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Carol
감독: 토드 헤인즈
출연: 케이트 블란쳇, 루니 마라
제작연도: 2016
백화점 매대에서 일하던 테레즈의 눈에 한 여성이 들어온다. 매대를 찾은 손님을 응대하고 그 여성이 있던 자리를 다시 바라본다. 여성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어느새 매대 앞으로 온 여성이 테레즈에게 말을 건넨다. 딸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온 그의 이름을 영수증을 통해 알게 된다. 그의 이름은 캐롤, 테레즈는 그가 두고 간 장갑 한짝을 돌려주고자 한다.
토드 헤인즈의 <캐롤>은 시선으로 쌓아가는 감정의 멜로드라마이다. 더글라스 서크의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1955)를 리메이크한 <파 프롬 헤븐>(2002)을 통해 할리우드 멜로드라마의 거장과 장르의 역사에 찬사를 바쳤던 그는, <캐롤>을 통해 로맨스/멜로드라마 장르가 자신에게 내린 영화적 세례를 관객에게 되돌려준다. 테레즈가 장갑을 찾아준 답례로 캐롤이 점심식사를 대접하는 장면을 보자. 식당에 앉은 테레즈는 어딘가 어색해 보이고, 캐롤은 여유롭고 능숙해 보인다. 숏-리버스 숏의 구도가 정석적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테레즈는 캐롤이 시킨 메뉴를 그대로 주문한다. 캐롤의 대사와 표정, 담배를 피우는 행동 등의 액션은 테레즈의 리액션으로 이어진다. 두 사람을 오가는 숏의 구도는 둘의 시선을 매개로 연결된다.
영화 속 시선은 캐롤과 테레즈 두 사람의 사랑만을 매개하는 것은 아니다. 캐롤과 이혼 조정 중인 하지가 캐롤을 찾아 애비의 집으로 찾아온 장면을 보자. 애비는 캐롤이 집에 없다고 이야기하며 문을 닫는다. 문에 달린 좁은 창으로 집 안을 들여다 보는 하지의 시선은 당시의 '윤리'를 내세워 캐롤의 성적지향을 경멸하는 시선이다. 반면 애비의 집에서 캐롤과 애비가 나누는, 한 숏에 담긴 두 사람의 시선은 (아마도 과거의 연인이었을) 두 사람의 과거를 자연스레 소환하고, 친구로 남은 두 사람의 현재의 연대를 매개한다. 둘의 시선이 뒤로 맞잡은 손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 시선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소재는 테레즈의 카메라이다. <캐롤>에서 캐롤을 촬영하는 테레즈의 카메라가 두 사람의 사랑을 매개하는 1차적 시선이라면, 영화의 카메라는 숏의 연결을 통해 둘을 매개하는 2차적 시선이다. 카메라는 시선을 고정시킨다. 카메라는 뷰파인더로 렌즈에 잡힌 대상을 바라보는 촬영자의 시선을 고정시킨다. 시선의 중심은 카메라를 든 사람이며, 카메라는 시선의 찰나를 필름에 기록한다. 애정의 대상 앞에 놓인 시선을 고정시키는 카메라. 테레즈는 캐롤의 사진을 인화하며 그 사랑을 키워 나간다.
영화의 마지막, 하지의 협박으로 불가피하게 이별했던 두 사람은 어느 식당에서 재회한다. 테레즈는 짧은 인사를 나눈 뒤 자신의 일행들이 있는 방으로 향한 캐롤을 쫒아간다. 테레즈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던 캐롤을 보고, 캐롤은 테레즈에게 시선을 돌려준다. 시선을 돌려준다는 것, 홀로 쳐다보는 대신 함께 바라본다는 것. 그 영화는 그 순간을 고정시키며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