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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Nov 03. 2020

11. 환대

내  불행이 어디로 흘러가는 중인지

당신이 와줘서 정말 기뻐요. 이제 말벗이 생겼으니 지내기도 참 좋을 거예요. 
아마 늘 즐겁겠지요. 손필드는 멋진 저택이거든요. 
지난 세월 동안 좀 방치되긴 했지만. 
손필드 저택에 도착한 제인은 '페어팩스' 부인으로부터 따듯한 환대를 받는다. 저택의 안주인인 줄 알았던 부인은 이 집 가정부였고, 점잖고 배려심 많은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았다. 제인은 페어팩스 부인을 통해 이 저택의 주인인 '로체스터' 씨에 대해 전해 듣는다. 그는 좋은 사람이지만 속을 잘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자신이 가르칠 학생인 '아델' 또한 프랑스어로 버림받은 여인의 노래를 부르는, 조금 이상한 여자 아이다. 그리고 부인을 따라 집안 이곳저곳을 소개받던 중 난데없이 귀청을 울리는 야릇한 웃음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게 되는데...   




다시 고아 소녀 이야기로 돌아왔다. 나는 제인을 맞아준 페어팩스 부인이 따듯한 사람이라 지금 안도하는 중이다. 고아 소녀는 '시련'과 동일어인지 모르겠다고 전제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아 소녀 주변엔 왜 이렇게 못된 여자 어른이 많은가. 신데렐라의 계모, 소공녀 세라의 민친 교장, 제인 에어의 린드 부인. 게다가 그들은 당시 비교적 성공한 중년 여성들이 아닌가. 경제적으로 풍족하고, 사회적 지위도 높다. 질투라고 하기에도 상대가 너무 어리다. 그런데 왜 오갈 데 없는 소녀 하나를 어쩌지 못해 이리도 모질게 구는 걸까. 


대프니 듀 모리에의 소설 <레베카>에도 이런 못된 여자 어른이 나온다. 주인공은 이제 갓 학교를 졸업한 젊은 아가씨. 소설은 그녀의 일인칭 시점으로 서술된다. 부모가 모두 돌아가시자 ‘나’는 어쩔 수 없이 한해 90프랑을 벌기 위해 천박한 부인의 시중을 들며 살고 있다. 그 해 여름, 몬테카를로의 한 호텔에서 ‘나’는 우연히 맨덜리의 부유한 귀족 맥심 드 윈터를 만나고, 곧 그와 사랑에 빠진다. 생각지도 못했던 맨덜리 저택의 안주인이 된 ‘나’. 하지만 아름다운 저택 맨덜리는 온통 1년 전 죽은 전부인 레베카의 흔적들로 가득하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과 부와 명예와 재치와 위엄을 다 갖췄던 레베카. 어른, 아이, 동물 할 것 없이 한번 보기만 해도 모두를 홀려버렸다던 레베카. 특히 레베카를 어렸을 때부터 돌보던 댄버스 부인은 사사건건 노골적으로 레베카와 나를 비교한다. 그리고 ‘나’를 돕는가 싶더니 안주인을 소개하는 첫 무도회에서 레베카가 죽기 전 입었던 마지막 드레스와 똑같은 드레스를 ‘나’에게 입힘으로써 파티를 망쳐 놓는다.   


"넌 자격이 없어. 그런 남편을 둘 자격도, 이 집을 가질 자격도 없지." 


안주인에게 자격을 운운하는 이 무서운 하녀는, '나'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떠나겠다고 하지만 그것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나'를 창가로 데려가 악담을 퍼붓는다. "다시 결혼도 할 수 없고, 살림도 젬병인 데다가, 의지할 가족도 없으"니 차라리 여기서 뛰어내리라고.  


하지만 정작 오갈 데 없는 처지는 '나'가 아니라 댄버스 부인이다. 그녀는 이제 너무 늙어 다시 결혼할 수도, 다른 곳에서 집사 자리를 얻어 나갈 수도 없다. 영화 <레베카> 속 그녀의 독백처럼 "여자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건 결혼과 시중뿐이지만" 둘 모두 그녀에겐 너무 늦어버렸다. 


그리고 불행해서 사악해진 이런 여자들의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 널리고 널렸다. 이건 내가 잘 아는 선배의 시집살이 이야기인데, 고작 나와 15살 밖에 차이 나지 않는 그녀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고릿적 조선 시대인 것만 같다. 시집오고 첫 명절이었다던가. 시댁이 큰집이라 명절 전부터 음식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며칠. 손님은 또 어찌나 그리 많던지, 3박 4일 동안 하루 종일 온갖 손님들이 다 들고 났다고 했다. 생선 굽고 전 부치고 국 퍼 나르고 차리고 치우면 또 그 일을 반복하고... 그렇게 너덜너덜 해진 마지막 날. 그녀는 간신히 용기 내어 시어머니께 한마디를 청한다. "친정 좀 다녀오면 안되겠냐"고. 그리고 싸늘하게 되돌아온 시어머니 말씀. "나는 명절에 친정 가본 적 없다."  


인간은 참 이상하다. 부당함, 불의, 불공정에 대해 누구보다 반발하지만, 막상 그 일이 나를 지나가버리면 쉽게 잊는다. 아니, 잊지 않고 되려 몸 어딘가에 꾹꾹 새겨 놓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듯싶다. 그리고 답습한다. 나만 불행하느니, 차라리 같이 불행하고자 한다. 불행하고자 하는 욕망이 함께 행복하고자 하는 욕망보다 강하다. 군대 복무 기간을 줄이는 이슈에 대해 논의할 때도 가장 많이 반대하는 게 예비군이라고 하지 않나. 정작 군 복무의 필요성에 대해 질문하면 딱히 근거도 못 대면서. 정말 이상하다. 그걸 가장 단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댓글과 가십이다. 한때 연예뉴스에 들러붙던 수많은 악성 댓글이나, 정치에 대해서라면 깎아내리기부터 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나는 그 심리 밑바닥에 깔린 그들의 불행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나마 밖으로 뻗칠 때의 불행은 여력이 남은 불행이다.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을 때, 간신히 붙들고 있던 알량한 자존심마저 건드려질 때, 그때부터가 위험해진다. 이제 어떻게 돼도 상관없는 불행이 되면, 그들은 목숨도 버린다.  


댄버스 부인의 욕망은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더 불행하다. 그녀는 그 큰 저택이 계절과 절기마다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식탁의 격식과 인테리어에 탁월한 감각을 가진 집사였다. 집안일에 관한 한 그녀를 따라잡을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욕망은 늘 안주인 레베카의 욕망을 추구했다. 내 것 아닌, 다른 여자의 욕망에. 레베카가 모든 행복의 기준이 되자, 그녀처럼 아름답지 않고 그녀처럼 부유한 남편과 저택이 없는 그녀는 불행해졌다. 옆집 여자보다 수완이 없어서, 살림 센스가 없어서, 아이 교육에도 발 빠르지 않아서 내가 자주 불행의 덫에 빠지듯. 


댄버스 부인이 정작 자신이 가진 능력에 집중하고, 자신의 가치를 세웠다면! 자신과 똑같이 불행한 처지였던 이 젊은 아가씨의 행운을 축하하고, 그녀가 맨덜리 저택의 안주인으로 당당히 설 때까지 그녀를 세워주는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환대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다시 제인에게로 돌아와, 나는 최대한 상상력의 나래를 펼쳐본다. 리드 부인은 죽은 남편의 사랑이 고팠던 외로운 여자였을지도 모르겠다고. 부유한 가정에 시집왔지만 남편은 아내와 자식들에게 눈길 한번 준 적 없이 바빴다. 그런 남편이 여동생의 딸이라고 데려온 아이를 쳐다볼 때는 눈에서 꿀이 떨어졌고, 그래서 그녀는 상심했다. 당시 여자에겐 오직 남편과 자식뿐인데, 달리 마음 둘 수 있는 곳도 없는데. 사랑이란 건 그 많은 재산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어서. 그래서 리드 부인은 불행했고, 제인에게 퍼부을 수밖에 없었다고. 가장 만만한 고아 소녀에게로. 우리의 어머니들이 한 때 며느리들에게 그랬고, 우리가 한 때 아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불행은 늘 가장 약자에게 흘러들어 가기 마련이라서. 


그러니 내 불행은 지금 어디로 흘러가는 중인지 살필 일이다. 



* 영화 <레베카>, 벤 휘틀리, 릴리 제임스/아미 해머 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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