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가 먹던 순창 고추장은 지금의 고추장이 아니었다

기록을 따라가 보니, 고추장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고 또 다르다

by 두부

봄이 되면 장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예전에는 이 시기가 되면 집집마다 장을 담그는 일이 있었다. 메주를 씻고 장독을 닦고 햇볕이 잘 드는 장독대에 항아리를 올려두는 풍경은 오랫동안 한국 음식 문화의 한 장면이었다.


이 장 문화 속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고추장이다. 그리고 고추장을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지역이 순창이다. 지금은 마치 “순창 = 고추장”처럼 느껴질 정도로 순창 고추장은 한국 장류의 상징적인 이름이 되었다.


하지만 역사 기록을 따라가 보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순창 고추장과 조선시대 순창 고추장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같은 모습의 음식은 아니었다.


고추장이 문헌에서 분명하게 등장하는 시점은 18세기다. 1766년 유중림이 편찬한 농서 《증보산림경제》에는 ‘만초장(蠻椒醬)’이라는 장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만초’는 고추를 뜻하는 말이다. 이 기록은 고추가 장류 제조에 사용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당시의 고추장은 지금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메주가루에 쌀이나 찹쌀을 섞고 엿기름 물을 더해 발효를 돕는 방식이었다. 여기에 고춧가루와 소금을 넣어 항아리에 담아 숙성시키는 구조였다. 지금의 고추장이 비교적 달고 부드러운 양념에 가깝다면, 조선 후기의 고추장은 메주의 풍미가 더 강한 발효 장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인다.


순창 고추장이 역사 속에서 확인되는 기록은 영조 시대 어의였던 이시필이 쓴 《소문사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의 ‘식치방’에는 당시 이름난 음식과 지방의 특산품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순창 고추장이 언급된다. 이 기록은 순창의 고추장이 이미 조선 후기에는 유명한 장류로 알려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지역 기록에 따르면 순창 조씨 집안의 고추장이 궁중에까지 알려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영조가 이 집안의 고추장을 높이 평가했다는 전승도 남아 있다. 물론 이것이 곧 “영조가 먹은 고추장이 지금의 순창 고추장과 같다”는 뜻은 아니다. 당시 고추장은 집안마다 다른 방식으로 담그는 발효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순창이 고추장으로 유명해진 데에는 지역 환경도 영향을 주었다. 순창은 내륙 분지형 지역으로 일교차가 크고 비교적 건조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이런 환경은 장독을 이용한 발효에 유리한 조건으로 알려져 있다. 햇볕과 바람이 장독을 통해 장을 천천히 익히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먹는 순창 고추장은 조선시대의 그것과는 또 다른 역사 속에서 만들어졌다. 20세기 이후 한국 사회가 크게 변화하면서 장류 생산 방식도 함께 바뀌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장을 담그는 문화가 일반적이었지만 점차 장류는 시장에서 판매되는 식품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특히 1960년대 이후 식품 산업이 성장하면서 고추장은 공장에서 생산되는 식품으로 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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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제조 방식도 달라졌다. 발효 기간은 짧아졌고, 찹쌀과 전분의 비율이 높아졌다. 또한 물엿이나 조청을 사용해 단맛을 더하는 방식도 일반화되었다. 지금 우리가 익숙하게 먹는 고추장의 맛은 사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순창이 지금처럼 고추장의 대표 지역으로 자리 잡은 것은 1980년대 이후다. 이 시기 순창군은 장류 산업을 지역 특산 산업으로 육성하기 시작했다. 순창 고추장 민속마을이 조성되고 장류 연구 시설이 만들어지면서 순창은 한국 장류 산업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순창 고추장은 전통 발효 음식의 이미지를 유지하면서도 현대 식품 산업 속에서 생산되는 지역 브랜드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보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조선시대 순창 고추장은 지역에서 명성이 있던 발효 장이었고, 오늘날의 순창 고추장은 그 전통을 바탕으로 현대에 다시 만들어진 장이다.


봄이 되면 여전히 장 이야기가 나온다. 직접 장을 담그는 집은 많이 줄었지만, 된장과 간장, 고추장으로 이어지는 장 문화는 여전히 한국 식탁의 중심에 있다.


영조가 먹던 순창 고추장은 지금의 고추장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랜 시간 항아리 속에서 천천히 익어가는 장의 방식만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의 맛은 지금도 우리 식탁 위에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음식 너머에 머무는 속삭임, 두부의 이야기( ˶˙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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