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쏭마담 Nov 03. 2020

12. 여기서 끝일까 보아

 '송은주 투 컴'을 향하여

나는 저 경계선 너머를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그와는 다른 활기찬 미덕들이 존재하리라 믿었고
그 믿음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손필드 저택에 대한 첫인상은 시간이 지나며 더욱 긍정적으로 변해가는 중이다. 하지만 제인은 이따금 혼자 정원을 거닐 때나 지붕 위에서 멀리 들판이나 지평선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저 너머 펼쳐진 또 다른 세상에 대해 알고 싶다고. 배부른 소리임에 분명하고, 모름지기 인간은 평온하게 사는 것에 만족해야 하겠지만, 이따금 그녀는 이렇게 운명에 저항하고 싶은 강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어느 날 저녁, 편지를 부치러 가던 길. 숲 한가운데서 낯선 남자와 조우한다. 잘생기지도, 상냥하지도 않은. 그저 말에서 떨어져 도움이 필요한 한 남자를. 그리고 앞으로 그녀는 그를 운명이라고 부르게 될지도 모르겠다.




31개월. 동생이 생긴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혼자 놀기 시작했다.


때마침 보충해준 레고 블록과 

자석놀이 엠로드가 없었다면 

이 시기 아이는 뭘 하며 보냈을까.


동생이 껌처럼 달라붙어 있는 저녁 6시부터 밤 11시까지,

아이는 그렇게 혼잣 거리를 가지고 논다. 

"심심해 죽겠어, 아빠는 언제 와?"를 입에 달며.


나는 아이를 안고, 

하염없이 아빠를 기다리며

우와 멋지네~ 하고 가끔 추임새를 넣는 게 고작.

그런 아이가 가끔 안쓰럽다. 


요즘 아이는 아침저녁으로 괴물을 잡는데 온통 팔렸다.

아이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괴물과 싸우고, 엄마와 동생을 구출한다.


엄마 엄마, 나 좀 보세요~ 엄마, 이거 멋지죠?

엄마 이건 칼이에요, 괴물을 잡는 거야.

엄마, 목말라요. 우유 주세요.

엄마, 쉬! 쉬! 

엄마~~ 책 읽어주세요.

엄마, 나 찾아봐요~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어느 날 저녁, 아이가 "엄마, 이거 보세요"하는데, 

갑자기 그 소리가 너무 지겹게 느껴졌다.

언제 들어도 정겨워야 할, 아이가 엄마를 부르는 그 소리가.


그러고 보니

물려도 물려도 자꾸 젖을 찾는 둘째를 안고도,

매일 밤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앉아서 자는 남편을 보면서도,

아이 둘을 겨우 재우고 혼자 넋 나간 여자처럼 식탁에 앉아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 같다.


한 아이에게 집중하고,

그 아이가 빠는 젖이 황홀하고,

그 아이의 '엄마' 소리에 너무나 행복했던 나는 어디로 갔나. 


내 삶의 의미가 여기까지일까 봐 두렵고

이런 나를 통제하지 못할까 봐 두려운 거다.


이런 나에게 돌 던지지 마라.




둘째 아이 낳고 3개월 출산휴가 기간 동안 쓴 글. 싸이월드에서 캡처받아놓은 글을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았다. 그때도 나는 두려워하고 있었구나. 아이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지겹다고 하면 내 안에 모성이 부족하다고 할까 봐. 이대로 집안에 들어앉아 아이 수발이나 들게 될까 봐. 내 삶의 의미가 '아이' 앞에서 이렇게 딱 멈춘 채 움직이지 않게 될까 봐. 그리고 지금의 나도 그렇다. 


흔히 '중년의 위기'라고 말하는 '어두운 밤'을 지나는 중이다. 인생의 중반, 누구나 한 번쯤 겪게 된다는 정체성 혼란의 시기. 어떤 이는 제2의 사춘기라고도 하고, 인생의 후반을 설계할 또 다른 기회라고도 하는 그것. 융 심리학을 바탕으로 중년을 해석한 책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에서는 이 시기를 '중간 항로'라고 명명한다. 중간 항로란 원래 아프리카 해안에서 아메리카의 서인도 제도에 이르는 바닷길을 의미하는 단어. 그리고 이 바닷길이 실어 나른 게 무엇인가 하면, 바로 흑인 노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자비한 노예 상인에 의해 정처 없이 실려 다녀야 하는 노예. 그게 중년의 어두운 밤을 맞는 우리의 실존적 상태라는 거다.  


어린 시절 우리가 만나는 첫 세상은 부모다. 좋든 싫든 부모가 준 기질과 환경에 맞춰 세계를 배워나간다. 성장하며 그 역할은 학교와 사회가 넘겨받는다. 그때부터 우리는 이 세계가 원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아득바득 노력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에 맞춰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취직하고 연애와 결혼과 육아로 정신없이 끌려다닌다. 그리고 닻을 내린 항구에 서서 그제야 내가 떠내려온 지점을 확인한다. 이 곳은 내가 원하던 곳이던가. 내가 선택한 것이던가. 계속 살아갈 만한 곳인가. 저자는 이런 마흔의 위기를 '본성과 실제 선택들 사이의 점점 벌어지는 간격'들 때문에 발생한다고 얘기한다. '후천적으로 만들어낸 성격과 '자기'의 욕구 사이의 무시무시한 충돌'이 벌어지면서 시작되는 것이라고.(p.29-30) 


의무나 역할을 모두 벗어버린 나. 그는 누구일까. 나만의 고유한 것이라고 할 본성과 욕구는 어떤 것일까. 아마도 존재의 의미나 목적, 가치에 대한 질문일 그것. 과연 그 질문은 일과 가정과 역할에서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러다 작년 이 맘 때쯤 유튜브를 통해 '강남순'이라는 작가를 만났다. 미국 강단에서 활동하는 재미 교수였는데, '임마뉴엘 칸트, 한나 아렌트, 자크 데리다를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 코스모폴리터니즘과 연계한 종교 철학 담론'이 그녀가 가르치는 분야라 했다. 모두 내가 한때 흥미롭게 들여다봤던 철학자와 분야다. 한나 아렌트라면 이미 국내에도 친숙한 작가. 그런데 데리다는 누굴까. 유튜브에 검색해 보니, 그녀의 ‘데리다’ 강의가 찾아졌다. 그리고 첫 강의를 듣자마자 단박에 그녀에게, 그리고 데리다에게 반하고 말았다. 데리다의 ‘차연’이랄지, ‘투 컴 to come’ 개념 같은 게 내게 한줄기 섬광처럼 꽂혔다.


데리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철학자다. 흔히 해체주의 철학자라고 하는데, 해체주의 철학은 철학 중에서도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거칠게 말해서 해체란, 기존의 권위적인 것들에 대해 모조리 의문을 품고 질문하는 것을 말한다. 진리라고 하는 것들이 정말 진리가 맞는지, 그 뒤에 감춰진 의도나 배후는 없는지, 다른 해석은 불가능한지. 여태 이 세계를 단단하게 지탱하고 있던 모든 것에 딴지를 거는 철학이랄까. 그러다 보니 당연히 기존 철학자들로부터 공격도 많이 받았고 개념도 어렵다.


이런 식이다. ‘가능한 개념은 언제나 불가능한 개념이다.’ 그러니까 세상에 절대적 진리는 없으며, 어떤 진리든 그걸 진리라고 고정하자마자 더 이상 진리가 아니게 된다는, 그렇게 모든 것을 해체하다 보면, 우리 같은 범인들은 그만 머리가 복잡해져서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같은 결론에 금세 도달하기 마련인데...흠, 그러게 말이다. 나는 어쩌다 이런 말장난 같은 논리에 매혹된 것일까. 솔직히, 데리다 번역본 한번 제대로 읽어본 적 없는 내가 그 어려운 이론에 대해 알면 또 얼마나 알겠나. 다만 이 철학자가 이 세상을 견지하는 자세랄지, 그가 내세운 개념들이 품은 불확실성이나 불완전함 같은 뉘앙스가 좋아 보였다는 게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말한 ‘차연’이라는 개념은 프랑스어로 'difference', 즉 다르다(differ)와 지연한다(defer)를 조합한 단어라고 한다. 강연에서 강 교수가 예로 든 ‘사랑’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가 아무리 사랑에 대해 수십 가지 다양한 개념을 쏟아놓은들, 우리는 ‘사랑’이라는 '완전한 개념'에 다다를 수 없다. 사랑이라는 그 온전하고 충만한 의미에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똑같이 대응될 수 없으니까. 따라서 온전한 의미는 영원히 지연된다. 지연되는 의미만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해야 할까.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의 세계처럼, 완전한 의미는 어딘가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걸 그림자로밖에 경험하지 못한다. 


그래서 따라 나오는 개념이 ‘투 컴 to come’이다. 그 자체로 완전하진 않지만 미래에 도래할 어떤 완전한 것에 대한 열망 같은. 가령 '민주주의 투 컴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민주주의가 있다 할 때, 이 땅에서는 그 이상에 딱 맞춘 민주주의를 만날 수 없다. 다만 그건 계속 도래하고 있는 그 상태로만 존재 가능하다. 그 자리에 다른 단어를 넣어보아도 마찬가지. 이 땅에서 우리가 가치 두는 것들을 - 우정이나 소망, 가정, 정치, 대학 따위를 넣어보자. 그런 이상에 딱 맞는 완벽한 우정이랄지, 이상적인 가정이나 정치를 경험해본 적이 있던가. 아마도 대부분 고개를 저을 것이다. 


강의의 하이라이트는 강남순 교수가 그 '투 컴' 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보라고 제안했을 때였다. 강남순 투 컴. 그리고... 송은주 투 컴. 


그러자 사십 대 후반의 작가가 되기를 꿈꾸는, 그러나 자주 낙심하고 별 볼 일 없는 현재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부터 꿈이 없었다. 무엇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도, 목표를 두고 이뤄본 적도 없었다. 남들처럼 주어진 대로 대학에 가고, 적당한 나이에 만난 남자와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고, 어찌하다 보니 아이 둘을 낳고 경단녀가 되어 있는 나.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나에게 꿈이 없었던가, 아님 그걸 이룰 자신이 없었던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있기는 있었는지 조차 잘 모르겠는 내가 있다. 이런 나에게 데리다는 말한다. 이 세상은 그 자체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고. 이 세상은 늘 여러 가지 의미로 충만해 있다고. 지금 내 앞에 닫힌 것처럼 보이는 그 세상은 어쩌면 여전히 내게 유효한 열린 문일지도 모른다고.  


강남순 교수의 데리다 강연을 들으며, 처음으로 나는 ‘그녀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지나가버린 내 과거가 그녀처럼 풀렸었다면. 아버지를 따라 여러 나라를 경험하던 어린 시절, 외국어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그 나라 언어들을 배웠다면. 단지 먹고사는 쓸모와 유용함으로써가 아닌 철학함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나라에서 평생을 함께 할 인생의 철학자를 만났다면. 그의 사유와 담론에 깊이 천착한 그것이 내 무기가 되고 삶의 방편이 되었다면. 그녀처럼 이렇게 코즈모폴리턴적인 사고와 삶의 방식을 가지고 변방인으로 살 수 있었다면! 


오십을 목전에 두고 처음으로, 내가 꿈꾸던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녀를 통해 알게 되었다. 물론 그건 그녀가 성취하고 이룬 꿈. 여전히 내 것이 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예전 같으면, 이제 와서 뭘, 이라고 했을지 모를, 학창 시절에도 없었던, 뭔가 되고 싶다는 꿈. 미래를 향한 기대감. 송은주 투 컴. 그걸 내 앞에 열린 미래로 받고 싶었다. 


그리고 그 꿈 덕분에 나는 그 이후로도 자주, 가슴이 뛰게 되었다.



- [유튜브] <데리다와의 데이트> #1,2,3,4. 강남순, 새물결아카데미.

-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 제임스 홀리스 저/김현철 역, 더퀘스트.


매거진의 이전글 11. 환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