캐릭터를 만나게 되었다. 때문에 <아이 캔 스피크>를 보는 것은 성격과 개성을 지닌 한 인물로서의 위안부 할머니를 극영화에서 만나는 최초의 경험이다. 조금은 지루하거나 유치하게 느껴질 수 있는 전반부는 옥분이 한 구, 한 시장 동네라는 공동체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인물이라는 것을 차근차근 드러낸다. 그동안 <귀향>, <눈길>, <소리굽쇠> 등의 극영화에서 일본군에 의한 피해자들을 그저 피해자로만 납작하게 담아냈고, <어폴로지>, <그리고 싶은 것> 등의 다큐멘터리 역시 (극영화들 보단 낫지만) 어떤 역할 안에 갇혀있는 인물로 위안부 할머니를 담아낸다는 느낌을 없앨 수 없었다. 다시 말해 그동안 위안부를 그려낸 대부분의 영화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그저 역사의 피해자로, 시대에 묶여버린 사람으로만 존재한다. 이에 비하면 <아이 캔 스피크>의 옥분은 입체적인 성격과 삶을 지닌 개인으로써 존재한다. 자신만의 생각과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며, 공동체의 일원으로써 생활한다는 자각도 있고, 시장의 다른 여성들과 시스터 후드를 쌓아가며 느슨하지만 끊기지 않는 연대를 이어가기도 한다. 무엇보다 과거의 사건을 대하는 것에 있어 타인의 설득과 자극을 통해 각성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의지를 먼저 표출하여 행동한다는 점에서 앞선 영화들보다 압도적으로 앞선 캐릭터이다. 그간의 남성 주인공 실화 바탕 영화들이 남성 간의 연대를 통해 영화의 주제를 이야기했다면, <아이 캔 스피크>는 시스터후드가 도드라지는 작품이라는 점도 영화의 유의미한 성취가 아닐까 싶다. 아주 짧은 플래시백으로 등장하는 위안소 장면을 <귀향>과 <눈길>처럼 전시적인 태도가 아닌 맥락을 더하는 잠깐의 회상으로만 등장시킨다는 점 또한 눈여겨봐야 할 지점이다.

 이를 연기하는 나문희 배우의 연기는 지금까지 실화 속 중요한 인물들을 연기해온 남성 배우들, 가령 <택시운전사>와 <변호인>의 송강호나 <명량>의 최민식과 같은 위치에 서있다. 어쩌면 여성 배우에게는 거의 허락되지 않았던, 역사의 중요한 사건을 다루는 실화 속 주인공의 위치를 다른 배우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연기해낸 첫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접해온 나문희의 이미지는 익숙하면서도 가슴 깊이 다가온다.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영화를 보러 갔음에도 그 소재가 드러나는 영화의 2/3 지점에선 눈물을 쏟아낼 수밖에 없다. 분노, 인내, 절망, 따스함, 생존의 감정 등이 뒤섞여 진한 페이소스를 만들어내는 나문희의 표정과 대사는 관객을 쥐고 흔들며 감상을 압도적으로 지배한다. 민재와 산보하기 위해 남산에 올라와서 파워워킹을 하는 영화 마지막 즈음의 옥분은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을 강인한 한 인물의 이미지이다. 오롯이 서포터의 역할에만 머물며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매력을 유지하는 이제훈의 연기 또한 좋다. <파수꾼>, <고지전>, <건축학개론>으로 시작해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박열>, <아이 캔 스피크>로 이어지고 있는 그의 필모그래피 또한 또래 남성 배우들에 흥미진진하다. 

 <아이 캔 스피크>는 역사적 사건의 피해자를 다루는 영화의 모범과도 같은 작품이다. 물론 한 편의 영화로써 두드러지는 단점들이 보이고, 영화의 장점이 이를 모두 가리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영화가 취하고 있는 태도와 인물들 그려내는 방식에 있는 성취는 놀랍고 뛰어나다. 피해자에 대한 비윤리적 전시와 착취가 만연하고 있는 지금의 한국영화들에 비해 <아이 캔 스피크>가 보여주는 태도는 얼마나 앞서 있는 것일까? 역사의 피해자를 한 개인으로 살아 숨 쉬는 캐릭터로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위안부 할머니를 행동하는 인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아이 캔 스피크>는 관객이 느낄 부채의식을 온전히 담아낸 첫 영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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