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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이형 May 12. 2017

학교 문화와 교육의 불일치성, 그리고 민주주의

학교는 그 자체로 문화이다. 누구든 학교를 다녀본 사람이라면 다소 상이하게 기술할 가능성은 존재하지만 일반적인 공통점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건 아마도 신나고 즐거운 곳이었다가 이내 곧 지겹고 무의미하며 힘듦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시험에 대한 불안, 성공에 주눅 든 삶, 온갖 강제와 규칙으로 인해 갑갑한 곳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친구들과의 즐겁고 재미있던 추억과 더불어 비방과 욕설, 큰 소리와 싸움 등으로 얼룩진 추억이 혼재되어 있고, 열심히 공부하며 앎에 대한 희열이 있지만 무시와 차별 속에 실패의 두려움이 사로잡던 시간들로 인해 얼른 학교를 떠나고 싶었던 마음이 뒤섞인 기억으로 학교의 문화로 규정할 수 있다. 


  학교는 비민주주의적 공간임에 틀림없다. 수평적 관계의 평화와 존중보다는 수직적 관계의 위계질서 속에서 자행되는 온갖 폭력들은 부르디외의 아비투스가 되어있다. 자신의 행위를 성찰하지 못하고 부당하다고 느끼는 것이라도 그대로 자행하는 무의식적 폭력의 공간이다. 이것은 관리자와 교사의 관계와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서로 닮은꼴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은 제도적 학교나 문화적 학교에 대한 비판이 아닌 개인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이고 배척과 소외로 이어지면서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암시를 준다.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 채 발의된 의견은 사견으로 치부하고 갈등유발자로 꼬리표를 붙여 부정적 인식으로 덧씌운다. 


  배움의 원천적 공간이어야 하는 학교에서 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교육을 성공과 혼동하고 있다. 사회적 성공으로 증명되는 교육이 곧 학교 교육인데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알고 보면 개인의 노력뿐이다. 사실 그 이면에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이 결코 적지 않은 영향을 발휘하고 있음에도 그것에 대해서는 함구한 채 학교 교육에의 복종을 강요하고 있다. 출석 여부와 지각 여부로 개인의 도덕성을 판단하고 교사와 학교의 결정에 쉽게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학생들의 위치는 배움의 주체로서의 학생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브루너가 핵심적으로 말하는 의미 만들기는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평가와 시험의 범위 내에서 교사가, 보다 정확히 말하면 국가가 정해준 의미를 받아들여야 하는 상징적 폭력이 교육의 의미로 대체되어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불안과 두려움이 저변에 깔린 정서적 반응이 되며 이는 안전을 추구하는 문화로 이어진다. 고차원적 사고는 다룰 수 없는 것이 되고 수긍하기 쉽고 민원이 나오지 않는 것이 정답이 되는 문화, 그래서 암기가 성행하는 문화가 된다. 수준은 자연적으로 떨어지고 질문은 쉽게 제기하기 힘들며 다른 생각은 불편함 심지어는 위협이 된다. 획일성에서 벗어나야 하는 필요성을 좀처럼 수긍하려 하지 않는 경직되고 편협한 곳이다. 


  다른 의견을 통해서 생기는 갈등이야말로 배움의 에너지가 된다. “갈등은 우리가 공개리에 아이디어를 검증하는 역동적인 장이고 서로를 격려하고 세계 인식을 더욱 폭넓게 해 주는 공동의 노력”(파커 파머, 2013)이다. 다양성은 머리 아픈 골칫거리가 아니라 생동성이고 구성원들의 사고와 안목을 확장시키는 근원이다. 그것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당연한 우리 삶이다. 삶은 복잡성을 전제한다. 이를 단순화시키는 것은 특정한 정보처리나 일의 완성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지 복잡성을 배제하는 것이 교육은 아니다. 교육은 학교라는 제도를 통해 특정 이데올로기가 재생산되고 주입되는 것이거나 성공을 위해서 개인의 노력을 부추기되 정확한 뒷받침은 하지 않는 불친절한 행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성장과 발전에 대한 자연스러운 욕구를 드러내고 이를 충족시키며 위대함에 이르게 하는 통로의 기회이자 장이다. 학교가 그런 곳이 되기 위해서 가장 시급한 것이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는 구성원의 목소리가 스며드는 장이다. 개인과 개인이 소통을 통해 연결되면서 동시에 다양한 의견이 충돌되고 갈등을 일으키지만 그것이 하나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고 관용의 문화 속에서 타협이 수시로 이루어진다. 이런 민주주의 속에서 학습자들이 서로 서로 도와가면서 학습하는 장소인 소사회를 이룰 수 있다. 또한 민주주의 안에서 구성원들은 소통하며 공동의 집단 작업을 할 수 있다. 


  학교는 다양한 시도와 도전이 용인되어야 한다. 그것이 현재의 경직된 맥락 안에서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의미 만들기 작업을 보장해주는 기관이 되려면 실패를 통한 배움이 장려되어야 한다. 교과서에 적힌 내용을 답습하는 무의미한 주입에서 과감히 벗어나서 공동의 작업을 통해 다양한 소통을 경험하고 생각과 생각이 만나며 교섭작용을 통해 경험이 공유되기 시작하면 생기 있는 배움의 터전으로 변모될 것이다. 그런 학교가 학생들이 자기 마음에 품을 수 있고 자기 이야기를 쓰며 개인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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