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게 묻다

밤바다의 속삭임

by 덕구

- 심연과 별빛 -


차갑고 격렬한 물살이 은채의 온몸을 집어삼켰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방금 전까지 필사적으로 달려오느라 뜨거웠던 피부는 순식간에 차가운 물에 잠기자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고양이처럼 물이 닿는 느낌이 끔찍하다'는 생각은 본능적인 경고음처럼 그녀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털 한 올 한 올이 물에 젖어 축 늘어지는 감각은 기묘한 불쾌감을 동반했다. 차갑고 질척거리는 물이 그녀의 발목과 다리, 이어서 허리와 어깨까지 감싸고 들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하천의 어둠 속으로 빠져들면서 그녀의 시야는 온통 물속의 검푸른 색으로 뒤덮였다. 패닉에 가까운 공포감이 그녀를 덮쳤다. 이대로 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허우적거리는 손발은 제멋대로 움직이며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 폐는 점차 산소를 갈구했고, 고양이 귀는 먹먹하게 물소리만을 잡아냈다. 몸을 지탱할 수 없는 차가운 심연 속에서 은채의 의식은 점차 흐려져 갔다. 흐릿해져 가는 시야 속에서, 마치 마지막 순간의 환상처럼, 귀엽게 생긴 작은 형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동그란 몸통에 수많은 다리가 달린, 마치 축소판 문어 같기도 한 생명체들이 그녀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들은 몸에서 은은한 빛을 뿜어내며, 차가운 물속을 따뜻하게 비추는 듯했다. 빛나는 문어들은 작은 다리로 은채의 팔과 다리에 부드럽게 달라붙었다. 불쾌하기는커녕, 어쩐지 그들의 촉수는 부드럽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변화가 찾아왔다. 차갑고 끔찍하게만 느껴지던 물속이 거짓말처럼 따뜻하고 포근하게 바뀌었다. 마치 따뜻한 온천수에 몸을 담근 듯, 그녀의 몸을 감싸던 모든 차가운 기운이 사라졌다. 물은 이제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부드럽고 섬세한 이불처럼 그녀를 감싸 안았다. 차오르던 공포감은 사그라지고, 물속을 유영하는 작은 문어들의 빛나는 몸뚱이가 자장가처럼 그녀를 감싸는 듯했다. 평화로움. 너무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 평화로움이었다. 물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조차 사라지고, 이 알 수 없는 따뜻함 속에 영원히 머물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따뜻하고 포근한 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이내 온몸이 붕 뜨는 듯한, 맹렬한 하강감이 그녀를 휘감았다. 마치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밑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은 아찔한 느낌이었다. 예상치 못한 중력의 변화에 은채는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은 통제할 수 없이 빠르게 아래로, 그리고 어디론가 수평으로 끌려가는 듯했다. 물살은 더 이상 포근하지 않았고, 압력이 강해졌다. 물속에서 숨을 참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녀의 폐는 다시금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모든 감각이 혼돈 속으로 휘말려 들어갈 때쯤, 차가운 물속에서 벗어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차가운 바람이 다시 피부에 와 닿았고, 몸이 격렬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눈을 뜨기도 전에 몸이 무언가에 부딪히며 옆으로 굴러갔다. 거친 모래와 조약돌이 피부를 스치는 감각이 생생했다. 폐에서 억눌렸던 공기를 한꺼번에 토해내며, 은채는 기침을 터뜨렸다. 축축하고 짠 냄새가 섞인 공기가 폐 속을 가득 채웠다.


몸은 무언가에 떠밀리듯 해변으로 떠밀려와 있었다. 옆으로 누운 채, 차가운 물을 온몸에 뒤집어쓴 은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춥다는 생각보다는 이 알 수 없는 상황에 대한 혼란이 더 컸다. 눈을 힘겹게 뜨자, 망막 가득 밤바다의 풍경이 들어왔다. 지평선 너머로 아스라이 수평선이 이어져 있었고, 하늘에는 거대한 보름달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달빛은 수면 위로 은빛 길을 드리우며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발산했다. 파도 소리가 귀청을 때릴 듯 울려 퍼졌다. 하천의 작은 물결과는 비교할 수 없는 웅장하고 끝없는 파도 소리였다.


밤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처음에는 차가웠지만, 이내 물에 젖은 몸을 상쾌하게 씻어주는 듯 기분 좋게 느껴졌다. 짠 내음과 시원한 바닷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여전히 몸에 젖은 물 때문에 싸늘했지만, 그 춥다는 감각조차 새로운 모험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물에 젖은 고양이 귀가 축 처져 있었고, 꼬리는 축 늘어진 채 바닥에 닿아 있었다. 물에 젖은 털은 엉망이었지만, 은채는 이제 자신의 변화된 모습에 대한 경악보다는,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다음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희미한 기대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감각이 무척 기분 좋았다. 부드럽고 고운 하얀 모래가 발가락 사이를 간질였다. 차가우면서도 보송한 감촉은 방금 전 물속에서의 끔찍했던 감각을 잊게 할 만큼 황홀했다. 모래밭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마치 온 세상이 그녀의 발밑에 놓인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녀는 천천히 맨발로 모래를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발걸음마다 모래는 그녀의 발을 부드럽게 감쌌다가 놓아주었다.


고개를 들어 바다 쪽을 바라보자, 저 멀리 희미한 불빛이 반짝였다. 등대였다. 홀로 밤바다를 지키는 듯, 규칙적인 간격으로 깜빡이는 등대의 불빛은 왠지 모르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때, 은채의 시야에 다시 익숙한 빛이 들어왔다. 등대의 방향으로, 빛의 구체가 둥실둥실 떠 있었다. 마치 그녀를 기다렸다는 듯, 천천히 등대 방향으로 움직이며 길을 안내하는 듯했다. 조금 전 책을 삼켜버린 것에 대한 서운함과 야속함이 남아 있었지만, 동시에 은채는 이제 그 구체가 자신을 새로운 목적지로 이끄는 길잡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은채는 바다 바람과 부드러운 모래를 느끼며 천천히 등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발걸음은 여유로웠지만, 동시에 무언가에 이끌리듯 망설임이 없었다. 물에 젖은 몸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가운 바람에 오히려 건조해지는 듯했고, 차가운 기운은 점차 사라져갔다. 눈에 보이는 것은 드넓은 바다와 밤하늘, 그리고 자신을 이끄는 빛의 구체뿐이었다. 도시의 소음과 복잡한 생각들은 파도 소리에 휩쓸려 사라졌다. 이곳은 온전히 그녀 자신과, 그녀의 새로운 몸, 그리고 이 알 수 없는 세계가 함께하는 공간이었다. 그녀는 점차 이 모든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도 묘한 해방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 불청객 -


등대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길었다. 모래사장이 끝없이 이어진 듯 느껴졌다. 은채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문득, 저 멀리 모래사장 한구석에서 희미한 불빛이 깜빡이는 것을 발견했다. 모닥불이었다. 밤하늘 아래 작게 타오르는 불꽃은 마치 그녀를 따뜻하게 초대하는 듯했다. 몸에 젖은 물기와 차가워진 공기 때문에 온기가 필요했던 은채는 지체 없이 모닥불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모닥불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장작이 타닥타닥 타오르는 소리가 밤바다의 파도 소리와 어우러져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붉은 불꽃은 주변의 어둠을 부드럽게 밝히며, 따뜻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은채는 불꽃을 향해 손을 뻗어 언 몸을 녹였다. 따스한 불꽃이 그녀의 젖은 털과 살갗을 데우자, 온몸에 퍼져 있던 냉기가 서서히 사라지고 편안함이 밀려왔다. 마른 장작이 타는 냄새와 함께 바다 특유의 비릿한 내음이 섞여 묘한 향기를 풍겼다.


은채는 모닥불 옆에 쪼그려 앉아 불꽃을 응시했다. 불꽃은 살아있는 듯 춤을 추며 이글거렸다. 타오르는 불빛 속에서 그녀는 바다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광활하고 검푸른 바다는 어둠 속에서도 신비로운 생명력을 품고 있었다. 밀려오는 파도 소리는 일정한 간격으로 그녀의 귀를 채웠다.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보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하자, 고양이 귀는 파도 소리 사이로 들리는 미묘한 해양 생물들의 움직임, 멀리서 들리는 바람의 속삭임까지 잡아냈다.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새로운 감각 속으로 스며들었다. 평온함. 오랜만에 느껴보는 마음의 평온함이었다.


그 평화로운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바다를 보고 있자 어느새 인기척이 느껴졌다. 은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붉게 타오르는 모닥불 빛 너머로,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두 남자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만남에 은채의 몸은 순간 경직되었다.


- 혼자 계시네요? 늦은 시간에 꽤 위험한데.


먼저 입을 연 남자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은채를 바라보았다. 다른 한 명도 옆에서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두 남자 모두 어둠 속에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잘생긴 얼굴이었다. 모닥불 빛에 반사된 그들의 날카로운 턱선과 오뚝한 콧날은 마치 조각상처럼 완벽했다. 평소 같았다면 이런 외모의 남성들에게 마음이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스무 살 초반의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은채에게 이 정도의 외모를 가진 남성들의 접근은 분명 설레는 일이었을 테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내면에서는 알 수 없는 거부감이 치솟았다.


고양이의 직감.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불편함이었다. 그들의 말소리는 부드럽고 친절했지만, 어쩐지 그들의 눈빛에는 위화감이 서려 있었다. 너무나도 완벽한 잘생김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무언가가 그녀의 새로운 감각을 통해 포착되는 듯했다. 그녀의 고양이 귀는 그들의 낮고 속삭이는 목소리 속에서 알 수 없는 묘한 기운을 감지했다. 위협, 혹은 계략의 기운.


- 어... 아, 네...


은채는 어색하게 대답하며 뒷걸음질 쳤다. 남성들은 그녀의 반응을 눈치챘는지,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 혹시 길이라도 잃으셨나요?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늦은 밤에 이 바닷가는 위험해요. 맹수가 나타나기도 하고요.


그들은 친절한 가면을 쓴 채, 능숙한 말솜씨로 은채를 붙잡으려 했다. 맹수? 이 세계에 그런 것이 존재하는가? 혹은 자신을 시험하려는 말인가? 은채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지만, 고양이의 본능은 더욱 강하게 '도망쳐야 한다'고 속삭였다. 그들의 눈빛, 억지로 지어 보이는 듯한 미소, 그리고 알 수 없는 향기가 그녀의 신경을 자극했다. 자신을 도와주려는 척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다른 데 있는 듯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은채는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밤바다를 따라 등대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움직임은 전보다 훨씬 민첩하고 빨랐다. 모래사장 위를 뛰는 발은 마치 사냥감을 쫓는 고양이처럼 가볍고 재빨랐다. 뒤에서 그들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 어이! 잠깐만요!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 그냥 가면 위험하다니까요!


목소리는 점차 멀어져 갔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가 사라졌을 때쯤, 은채는 뒤늦게야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자신을 등대까지 이끌어주던 빛의 구체가 보이지 않았다. 모닥불 근처에 몸을 녹일 때까지만 해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너무 당황해서인지, 아니면 남자들의 존재에 압도되어서인지, 빛의 구체가 언제 사라졌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혼자 남겨졌다는 생각에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하지만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 남자들에게 잡힐 수는 없었다.


은채는 등대에 빛을 따라 다시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깜빡이는 등대 불빛만이 그녀의 유일한 이정표였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이상하게도 다리는 지치지 않았다. 스무 살을 넘어서면서 앉아서 공부만 하다 보니 체력이 바닥을 기던 자신을 문득 떠올랐다. 컴퓨터 화면 앞에 앉아 디자인 작업에 매달리며 밤새던 평범한 은채는 결코 이 정도의 달리기를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금세 주저앉아 숨을 헐떡였겠지. 하지만 지금 그녀의 몸은 마치 철인 훈련이라도 받은 듯,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게 바로 루나의 몸이구나!'


불현듯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애니메이션 속 루나는 밤의 도심을 자유자재로 누비고, 누구보다 민첩하며 지치지 않는 체력을 가진 존재였다. 이제 그녀 자신이 바로 그 루나가 된 것이다. 그녀는 파도 소리를 가르며 모래 위를 달렸다. 시원하게 부는 밤바다의 바람이 젖었던 머리카락과 털을 완전히 말려주었다. 발끝으로 솟구치는 모래의 감각, 밤바람이 피부를 스치는 서늘하고 상쾌한 느낌,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해변을 내달리는 자유로움. 은채는 온몸으로 밤바다를 만끽하기 시작했다. 이 경이롭고 낯선 감각들이 그녀를 압도했다. 더 이상 두려움은 없었다. 오직 새로운 몸으로 경험하는 자유와 즐거움만이 그녀를 채웠다.



- 등대와 불가사리 -


숨이 벅찰 정도로 달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등대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등대는 바다를 향해 튀어나온 육지에 견고하게 서 있었다. 등대 주위에는 거친 파도를 막기 위한 방파제가 굳건히 쌓여 있었다.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불규칙하게 쌓여 있었고, 파도가 부딪히는 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들렸다. 그녀가 등대에 도달하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등대 꼭대기에서 밝게 빛나던 불빛이 서서히, 마치 살아있는 물줄기처럼 등대를 타고 아래로 흘러내려오기 시작했다. 붉은색, 푸른색, 그리고 황금색이 뒤섞인 영롱한 빛줄기는 마치 춤을 추는 듯 곡선을 그리며 등대의 벽을 따라 움직였다.


마침내 그 빛은 은채의 눈앞에 도달했고, 순식간에 응축되면서 익숙한 형태로 변했다. 바로, 빛의 구체였다. 그녀를 여기까지 이끌고, 도서관에서 탈출시킨 뒤 갑자기 사라졌던 그 구체였다. 등대의 빛이, 그 구체였던 것이다. 이 등대가 구체의 집, 혹은 구체의 또 다른 모습이었던 것일까? 그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듯한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구체는 그녀의 앞에서 몇 번이고 부드럽게 반짝였다.


구체는 은채의 눈앞에서 잠시 맴돌다가, 이내 방파제 쪽으로 향했다. 구체는 거대한 콘크리트 방파제 사이의 틈새로 움직이더니, 바다에 젖어 미끄러운 바위에 납작하게 붙어 있는 작은 불가사리 한 마리에게로 다가갔다. 불가사리는 오렌지색 빛깔을 띠고 있었고, 뾰족한 다섯 개의 다리가 선명했다. 구체는 불가사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며 은은한 빛을 비췄다. 마치 그 불가사리가 어떤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듯, 혹은 구체의 다음 목적지가 그 불가사리라는 듯.


- 저걸 잡으라고...?


은채는 의아한 표정으로 구체와 불가사리를 번갈아 보았다. 구체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자신을 이곳으로 이끈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불가사리가 어떤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은채는 망설임 없이 방파제로 향했다. 방파제는 거칠고 미끄러웠다. 파도에 젖은 바위들은 언제 미끄러질지 몰라 위험해 보였다. 발을 헛디디면 그대로 차가운 바다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루나의 몸은 이내 그녀의 불안감을 잠재웠다. 고양이 귀를 쫑긋 세워 파도 소리를 듣고, 미끄러운 바위 위에서도 날렵하게 균형을 잡았다. 아슬아슬하게 방파제를 건너는 그녀의 움직임은 마치 경쾌한 춤과도 같았다. 파도 거품이 발아래로 밀려왔다가 쓸려나갔다. 차가운 바닷물이 그녀의 발목을 적셨지만, 이젠 더 이상 끔찍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발걸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불가사리가 손에 닿을 거리에 왔다. 구체는 불가사리 바로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은채는 조심스럽게 몸을 기울여 불가사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으로 불가사리의 거칠고 오돌토돌한 감촉이 느껴졌다. 살아있는 생명체의 온기가 미미하게 전해졌다.


그녀는 불가사리를 움켜쥐었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불가사리였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은채가 불가사리를 쥐는 동시에, 불가사리 위에서 맴돌던 빛의 구체가 순식간에 불가사리를 향해 돌진했다. 구체는 불가사리 위에서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하더니, 마치 도서관에서 책을 삼키듯, 불가사리만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 안 돼...!


은채는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구체가 불가사리를 집어삼키는 속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불가사리의 오렌지색 몸통이 빛의 알갱이가 되어 순식간에 구체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구체는 오직 불가사리만을 흡수했고, 은채의 손은 빈손이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구체는 은채의 손을 떠나며 그녀의 몸을 거칠게 밀쳐냈다.


- 으악!


예상치 못한 힘에 은채는 비명을 지르며 다시 한번 몸의 균형을 잃었다. 방파제의 미끄러운 바위 위에서 발이 헛디뎌졌고, 그녀의 몸은 그대로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차가운 바닷물이 그녀의 온몸을 덮쳤다. 이번에는 물이 따뜻하거나 포근하지 않았다. 차갑고 거친 파도 속으로, 은채는 그렇게 밤바다의 심연 속으로 다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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