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도 잔소리가 많은 사람이 아닌데, 아들 사춘기 때 딱 하나 섭섭해한 게 있었다. 아빠가 퇴근하고 들어올 때 아들들이 맞이하러 나오지 않는다는 것.
애들 어렸을 때야 택배가 와도 반갑게 뛰어나오는 천방지축들이었으니, 꼭 가르치지 않아도 얼떨결에 아빠의 퇴근을 맞이하곤 했다. 하지만 사춘기가 되면서 학원 때문에 저녁을 제각각 밖에서 해결하게 되고 집에 없을 때가 더 많아지자, 서로의 인기척에 무심한 게 일상처럼 되었다. 그러다 보니 간혹 애들이 집에 있을 때조차도 아빠가 퇴근해 들어와도 맞이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 같다. 어느 날, 퇴근하고 들어온 남편이 아들 방 문을 열었는데, 아들이 한창 게임에 빠져 고개를 돌리는 둥 마는 둥 하자 휘유, 하는 남편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유독 크게 들린 것을 보아 그 한숨소리는 집안의 가장이 집에 들어와도 아들을 내다보게 가르치지 않은 나를 향한 것임이 분명했다.
변명을 늘어놓자면, 나는 굳이 그런 것까지 가르쳐서 해야 하는 것인 줄 몰랐다. 남편은 그런 것쯤은 집에서 노는 여자가 당연히 아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겠다만. 부부는 이렇게 서로 착각하며 산다. 이 남자와 함께 살면 혼자 살 때보다 더 행복해질 거라는 착각, 결혼하면 연애할 때보다 더 좋아질 거라는 착각에 비하면 세발의 피에 불과하겠지만.
반려견 훈련사 강형욱 씨가 파라오 하운드를 훈련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유독 산만해 보이고 가만히 있을 줄 모르는, 힘이 넘치는 사냥견이었다. 시각이 예민해서 민첩한데, 터그를 가지고 놀 때 자꾸 무는 문제 행동을 교정하기 위해 출연했다. 강 훈련사는 특유의 하트 뿅뿅한 눈을 하고는 이내 터그를 줄에 매달고 실내운동장을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땅바닥에서 설치류를 많이 잡았을 사냥견의 특성을 활용하여 바닥에 터그를 내리쳐 흔들어 댄다. 터그를 활용해 엑셀과 브레이크를 동시에 잡아주며 밀당을 한다. 이길 것처럼 하다가도 이내 힘을 빼면서 엄살을 떨다. 한시도 딴생각할 틈 없이 개를 몰아붙인다.
강 훈련사는 개와 대치하는 와중에도 칭찬을 그치지 않는다. 푸드 드라이브로 훈련되는 개보다 이렇게 플레이 드라이브로 훈련되는 강아지들이 훨씬 영특하다며. 온몸을 던져 놀고 있는 두 천재견 옆에서 이를 지켜보는 주인 부부는 흐뭇해 어쩔 줄을 몰라한다. 입에서 회개가 절로 흘러나온다. "우리가 그동안 잘 못 놀아줘서 여기 와서 우리 개가 이렇게 재밌나 봐요." 답글도 주루루 달린다. "강형욱 안 만났으면 저게 재능임을 모르고 계속 '산만하고 가만히 있을 줄을 모르는 애'로 남았을 거라 생각하니 상담사가 진짜 중요한 직업인 거 같음". 나도 감탄과 한탄이 절로 나온다.
애나 강아지나~ 아빠가 이렇게 온몸으로 놀아주면 부를 때 왜 안 달려가겠누!
아들을 키우는 동안 옆집 아빠 저주에 걸려 적지 않게 힘든 시간을 보냈다. 돈도 잘 벌어 오는 옆집 아빠는, 아내의 생일에 서프라이즈를 해줄 만큼 자상한 데다, 애들이랑은 어찌나 잘 놀아주는지! 늘 옆집 아빠들은 완벽하다. 그리고 그 모든 게 지나친 욕심이라는 걸 안 후에도 여전히 포기되지 않는 아빠 덕목 하나가 있었다. 바로 온몸으로 놀아주는 아빠다. 남편이 아내와 부모님께 잘하는 것은 돈이 많아야 커버칠 수 있는 비교적 세속적인 덕목이라면, 온몸으로 놀아주는 아빠는 정말 몸뚱이 하나만으로 충분히 가능한 덕목이다. 그래서 온갖 들끓는 욕망 중에서도 가장 다스리기 어렵다.
게다가 온몸으로 놀아주는 아빠론은 아들 사춘기를 지나며 그 가치가 배가 되는데. 가령 아들 사춘기를 치른 내 주변 스무 집 중에 거의 유일무이하게 아들과 무탈하게 보낸 집 하나가 이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 집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어렸을 때부터 아빠 차가 딱 주차장으로 진입하면 그때부터 아이들이 난리가 난다. 출입 알림 센서가 울리면 후다닥, 아이들이 하던 걸 모두 내려놓고 집안 곳곳으로 숨어들기 시작한다. 커튼 뒤로, 화장실 욕조 속으로, 소파와 베란다 사이로. 기대와 흥분으로 헐떡이는 숨을 꼭꼭 참으며. 이윽고 아빠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여기저기 아이들의 참다못한 웃음소리가 킥킥대며 새어 나온다. 아빠는 커튼 뒤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더듬거리면서도 우리 아들이 어디 있지?를 연발한다. 화장실 불을 켰다 끄면서도 아들을 찾지 못한다. 못 찾겠다 꾀꼬리를 연발하며 집안을 돌아다닌다. 일명 못 찾겠다 숨바꼭질.
그렇게 퇴근시간마다 기대와 흥분으로 아빠를 기다리는 옆집 아들 얘기가 그렇게나 부러웠더랬다. 놀랍게도 그 집 아들들은 사춘기, 폭풍처럼 몰아치는 신체와 정신적 변화 속에서도 늘 아빠와 함께 하던 이날의 기대와 흥분을 기억한다. 아빠 말이 우습고 엄마 잔소리에 토를 달면서도, 얼르고 달래면 마지못해 청을 들어준다. 아빠 퇴근에 맞춰 몸이 튀어나온다. 어떤 논리도 궤변도 통하지 않는 사춘기에 그 옛날 아빠와 함께 했던 시간과 추억만이 오로지 작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