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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Dec 04. 2020

<내언니전지현과 나> 박윤진 2020

 영화의 시작은 이렇다. ‘내언니전지현’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박윤진 감독은 넥슨의 클래식 RPG 게임 [일랜시아]를 10여 년 동안 하고 있다. 1999년 서비스를 시작한 [일랜시아]는 이제 운영진마저 떠나버린 망겜이 되었다. 박윤진 감독은 자신처럼 오랜 시간 [일랜시아]를 플레이하는 길드원과 유저들에게, 운영진도 없고 각종 매크로와 버그가 판치는, 영화 한 편의 파일보다 용량이 작은 이 게임을 왜 하는지 묻기 시작한다. 이는 감독이 자신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인디다큐페스티발을 시작으로 여러 영화제들에서 공개된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이러한 영화의 출발점을 확실하게 담고 있었다. 우리는 왜 아직도 [일랜시아]를 붙잡고 있는가? 현실이 너무 힘들어서? 가상공간에서 모종의 유토피아를 발견했기 때문에? 게임 안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어서? 박윤진 감독이 인터뷰한 유저들의 대답은 이를 반쯤 반박하고 반쯤 긍정한다. [일랜시아]가 만들어낸 공간은 현실의 도피처임과 동시에 또 다른 현실이고, 아름다운 유토피아의 단면을 만난 것만 같지만 되려 그런 것은 없음을 어느 순간 드러내고, 누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선 유저들이 만들어낸 비공식적 루트를 철저하게 따라가야 하는, 그런 모순의 공간이다. 

 러닝타임 71분의 영화제 버전보다 15분가량의 분량이 추가된 개봉 버전은 약간 다른 길을 간다. 전자가 위의 질문을 충실하게 따라간다면, [일랜시아]를 ‘망겜’이라 못 박는 게임 유튜버들의 영상으로 시작한 개봉 버전은 영화의 홍보 카피처럼 “16년 차 고인물, 망겜을 구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다”라는 내러티브에 조금 더 무게가 실려 있다. 그렇다고 영화 자체가 망가졌고 실망스럽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의 강조점이 조금 바뀌었다. 영화제 버전의 경우 [일랜시아]라는 게임 속에서 사람들이 새롭게 만들어낸 규칙, 즉 매크로를 통해 [일랜시아]의 규칙을 어기는 것을 새로운 규칙으로 삼는 상황에 집중한다. 영화제 버전 후반부에 등장하는 ‘팅버그’ 사건은 게임의 규칙을 과하게 어긴 누군가의 등장 때문에 벌어진 것이며, 넥슨의 개입으로 일단락된 사건은 [일랜시아]에 남은 이들의 규칙이 모두가 공평하게 적당히 [일랜시아]의 규칙을 어긴다는 것임을 확실히 알려준다. 그리고 이러한 규칙을 공유하는 이들, 더 이상 매크로 없이는 플레이할 수 없는 게임을 붙잡고 그 시간을 함께 견뎌내는 이들은 그 안에서 독특한 자생적 커뮤니티를 구성하고 있다. 이들은 힘을 합쳐 규칙을 세우고 무엇인가를 해내기 위해 모인, 전통적인 의미의 공동체가 아니다. 이들의 유대감은 매크로가 돌아가는 시간에 대한 감각을 공유하고, 정작 매크로를 돌리지 않는 시간에는 어딘가 무의미한 시간(가령 채팅으로 노래를 부른다던가, 게임 내 절벽에서 자살한다던가)을 함께 보냄으로써 발생한다. 이는 온라인 게임, 특히 MMORPG라는 장르가 제공할 것이라 기대되는 유토피아적 공동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즉, 이들은 소위 ‘현실’이라는 곳과 [일랜시아]라는 가상공간 사이를 오가며 일종의 ‘죽은 시간’을 공유하고, 그럼으로써 발생된 유대감을 유지하기 위해 [일랜시아]에 접속한다. 내언니전지현의 길드원들이 엠티를 떠나 촬영한 사진과 게임 내에서 모여 찍은 사진이 오버랩되는 장면은, 이들이 어느 한쪽의 세계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두 세계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개봉 버전에는 이러한 공동체에 대한 언급보단 ‘디지털 노스탤지어’라 부를 수 있는 것에 더욱 집중한다. 새로 추가된 것은 영화제에서의 상영과정 및 넥슨에서 주최한 유저간담회, 그리고 [일랜시아]의 개발자 ‘아레수’와의 만남이다. 한국 게임산업의 초기부터 활동하던 개발자인 그는 [바람의 나라]를 플레이하며 만난 이들과 짧은 유대감을 나눈 일화를 공개한다. 그러고 보니 <내언니전지현과 나>를 관람한 이들의 감상평은 대부분 추억과 연결되어 있다. 소위 ‘밀레니얼 세대’라 불리는 90년대 생들에게 [일랜시아]나 [바람의 나라]를 비롯한 여러 온라인 게임은 추억의 공간이다. 길드원들이 엠티를 위해 찾은 펜션의 직원이 “[일랜시아]가 아직도 있어요?”라고 말하며 반갑고 신기하다는 듯이 게임 내 몇몇 요소를 길드원들과 공유하는 모습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메이플스토리]와 같은 게임이 여전히 인기를 유지하고 있지만, 게임의 과거 모습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지점에서 [일랜시아]는 게임을 플레이했었던 이들에게 존재를 잊고 있었던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오랜만에 방문한 것만 같은 느낌을 제공한다. 

 이런 노스탤지어는 최근 몇 년간 공개된 여러 영화들에서도 드러난다. 자신의 이야기를 기술하기 위해 홈비디오 등을 꺼내오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버블 패밀리>, <94’ 비디오앨범>, <ㅅㄹ, ㅅㄹ, ㅅㅇ>, 혹은 어떤 기록물을 발견함으로써 자신의 과거를 톺아보는 <8mm>와 같은 작품들. 다만 이러한 영화들은 비디오 테이프와 같은 특정한 기록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반면 <내언니전지현과 나>와 같은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일랜시아]라는 특정한 기표가 가져오는 노스탤지어의 연상작용이다. 이 영화와 관련된 인터뷰 영상이나 예고편 등을 유튜브에서 찾아보면, 대부분의 댓글은 각자의 추억을 늘어놓고 있다. <내언니전지현과 나>의 개봉 버전은 이 부분에 보다 집중한다. 동세대 관객들에겐 자신의 추억을 꺼내어 보길 요청하고, 위 세대 관객들에겐 우리에게 이러한 추억이 존재하며 그것을 간직하고 싶다고 말한다. 때문에 새로 추가된 영화의 후반부는 우리의 노스탤지어를 앗아가지 말아 달라는 부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이를 부정적으로 보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게임 내에서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모종의 유토피아로 여길 수 있는 여지를 많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아쉽게 느껴진다. 영화제 버전에서 내언니전지현의 동료 유저 ‘하루히로’가 아이템 사기를 당하고 게임을 떠나기 전 작별인사를 하는 장면이나, 공무원 시험 준비를 위해 로그아웃하는 레렐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이곳이 유토피아일 수 없음을 두 장면은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 두 장면은 개봉 버전에서도 그대로 등장하지만, [일랜시아]라는 망겜에 사람들이 왜 남아 있는지에 집중하기보단, 그러한 망겜이 지닌 추억과 그것을 보존하기 위한 여정으로 영화가 기능하기에 두 사람의 사라짐은 그저 게임을 떠난 누군가의 등장 정도로만 일축된다. 개봉 버전이 지닌 나름의 장점, 가령 [일랜시아]를 비롯한 온라인 MMORPG 게임에 무지한 사람이 보기에도 부담이 없고 친절해졌으며 확실한 내러티브를 지녔다는 점이 있지만, 영화 이후의 수많은 고민을 던져준다는 매력이 다소 사라졌다는 점에서 아쉽다. 

 그럼에도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올해 공개된 여러 한국영화 중에서 중요한 위치에 놓일 것이다. 이는 단순히 국내 최초로 게이머가 연출 및 제작한 다큐멘터리가 극장에 개봉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레디 플레이어 원>과 같은 세계는 다른 방식으로 도래했고,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그것을 흥미롭게 짚어보는 영화 중 하나다. [일랜시아]는 도피처가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사회실험이 진행되는 공간이며, 인터넷이 민주주의적 유토피아가 될 것이라 예언했던 이들이 말이 틀렸음을 다시 한번 증명하는 것이며, 그럼에도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가 등장하는 곳이며, 현실과 가상공간을 평생 오가며 살아야 할 첫 세대의 경험담이다. 그것만으로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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