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Dec 16. 2018

스릴러에서도 여전한 폴 페이그의 즐거움

<부탁 하나만 들어줘> 폴 페이그 2018

 <히트>, <스파이>, <고스트버스터즈> 등을 통해 버디 액션, 첩보, SF 판타지 등의 장르를 여성중심적 영화로 재해석해온 폴 페이그가 이번엔 필름 누아르 스타일의 스릴러를 연출했다. 그의 신작 <부탁 하나만 들어줘>는 싱글맘인 스테파니(안나 켄드릭)가 아들의 친구의 엄마인 에밀리(블레이크 라이블리)와 우연히 친해지며 시작한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스테파니는 자신의 브이로그 방송 중 에밀리가 실종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스테파니는 자신과 에밀리의 아들들을 데리고, 에밀리의 남편인 숀(헨리 골딩)과 함께 에밀리의 행방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던 스테파니는 그 에너지를 사용해 에밀리와 그의 실종에 얽힌 비밀을 파헤치고, 브이로그를 시청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부탁 하나만 들어줘>는 에밀리(블레이크 라이블리)와 스테파니(안나 켄드릭)라는 두 여성 캐릭터가 필름 누아르의 클리셰를 비틀며 충돌하는 작품이다. 많은 필름 누아르 영화에서 팜므파탈 캐릭터를 설정하고, 그 캐릭터가 사망, 실종, 납치, 잠적 등 비밀을 품은 상태로 사라진 채 탐정 내지는 형사 역할의 남성 캐릭터가 비밀을 파헤치는 구도를 취한다. 반면 <부탁 하나만 들어줘>에는 탐정 역할의 남성 캐릭터가 없다. 에밀리의 남편인 숀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의 캐릭터는 단순히 체스판 위의 말 하나에 그친다. 폴 페이그는 남성 탐정 캐릭터 대신 에밀리와 스테파니 두 캐릭터를 모두 팜므파탈 캐릭터로 위치시킨 뒤, 스테파니의 캐릭터를 탐정 캐릭터로 변신시킨다. 이러한 역할 변화는 <스파이>나 <고스트버스터즈>에서 직업이나 영화 속 역할에 얽힌 젠더 역할을 가지고 놀며 작품을 이끌어가던 모양새를 연상시킨다. 거기에 브이로그, 의상의 변화, 조연과 단역의 캐스팅에서도 젠더와 인종적 측면을 충분히 고려한 것 등이 이 영화의 세련됨을 알려준다.

 다만 아쉬운 지점은 있다. 영화 중반부에 등장하는 에밀리와 스테파니의 키스는 그냥 그 장면 하나로만 흘러 지나간다. 두 여성 간의 성애적 관계는 영화 말미까지 도통 그려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팜므파탈과 팜므파탈의 충돌을 영화의 기본 설정으로 삼았다면, 그러한 설정을 디나이얼 레즈비언들의 로맨스 서사로 결말을 맺는 것이 더욱 흥미로운 설정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두 캐릭터의 키스 장면이 등장함에도 이러한 맥락을 영화가 거부하고 있다는 점은 <부탁 하나만 들어줘>의 한계점으로 보인다. 다만 이런 한계점은 <스파이>나 <히트> 등 폴 페이그의 가장 좋은 영화들에 비해 아쉽다는 인상을 줄 뿐, 여전히 폴 페이그의 영화는 시종일관 관객을 즐겁게 하는 지점을 놓치지 않는다. 폴 페이그의 차기작 리스트에는 이번 영화에도 출연한 헨리 골딩을 비롯해 에밀리아 클라크, 엠마 톤슨, 양자경 등이 출연하는 로맨틱 코미디와 <히트>의 속편이 예정되어 있다. 일정이 밀리지만 않는다면 앞으로 2년 동안 매년 폴 페이그의 영화를 만나볼 수 있으니, 매년 최소 한 편의 끝내주는 킬링타임용 영화를 보게 되는 것이라 여기고 그의 차기작을 기다리면 될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슈퍼히어로 영화의 놀라운 성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