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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Feb 09. 2024

나는 공감하는 대신 '왜?'라고 물었다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를 가지고 있나요?


는 공감하는 대신 왜?라고 물었다

남편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지지를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 세상에 마음 먹으면 할 수 없는 일이란 없었고,해야 할 일을 미뤄본 적도 없었다. 이것이 저것보다 더 나을지에 대해 재는 대신 그중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잃을 자세로 바로 행동에 돌입하는 사람. 그에게 노력에 대한 성취는 당연하고, 흥분하거나 자랑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나 전전긍긍하는 마음, 그리하여 끝내 응어리지고 사는 마음 같은 것에 대해서는 당연히 모른다. 한마디로 감정을 잘 꺼내 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감정적인 사람에 대해서 극혐 한다. 사춘기 내내 나와 꼭 닮은 아들이 어렵게 부린 의지를 다음날 쉽게 바꿔버릴 때마다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학생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사춘기 내내 아들과 남편은 그나마 어쩌다 마주 앉은 식탁에서 이렇게 한쪽은 감정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고, 다른 한쪽은 이를 뚝뚝 잘라내는 방식으로 대화를 나눴다.


눈높이를 낮출 생각도, 감정에 공감할 줄도 모르는 남편이었다. 주변에서 아들 사춘기를 불안 높은 엄마보다 대범한 아빠에게 맡기는 것이 낫다고 충고했지만, 선뜻 그럴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에게 아들을 맡겼다간 향고래 얼굴에 남은 혈투의 흔적처럼 안 그래도 예민한 아들 감성에 무수한 생채기를 낼 것이 뻔했다.  


감정이 뭔지도 모르는 남편보다는 내가 당연히 낫지. 나는 내가 감정에 잘 휘둘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감정에 대해 적어도 남편보다는 잘 이해하는 편이라 생각했다. 그 또한 착각이었지만.


아들 사춘기 기간 동안 나는 아들에 대해 꽤 집요하게 물었다. 그 시절은 대체로 이런 패턴으로 돌아갔던 것 같다. 아들의 문제 행동 앞에 '도대체 왜?'라고 묻고, 끝내 답을 찾을 수 없자 '우울'에 빠지는 그런 사이클. 나는 감정적인 사람이었고, 아들도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아들의 감정이 내게 익숙한 감정인 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이해되지 않는 감정을 만날 때마다 계속 아들을 향해 왜?라고 물었다. 부모의 강요도 없이 뭐든지 자유롭게 선택하고 그렇게 초등학교 내내 밝게 반짝이던 네가, 몇 년 동안 원 없이 게임을 해봤으면 이제 공부할 때도 되었구먼, 뭐가 아쉬워서 네가? 이렇게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부모의 속을 긁고 인생을 방기하기만 하며 사는 건지. 우리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이렇게 부모에 대해서는 하나도 헤아리지 않고 미래에 대해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무감각한 아들로 자라게 되었는지. 도저히 아들의 감정과 선택이 이해되지 않아, 나는 묻고 또 물었다. 왜? 도대체 왜? 너는 이렇게 너를 망가트리고 사는 건데? 왜?  


왜?로 점철된 질문 자체가 내가 아들에 대해 하나도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반증이었는데, 그때는 몰랐다.


집에만 오면 널부러져 있는 아들을 게으르다고만 생각했다. 예민하고 자유분방한 애가 그나마 아침마다 꼬박 학교에 가고 규칙을 지키고 그 지겨운 공부를 한다고 하루 종일 꼼짝없이 앉아 있다 보니 집에 와서는 좀 편히 긴장을 푸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왜 학교에서는 별 문제 없이 지내면서 집에서는 잘하지 않을까? 우리 부모를 무시하는 걸까? 내가 아들에 대해 뭘 잘못하고 있나? 그중에서도 제일 이해되지 않는 건, 걸핏하면 죽어버리겠다고 하는 말이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맨날 열심히 해보겠다고 하면서 정작 의지를 부리지 않는 건 자기면서, 제대로 노력 한번 해보지 않으면서 대체 자살하겠다는 극단적인 발언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어찌 그리 뻔뻔한지. 그게 자신을 믿고 기다려준 부모의 기대에 늘 미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실망이요, 그런 자신을 향해 스스로 내리는 징계였다는 걸 몰랐다. 그런 네가 입을 꾹 닫고,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으려는 너를 나는 그저 게임이 전두엽을 망가트린 탓이라고만 원망했다.


나는 내가 권위와 훈계를 적절히 하고 좋은 습관을 들여주는 부모는 아니지만, 늘 다양성을 추구하고, 다른 것에는 열려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나는 아들 감정 하나 헤아리지 못하는 에미였다. 나는 계속 왜? 냐고 묻는 사람이었다. 너는 왜 그렇게 밖에 못하는 사람이냐고, 왜 너는 (좋은) 부모인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나쁜) 아들이냐고. 그렇게 수없이 무언의 평가와 비난으로 다그치는 사람이었다.


감정적이지만 자신의 감정에 대해 잘 들여다 보고 적절하게 표현해 본적 없는 건 아들이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그건 내가 남편과 가정을 꾸리며 함 만들어내지 못한 언어였고, 아들에게 가르치지 못한 언어였다. 그리고 분노조절을 못하는 남자, 신경증으로 예민해진 여자... 한 집 걸러 요즘 왜이렇게 정신병이 많아졌어? 라고 거칠게 묻는 질문 중 상당 부분이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가정적 분위기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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