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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Nov 09. 2022

구원의 확신을 묻는 당신의 폭력성

성령으로도 하나 될 수 없는 세대 간 격차



시어머니에 대해 나는 늘 '뜻밖의 선물'이라고 생각해왔다. 모태 신앙인 내 주변엔 온통 기독교인 일색이지만, 지금까지도 어머니만큼 말씀에 '진심'인 교인을 만나본 적이 없다. 우리는 만나면 늘 하나님 이야기로 꽃을 피우곤 했는데, 나는 그 시간이 참 좋았다.


첫아이 6개월 때쯤인가. 그날도 오랜만에 서울에 올라오신 어머니와 1시간 넘게 구약과 신약을 넘나들며 신나게 성경 얘길 하고 있었다. 근데 우리 옆에서 배를 깔고 혼자 버둥거리고 놀던 아이가 갑자기 "깔깔깔깔"하고 웃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음성학적으로는 '하하하하'에 가까운 그 "깔깔깔깔"은 일회로 그치지 않고 그 뒤로도 선율을 그리며 일곱 마디쯤 계속되었다. 그 웃음이 너무 기이해 얼른 카메라를 들이댔지만, 그땐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리 졸라도 아이는 빙글거리기만 할 뿐 다시 '소리 내어' 웃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하나님이 웃으신 거라 생각한다.     


그날 이후부터 우리의 말씀 배틀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돌이켜 보면 초반엔 주로 어머니가 우위를 점했던 것 같다. 어머니가 내 신앙과 교리에 대해 점검하는 질문을 던지면 나는 어디서 주워들은 말씀을 끌어와 내 신앙을 옹호하는 식이었는데... 말미에는 당연히 말씀에 해박하신 어머니가 교정해 주시고, 나는 그 말씀에 골똘하며 다음 만남 전까지 심기일전하곤 했다. 그때 어머니의 질문에 반박하면서 나의 성경 지식도 차근차근 쌓여간 것 같다. 하지만 말씀 논쟁이라는 것이 그렇듯, 늘 좋을 수만은 없었다. 그건 한 세계와 한 세계가 만나는 거대한 격돌의 순간이기도 했기에. 그리고 만의 말씀과 논가 쌓여갈수록 나는 어머니와 우리 세대와의 희미한 간극이 더 또렷해지는 걸 느꼈다.  


일례로 어머니께서는 한동안 내게 '구원의 확신'에 대해 집중적으로 물다. 어머니 본인이 오랫동안 구원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20년 넘게 교회를 다녔고, 주변에서도 늘 "권사님 만한 믿음이 없다"라고 말했지만, 어머니는 스스로를 속일 순 없었다고 했다. 설교 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계속되자  그때부터 혼자 말씀을 집중적으로 붙들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어느 날, 갈라디아서 2장 20절 앞에 와르르 무너지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회심을 경험하셨다고 한다. 그때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고 난 후엔 절대 흔들림이 없었다고 다. 그러니 "너는 언제 구원의 확신을?"이라고 물어보시는 건 어머니 입장에서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다.


문제는 내가 그 질문 앞에 정확하게 몇 날 몇 시까진 아니더라도 어떤 말씀인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말꼬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 나는 구원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지만, 내게는 여전히 죄책감과 죄짐이 있었고 어느 날은 확신에 차 눈물을 흘리며 할렐루야를 외치기도 했지만 또 어느 날은 내가 믿는 자가 맞는지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던 거다. 그리고 어머니 눈에는 이런 며느리가 내일이라도 당장 원의 확신 없이 죽는다면 지옥행이 분명해 보였으므로, 마음이 다급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 어느 날 '출장 마사지 전문', 아니 '출장 구원확신 전문'쯤 되는 장로님을 내게 붙여 주셨다.


그 주 토요일. 우리 집으로 오신 그 장로님은 예의 내게 기독교의 핵심 교리와 확신을 묻는 질문을 연거푸 퍼부었고, 나는 또다시 어쭙잖은 논리로 내 신앙을 항변하고 있었다. 그렇게 1시간쯤 시간이 흘렀을까. 내가 영~강퍅해 보였나? 아님 그쪽 진영으로 쉽게 넘어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싶었는지, 마침내 장로님은 마지막 극약처방을 내미셨다. 장로님이 회심의 미소를 띠며 본인의 노트북을 열고 동영상 하나를 클릭했을 때, 그곳에  지옥도가 펼쳐졌다.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한 영화 <콘스탄틴>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불교의 탱화 같기도 한 그곳엔 시뻘건 지옥불 한가운데를 배경으로 쉴 새 없이 지옥불로 떨어지는 인간들 가득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에 딱 알맞을 불구덩이 속으로 반쯤 화상 입은 붉은 인간이 굴러 떨어지고, 그 뒤를 다시 온몸이 거무스름한 인간이, 그 뒤를 이어 다시 그 짓을 수천 번쯤 반복한 것처럼 보이는 새까맣게 탄 인간들이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시시포스의 무한 형벌처럼 지옥불로 떨어지고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 확신했다! 우리 사이에는 성령의 하나 됨으로도 가닿을 수 없는 또렷한 간극이 있다는 걸. 가부장적 질서 아래에서는 아무리 좋은 시어머니와 며느리도 좋은 시부 관계가 되기 어렵다는 그 진실만큼이나 먼, 우리 사이에는 실로 거대한 세대 간 격차가 있다는 것을 그 지옥도보여주고 있었다. 그건 공포를 이용하여 무지한 민중을 굴복시켰던, 저 옛날 악한 권력자들이나 쓰던 방식이었다. 지옥은 이렇게 무서운 곳이야. 그곳에 가기 싫으면 내 말을 믿어! 예수 천당, 불신 지옥!처럼 한때는 누군가에게 했을지 모를. 하지만 이제는 실효를 다한 전도 방식. 리고 알았다. 그 방식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 기독교는 영원히 많은 이들의 조롱거리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걸. 그런 방식으 구원의 확신을 묻는 당신의 진심 또한 우리 세대에는 폭력적인 언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행히 그 후 나는 한 신학자의 입을 통해 어머니가 그토록 원하는 믿음과 구원에 대한 확신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고백을 그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믿음'에 별로 관심이 없는 이유는 내게는 하나님이 그냥 '다가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이 그냥 '다가오는' 이들도 있다. 내 아내 폴라, 홀리패밀리성공회교회의 티머시 킴 버러 주임 사제, 내 친구 샘 웰슨에게는 하나님이 그냥 다가온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게는 그와 같이 하지 않으셨다. 나는 기도가 쉬운 적이 없었다. 불평하는 게 아니다. 나는 이런 내 모습이 하나님이 더 이상 그냥 '다가오지' 않는 세상에서 그분을 섬기는 것의 의미를 숙고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본다.
- <한나의 아이> 스탠리 하우어워스 저, IVP. (20-21p)


믿음을 고백하고 확신을 갖는 일은 사람들 개개인의 삶의 경험과 개성만큼이나 다 다르다.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자신 믿음에 대한 '선언'보다 그 선언이 '살아가는 방식에 미치는 영향'에 훨씬 많은 관심이 있음을 이야기 한다. 왜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에 더 초점을 맞추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여러 해에 걸쳐 나는 '어떻게 그리스도인 다울 수 있는지' 알지 못하고서는 기독교의 '무엇'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해 왔다.


'무엇'이 맨 처음 믿음이 내 안에 씨앗을 내린 순간이라면, '어떻게'는 그걸 매일매일 살아내야 하는 순간들이 아닐까. 'already but not yet'이라는 이미 와 아직 사이에서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다. 일회성 세례와 고백이 아닌, 매일매일 성령 충만을 살아내기 위해 나는 매일 죽노라 고백하던  바울의 고백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다운 것이지 매번 고민하며 가슴을 치는 구도자의 물음이다.


그러니, 나는 그저 한두 마디 언어로는 그 깊고 넓은 믿음의 세계를 단언할 수 없었을 뿐이다.



[헤더 이미지] <신곡> 단테 알리기에리 저, 서해문집. '지옥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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