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을 치렀다. 채점보다 아르바이트가 먼저였던 나는 벌써 사회인이 된 것처럼 들떠 여기, 여기 면접을 보러 다녔다.
'그땐 왜 그렇게 어른이 되고 싶었을까?'
패스트푸드점 면접을 마치고 길을 나서려는데 어떤 대학생이 나를 불러 세웠다.
"학생?"
"아... 네.. "
"학생, 혹시 책 좋아해?"
"책이요?"
순식간에 지어진 나의 표정과 말투 그리고 눈빛은 이미 그에게 읽히고 말았다.
"학생 저쪽으로 가서 얘기 좀 해도 될까?"
그는 책이 가득 실린 차 안으로 나를 데려갔다. 몇몇 베스트셀러가 있었고, 수능 필독 도서로 익숙한 책들도 많았다. 그는 '주문식 도서관'의 직원이라고 본인을 소개했다. 월 8000원의 구독료로 일 년 동안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도록 집으로 보내주고 직접 수거해 가는 방식의 도서관이라고 했다. 정말이지 나에게 더할 나위가 없는 멋진 도서관이었다.
'매월 8000원에 베스트셀러를 마음껏 읽을 수 있다니...'
당시 나의 한 달 용돈은 5만 원이었고 매달 2만 원씩 적금까지 해 왔다. 여기서 매달 8000원을 지불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그가 이 분위기를 틈 타 계약서를 내밀었다. 나는 그 물살에 올라 타 책을 제대로 받아 볼 수 있도록 집주소와 전화번호를 정확히 기재했다. 계약서 마지막 서명란에 사인을 할까 하다 그날 학교에서 받은 도장이 있다는 걸 생각해 냈다. 어른들처럼 도장을 어딘가에 꼭 찍어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빨리 기회가 찾아올지 꿈에도 몰랐다. 가방을 뒤적거려 도장을 찾을 때 그가 말했다.
"근데 학생, 선금으로 먼저 8000원을 내야 해. 혹시 지금 돈 있어?"
"네!"
나는 바로 지갑을 열어 그에게 오천 원짜리 한 장과 천 원짜리 세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때마침 가방 구석에서 도장을 찾았다. 어른들처럼 신중히 계약서를 들여다보고 도장을 꾹 눌러 찍고 싶었다. 들뜬 나는 처음 본 그에게 조잘조잘거렸다.
"제가 오늘 학교에서 생애 첫 인감도장을 받았거든요. 이거 장애우들이 만든 건데 운 좋게 봉사부장인 제가 뽑혔지 뭐예요?"
청색깔의 옥으로 된 도장은 꼭 맞는 옷을 입은 듯 오색주머니에 쏙 들어가 있었다.
도장을 꺼내 입김으로 인주를 녹여 찍을 곳을 찾는데 그가 갑자기 말했다.
"학생, 우리는 인주를 가지고 다니지 않아!"
"괜찮아요. 아까 학교에서 받자마자 몇 번 찍어봐서 인주가 아직 남아있을 거예요."
이번에는 그가 손으로 막아섰다.
"저기, 학생! 이건 인감도장이야. 인감도장은 이렇게 함부로 아무 데나 찍는 거 아니야."
내 생애 첫 계약서에 내 인감을 찍는 게 뭐가 그렇게 잘못되었을까 그때는 몰랐다.
한참 아르바이트를 하고, 대학준비를 하느라 얼마동안 주문식 도서관을 잊고 있었다. 매달 날아든 요금고지서를 챙겨 은행에 들러 입금을 했다. 그리고 몇 달 후, 돈이 아까워서라도 책을 주문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바로 전화를 걸어 현재 대출가능한 도서 목록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며칠 뒤 날아온 도서목록은 오성과 한음, 논어 등 온통 오래된 책들 뿐이었다. 뭔가 착오가 있는 듯 해 전화를 걸어 문의해 보았다. 분명 계약할 때는 베스트셀러가 많았는데 이번에 온 목록에는 오래된 책들 뿐인지 물어보았다. 답변은 도서관이 인기가 많아져 베스트셀러는 다른 이들이 벌써 다 대출해 가고 없다는 것이다. 그때 감이 왔다.
'이건 내 생애 첫 사기계약서였다.'
그때 이후로 나는 돈을 입금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 독촉전화가 왔다.
"저 이 계약을 해지하고 싶어요."
"해지요? 학생, 계약서를 제대로 못 본 모양인데 여기는 1년이 지나야 해지할 수 있어요. 아니면 1년 치를 한꺼번에 내던가, 안 그러면 위약금의 10배를 물어내야 해요."
"위약금 10배요?"
"네! 10배요."
"네~ 알았어요."
나는 마지못해 매달 8000원을 꼬박꼬박 냈다. 그리고 마지막달 고지서가 왔을 때는 너무 화가 나서 받는 고지서를 바로 찢어버렸다.
'될 대로 되라지 뭐! 나중에 다시 전화 오면 못 받았다고 하면 되지. 뭐!'
이상하게도 더 이상 전화는 오지 않았다. 그때 문득 처음 영업을 했던 그 대학생이 생각이 났다.
비록 자신은 사기를 치고 있지만 인감도장은 못 찍게 했던 것 보면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몇 달 후 뜬금없이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도 이런 일은 처음이었어. 사정이 생겨서 그렇게 되었는데... 암튼 미안해! 학생"
"그래서 말인데 내가 며칠 전 학생에게 쓴 편지가 있어. 혹시 내가 이 편지를 보내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