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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영 Jan 18. 2024

62. 내가 만난 100인

어느 정도는 안다고 생각했지만.

진짜여자.


누구보다도 많은 나라를 다니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왔다고 자부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낯선 환경은 내 눈앞에서 펼쳐졌고 그 안에는 낯선 색깔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아니 그녀는 내가 만난 첫 번째 동성애자였다.

점심시간이면 회사 1층건물인 노천카페에 나와 동료들과 티타임을 가졌다. 한편 같은 건물에서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는 그녀는 필리핀출신의 게이였다.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스키니진을 입고 킬힐을 신고 짙은 색조의 화장을 했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태생부터 여자인 우리보다 더 가볍고 우아했다. 그녀는 어떤 물건이든 집게손가락을 이용해 사뿐사뿐 들고 다녔다.

그녀는 항상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했지만 말투는 천상 아줌마였다. 햇살 좋은 날 카페에 앉아있는 우리를 발견한 그녀는 우아한 걸음이 종종걸음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가 오고 있어!"

"아니야! 그녀가 오고 있어."


영국친구의 작고 재빠른 두 마디가 지나가자 그녀가 등장했다. 오늘도 그녀는 해맑음이었다.

"안녕! 안녕."

"안녕! 어디 가니?"

"건물주에게 전기요금 내러 가."

그녀의 손을 보니 집게손가락에 살짝 걸쳐진  전기요금고지서가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뭔가 엄청난 걸 발견한 듯 고지서로  크게 벌어진 입을 가리며 말했다.


"어머머!! 이거 뭐니? 이거 진짜 예쁘다."


여느 때처럼 그녀는 또 자기 말만 하면서 온갖 호들갑을 떨었다. 주위의 시선이 우리에게 슬쩍슬쩍 흘러오는 게 불편해진 우리는 그 상황을 빨리 모면하고 싶어졌다.


"이번에 한국 가서 샀어. 방학이었잖아!"

"그래 한국은 이렇게 예쁜 게 많더라. 어머~ 이 색깔 좀 봐!"


그녀는 내 다이어리 옆에 놓인 펜을 보고 어쩔 줄 몰라했다. 파운데이션을 덕지덕지 바른 그녀의 거친 피부 주변에는 그녀의 원래 성별을 그대로 말해주듯 수염이 삐져나와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저녁이 되면 수염이 자라 두터운 파운데이션을 뚫고 나온다고 했다. 그래서 늘 손으로 입을 가리는 버릇이 생겼다고 했다. 어쨌든  내 머릿속으로는 그녀로 인해 더 이상 나의 소중한 점심시간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마음에 들면 너 가져도 돼! 새것이 아니어도 상관없다면 말이야."

"정말? 그래도 돼?"

"난 다시 가서 사면 돼. 근데 진짜 쓰던 건데 괜찮아?"

"어머! 무슨 소리야. 나야 완전 땡큐지."


그때 이후 나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조금씩 달라졌다.

온갖 스트레스를 안고 버거킹에 혼자 멍하니 있을 때였다. 주문한 버거를 기다리며 심각한 표정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평소 나는 얼굴에 기분이 그대로 드러나는 편이라 관리가 잘 안 될 때가 많았다.


"스마일~!"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그녀가 남자친구와 다정히 내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나는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 점심 먹으러 왔어?"

"그래! 웃어! 넌 웃을 때가 예뻐! 진짜 스마일 스티커처럼 말이야."

"고마워!"


그녀 덕분에 쇼펜하우어의 철학처럼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날이 된 것 같았다.

그렇게 가끔 마주하는 그녀는 내게 굳이 알려줄 필요 없는 자신의 처지를 혼자 떠들어대곤 했다. 돈을 벌어 성전환 수술을 하고 형편이 되면 미국으로 가 결혼을 할 거라고 했다. 그리고 왜 손으로 입을 가리는지도 그때 말해주었다.

한 번은 카페에 앉아 미국비자 서류를 준비하며 투덜거리는 나에게 일침을 가한 적도 있다.

"아니, 미국은 왜 이렇게 까다로운 거야!"

"얘! 너희 나라도 만만치 않거든!. 우리나라에서 한국 비자받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



그날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이른 퇴근을 하고 친구를 기다리는데 회사 앞 벤치에서 그녀가 울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서럽게 엉엉 울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온갖 화장이 다 번진 채 그녀의 몰골은 더 엉망진창이었다.


"너 괜찮아?"

"아니."


나의 물음에 그녀의 설움은 더 폭발했고 흐르는 눈물을 소매 끝으로 닦았다.

"나. 나. 남자친구랑 헤어졌어."

"어. 미안해."

"남자친구에게 진짜 여자친구가 생겼어."

"진짜 여자친구?"


처음에는 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 와중에도 그녀는 단번에 눈치채고 말했다.


"진짜 여자친구! 너처럼 진짜 여자말이야."


그녀는 말끝에는 서러움이 더 증폭되어져 갔다.


당연한 것을 갈구하는 자.

당연한 것조차 누리지 못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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