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게 묻다

밤의 도서관에서 온 초대

by 덕구

- 고양이 벽화와 밤의 도서관 -


버스 정류장에 발을 내딛는 순간, 은채의 새로운 감각들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부드러운 아스팔트 바닥은 마치 차가운 이끼로 덮인 흙길처럼 느껴졌고, 낯선 밤공기는 코끝을 스치는 순간 상쾌한 풀 내음과 함께 희미한 금속성 향을 품고 있었다. 귀는 익숙한 도시의 소음 대신 멀리서 들려오는 물결 소리, 나뭇잎 스치는 소리, 그리고 아직 그녀에게는 알 수 없는 어떤 생명체의 낮은 울림 같은 것들까지. 온몸의 감각이 새로운 세계에 맞춰 변화하는 듯했다.


그녀의 눈앞에, 아까 버스 안에서 보았던 그 빛의 구체가 둥실 떠 있었다. 마치 작은 별똥별 조각이 허공에 멈춰 선 듯, 은은하고 영롱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빛은 차가운 푸른색이었다가, 따뜻한 노란색으로, 때로는 섬세한 보라색으로 시시각각 변하며 주변의 어둠을 부드럽게 물들였다. 구체는 정지해 있었지만,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은채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빛을 향했다. 잡힐 듯 말 듯, 신비로운 이끌림에 홀린 듯 손가락을 뻗었지만, 구체는 손이 닿기 직전 살짝 뒤로 물러났다.


- 저기...


은채의 입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신의 목소리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을 만큼 낯설었다. 구체는 그녀의 말을 이해한 듯, 조금 더 멀어지며 앞서 나아갔다. '이리 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은채는 망설였다. 평생의 이성이 '낯선 것을 쫓아가지 마'라고 경고했지만, 내면에 울리는 낯선 본능이 '따라가라'라고 속삭였다.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섞인 채, 결국 그녀의 발은 구체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리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낮의 번잡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건물들은 묵묵히 서서 밤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가로등은 너무 멀거나 아예 없는 듯 희미했다. 어둠 속에서도 은채는 앞서가는 빛의 구체 덕분에 길을 잃지 않았다.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만이 그녀의 뺨과 새롭게 돋아난 귀를 스치며 미묘한 소리를 냈다. 고양이 귀는 아주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았다. 저 멀리 희미하게 들리는 물결 소리, 나뭇잎 스치는 소리, 그리고 아직 그녀에게는 알 수 없는 어떤 생명체의 낮은 울림 같은 것들까지. 온몸의 감각이 새로운 세계에 맞춰 변화하는 듯했다.


주변 풍경은 분명 도시였지만, 그녀가 알던 서울과는 너무도 달랐다. 차갑고 거대한 빌딩 숲 가운데, 오래된 전통 양식의 기와지붕이 이어진 묵직한 벽들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마치 높이 솟은 현대의 건축물들 사이, 고즈넉한 조선시대 궁궐의 성곽을 연상시키는 풍경이었다. 빛의 구체는 이 거대한 벽을 따라 유유히 움직였다. 발아래 돌길은 그녀의 걸음에 맞춰 부드러운 마찰음을 냈고, 꼬리는 균형을 잡는 듯 그녀의 뒤를 흔들며 따라왔다.


얼마나 걸었을까, 구체는 묵직한 벽의 한 벽면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빙글빙글 돌며 그 벽을 비췄다. 벽면은 놀랍게도 거대한 벽화로 가득 차 있었다. 은채는 멈춰 서서 벽화를 올려다보았다. 거칠게 이어진 돌 틈 사이로, 섬세한 붓 터치로 그려진 그림들이 어둠 속에서 은은한 색을 뿜어내고 있었다. 달빛 아래서 더욱 빛을 발하는 듯했다.


벽화는 여러 장면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이야기 같았다. 은채는 눈을 크게 뜨고 그림 하나하나를 따라갔다. 어두운 배경 속에 빛나는 별들이 뿌려져 있고, 그 아래로 거대한 나무들이 솟아 있었다. 그 나무들 사이로, 은채의 눈길을 사로잡는 건물이 보였다. 고전적인 양식의, 웅장하고 깊이가 느껴지는 도서관이었다. 책장마다 빼곡히 꽂힌 책들은 지식의 보고 같았고, 도서관을 둘러싼 공기는 지혜와 신비로움으로 가득 차 있는 듯했다.


그다음 장면에는 도서관의 책장 사이를 누비는 고양이들이 그려져 있었다. 각기 다른 색깔과 표정의 고양이들은 어떤 책을 응시하거나, 낮잠을 자거나, 혹은 서로 장난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특히 한 마리의 검은 고양이는 책 더미 위에 앉아 푸른 달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 눈빛이 어딘가 은채 자신을 닮은 듯 깊고 차분하게 느껴졌다. 이 벽화는 마치 살아 숨 쉬는 듯,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단순히 아름다움을 넘어선 어떤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벽화 속 도서관과 고양이들은 묘하게 그녀가 애니메이션 '밤의 여행자들'에서 보았던 풍경과 주인공 루나를 연상시켰다. 이 세계가 자신이 동경하던 그 애니메이션과 연결되어 있다는 직감이 섬광처럼 스쳤다.


한참을 벽화를 감상하던 은채는 다시 빛의 구체로 시선을 옮겼다. 구체는 벽화가 끝나는 끄트머리, 돌담과 이어진 곳에 있는 낡은 나무문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문은 언뜻 보기에는 그냥 벽의 일부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아주 살짝 열려 있었다. 그 틈새로 미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구체는 그 작은 틈새로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망설일 틈도 없이, 은채는 구체가 사라진 문으로 다가갔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낡은 나무문을 밀자, 차가우면서도 축축한 공기가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이곳은 아까 벽화에서 보았던 그 도서관이었다. 하지만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거대한 공간은 아득히 높이 솟아 있었고, 층층이 계단식으로 배열된 책장들은 마치 산맥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천장이 얼마나 높은지 가늠하기 어려웠고, 어둠 속에 끝없이 이어지는 책장들은 미로 같았다. 묵은 종이와 먼지, 그리고 물 비린내가 섞인 독특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닥을 내려다보자, 은채는 다시 한번 놀랐다. 도서관의 1층 전체가 발목 높이까지 물로 차 있었다. 검은 물은 거울처럼 어둠을 반사했고, 그 속에서 희미한 빛깔의 물고기들이 유영하고 있었다. 물고기들 사이로는 이제껏 보지 못한, 기이하고 신비롭게 생긴 생물들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어떤 것은 조개처럼 움직이는 눈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것은 수십 개의 다리로 물속을 기어가는 듯했다. 그들은 은채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책장과 책, 그리고 벽 곳곳에는 푸르고 축축한 이끼들이 자라 있었다. 일부 이끼들은 은은하게 빛을 발하며, 도서관의 내부를 신비롭게 밝혔다. 이끼의 생명력은 책들을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 마치 책의 일부인 양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시간의 흔적을 담은 묵직한 책들이 물과 이끼, 그리고 어둠 속에 잠겨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거대한 예술 작품 같았다. 은채는 발을 조심스럽게 물속에 담그고 앞으로 나아갔다. 물은 차가웠지만 불쾌하지 않았다. 발목을 감싸는 촉감은 오히려 새로운 감각이었다.


도서관 내부의 깊은 곳으로 갈수록, 미로처럼 얽힌 책장들은 더욱 빽빽해졌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공간이었다. 은채는 흥미로운 광경에 압도되어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며 도서관을 구경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이 이곳에 모여 있는 듯한 경외심이 들었다. 온통 책으로 가득 찬 이곳은 그녀가 한때 몸담았던 도서관과는 전혀 다른, 생명력을 가진 거대한 유기체 같았다.


그러다 문득, 은채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빛의 구체를 발견했다. 구체는 저 멀리, 계단식 책장의 위층을 따라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들었다. 은채는 걸음을 서둘렀다. 물속을 헤치며, 혹은 젖은 이끼가 자란 돌계단을 밟으며 구체를 쫓았다. 고양이처럼 유연하게, 조심스럽게, 그러나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도서관의 고요를 깨트리며 멀리 울려 퍼졌다.


구체는 그녀를 이끌고 도서관의 가장 깊고 은밀한 곳으로 향하는 듯했다. 한참을 쫓아 도착한 곳은 어딘가 다른 공간 같았다. 다른 책장들과는 달리 좀 더 오래된 나무로 만들어진, 검은색에 가까운 어두운 책장들로 둘러싸인 작은 공간이었다. 그 한가운데 놓인 낡고 거친 나무 책상 위에는 다른 어떤 것들과도 다른, 단 한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구체는 그 책 주위를 맴돌다가 공중에서 멈춰 섰다. 마치 '바로 이거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은채는 떨리는 손으로 그 책을 집어 들었다. 예상보다 묵직했다. 표지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깃든 가죽으로 덮여 있었고, 겉면에는 알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조각되어 있었다. 망설임 없이 책을 펼쳤다. 안에는 글보다는 그림이 훨씬 많았다. 아름답지만 어딘가 신비롭고 아련한 그림들은 마치 동화책 같았지만, 동시에 이 세계의 오랜 역사를 담은 기록처럼 느껴졌다.


책의 내용은, 밤의 정령들이 빛을 잃고 사라져 가는 세계를 구하기 위해 '별을 품은 고양이'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였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을 닮은 눈을 가진 고양이가 나타나 밤의 기운을 모아 잃어버린 빛을 되찾는다는 전설이 그림과 함께 그려져 있었다. 특히, 마지막 페이지에는 별을 품은 고양이가 빛나는 힘으로 어둠에 잠긴 도서관을 밝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었다. 책 속의 고양이는 은채처럼 검은 귀와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과 너무나도 닮은 그림을 보자, 은채의 심장이 세차게 요동쳤다. 이것은 단순한 그림책이 아니었다. 마치 자신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어떤 예언처럼 느껴졌다.


그림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려던 찰나, 은채는 문득 인기척을 느꼈다. 싸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고요했던 도서관이었다. 물고기들이 유영하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었는데. 은채는 소리 없이 책을 닫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책장 뒤편에서, 어둠 속을 뚫고 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채의 허리까지 오는 키였다. 푸른 이끼가 엉겨 붙은 듯한 낡은 회색 망토를 두르고 있었고, 후드 아래로는 기이하게 번뜩이는 눈빛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사서였다. 그녀가 집어 든 책과 너무나도 닮은 책들이 가득 꽂힌 책장들 사이에서 나타난, 이끼 냄새와 곰팡이 냄새를 풍기는 기이한 존재였다. 그는 한 손에는 낡은 지팡이를 짚고 있었는데, 지팡이 끝에는 어두운 빛을 내는 작은 구체가 박혀 있었다.


- 그 책은... 돌려주셔야 합니다.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도서관에 울려 퍼졌다. 사서의 말에 은채는 소스라치게 놀라 손에 든 책을 꽉 쥐었다. 그 순간, 그녀의 주위를 맴돌던 빛의 구체가 빠르게 몸을 돌려 사서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사서를 피해 도망치려는 듯이. 당황한 은채는 본능적으로 빛의 구체를 따라 달려 나갔다. 책을 가슴에 안은 채, 그녀는 미로 같은 책장 사이를 있는 힘껏 질주했다.


차가운 물이 발목을 때렸고, 이끼 낀 돌계단을 뛰어 올라가며 몸의 균형을 잡는 것이 쉽지 않았다. 뒤에서 사서의 발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이내 끊겼다. 한참을 달리다가 숨을 헐떡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사서의 모습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안도감에 다시 빛의 구체를 쫓아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도서관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콰앙! 콰앙! 쾅!


묵직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책장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마치 거인이 장난감을 쓰러뜨리듯이, 책장들이 차례로 넘어지며 길을 막기 시작했다. 먼지가 폭풍처럼 일어났고, 묵은 종이 냄새와 함께 물비린내가 더욱 진해졌다. 쓰러진 책장들 사이로 책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그녀가 달리고 있는 물속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아까는 평화롭게 유영하던 물고기와 기이한 생물들이 갑자기 은채의 다리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치 살아있는 족쇄처럼 그녀의 발목을 엉키게 하거나, 몸을 밀쳐내며 도망치는 것을 방해했다. 사서의 마법이었다.


패닉에 빠질 법한 상황이었지만, 은채의 머릿속에는 섬광처럼 하나의 이미지가 스쳐 지나갔다.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 '루나'의 모습이었다. 루나는 어떤 난관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재치와 민첩함으로 위기를 헤쳐나갔다. 어둠 속에서 몸을 숨기고, 날렵한 움직임으로 장애물을 피하고, 때로는 상상력을 발휘해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루나의 모습. 자신에게 돋아난 고양이 귀와 꼬리가 더 이상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그것은 그녀의 일부였고, 루나처럼 이 난관을 헤쳐나갈 도구였다.


- 그래, 루나라면... 루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은채는 순간 눈을 감았다 떴다. 불안으로 가득 찼던 눈빛에 결연한 의지가 서렸다. 그녀는 고양이 귀를 쫑긋 세워 주변의 소리에 집중했다. 책장 넘어지는 소리 사이로, 사서의 발소리가 아닌, 물 흐르는 소리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했다. 무너진 책장들 사이의 좁은 틈새, 혹은 이끼가 무성한 벽을 타고 오를 만한 지점을 찾아 눈을 굴렸다. 그녀는 루나처럼 몸을 낮추고, 좁은 틈새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무너져 내리는 책더미와 자신을 방해하는 물속 생물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나아갔다. 그녀의 몸은 마치 원래부터 고양잇과 동물의 유연함을 타고난 듯 움직였다.


책장과 책장 사이를 뚫고, 물고기들의 방해를 뿌리치며, 은채는 마침내 도서관의 입구가 보였다. 희미한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낡은 나무문. 빛의 구체는 이미 그 문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 힘을 다해 물속을 헤치고, 그녀는 문밖으로 뛰쳐나왔다. 밤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고, 바닥에 발을 내딛자 비로소 자유로움을 느꼈다. 도서관의 묵직한 문은 그녀의 뒤에서 덜컹거리며 닫혔다.


도서관의 묵직한 나무문이 뒤에서 덜컹거리며 닫히는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은채는 문을 등지고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은 여전히 격렬하게 요동쳤고, 차가운 물속을 헤치고 달린 다리는 무거웠다. 그녀는 두 손으로 문득 자신의 어깨 위를 만져보았다. 뾰족하게 솟아난 고양이 귀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고, 몸을 가누기 위해 미묘하게 흔들리는 꼬리는 여전히 그녀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이 현실이었다. 믿기지 않지만, 너무도 생생한.



- 어둠 속의 약속, 그리고 물결치는 밤 -


그녀의 눈은 본능적으로 닫힌 문을 향했다. 방금 전까지 그 안에서 사서와 위협적인 마법을 피해 필사적으로 도망쳐 나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문은 굳건히 닫혀 있었다. 낡고 삐걱이던 문은 이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굳게 입을 다물고, 밤의 어둠 속에 자신을 숨기고 있었다. 마치 방금 전의 소동이 한여름 밤의 꿈이라도 되는 양, 흔적조차 남기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은채는 천천히 손을 뻗어 문을 만져보았다. 거친 나뭇결이 손끝에 닿았다. 차가웠다. 물리적으로 그녀를 가두고 있었던 문이 이제는 그저 견고한 벽처럼 느껴졌다.


그러고 나서, 그녀의 시선은 품에 안긴 책으로 향했다. 가슴께에 꽉 쥐고 있던 책의 표지는 구겨지고 젖어 있었다. 하지만 그림책의 내용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밤의 정령, 빛을 잃어가는 세계, 그리고 '별을 품은 고양이'. 자신과 너무나도 닮은 모습의 고양이가 그려진 마지막 페이지가 떠올랐다. 이 책이 그녀를 이 미지의 세계로 이끈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이 책 안에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다.


숨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이곳으로 이끈 존재, 빛의 구체를 바라보았다. 구체는 문 바로 앞에서 공중에 둥실 떠 있었다.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도서관에서 무사히 빠져나오기를, 마치 자신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는 듯, 혹은 다음 여정을 재촉하는 듯 말없이 반짝였다. 그 빛은 부드러웠지만, 미묘하게 존재감을 발하며 은채의 시선을 이끌었다. 구체는 은채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도, 너무 가깝게 다가오지도 않았다. 딱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은채가 다음 행동을 취하기를 기다리는 듯한 태도였다.


은채는 잠시 망설였다. 이 빛이 자신을 어디로 이끌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도서관에서 그 빛을 따라왔고, 그 빛이 자신에게 책을 건네주었으며, 심지어 사서의 공격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도록 그녀의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 빛은 적어도 그녀에게 해를 끼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 모든 혼란의 실마리를 풀어줄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이 그녀의 마음속에 피어났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은채는 품에 안고 있던 책을 구체를 향해 내밀었다. 마치 잃어버린 것을 돌려주는 듯한, 혹은 감사의 표시를 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구체는 미세하게 흔들리더니, 그녀가 내민 책 쪽으로 부드럽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책의 한 귀퉁이에 닿았다. 예상했던 것은 구체가 책을 이끌고 다시 길을 안내하거나, 혹은 어떤 신비로운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구체는 그녀의 상상을 초월하는 행동을 시작했다.


구체는 책을, 마치 물이 스며들듯이 천천히 삼키기 시작했다. 먼저 책의 모서리부터, 책장이 한 장 한 장 빛의 알갱이로 변하며 구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놀랍게도 책은 액체처럼 형체가 사라지며 빛의 일부가 되었다. 마치 설탕이 물에 녹아들 듯이, 단단한 종이와 가죽 표지가 구체의 영롱한 빛 속으로 소멸했다.


- 어... 어?


은채는 소스라치게 놀라 자신도 모르게 책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책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본능적으로 책을 잡아당겨 뺏으려 했다. 하지만 구체가 책을 삼키는 힘은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 책이 구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힘은 마치 거대한 폭풍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듯했다. 은채의 손은 책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그녀의 육체는 그 압도적인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던 그녀는 결국 발을 헛디뎌 차가운 돌바닥 위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손에 쥐고 있던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빛과 함께 사라지는 것을, 그녀는 눈앞에서 보았다.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은채는 어이가 없었다. 힘없이 축 늘어진 손은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허공에서 미미하게 떨렸다. 허탈감과 함께 알 수 없는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애써 참아왔던 눈물이 핑 돌았다. 눈물이 맺힌 채, 그녀는 이를 악물고 눈앞의 빛의 구체를 째려보았다. 야속했다. 도망치는 자신을 이끌어준 유일한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이럴 수가. 힘들게 가져온 책을 한순간에 삼켜버리다니.


그러나 구체는 은채의 울분에 찬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주위를 한 바퀴 돌더니, 다시 부드럽게 앞서 나아갔다. 마치 '이제 괜찮아. 다시 가자'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 빛의 움직임은 여전히 부드럽고 차분했다. 은채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지금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조차 이 빛은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일까.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지만,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이미 낯선 세상 한가운데에 버려진 그녀에게, 이 빛은 유일한 길잡이였다. 울상을 지으며 일어선 은채는 여전히 퉁명스러운 눈길로 구체를 쳐다보며 그 뒤를 따랐다. 어차피 할 일도, 돌아갈 곳도 없었다. 그저 이 빛이 자신을 어디로 이끌지 지켜보는 수밖에.


침묵 속에서 얼마나 걸었을까. 정체 모를 밤의 도시를 걷는 동안, 은채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질문들이 떠올랐다. 자신이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 '루나'처럼 고양이 귀와 꼬리를 갖게 된 이유, 이곳이 정말 '밤의 여행자들' 속 세상인지, 그리고 아까 책 속에서 본 '별을 품은 고양이'와 그녀의 관계, 사서의 정체, 이 모든 상황의 끝은 어디인지. 머릿속은 수많은 물음표로 가득 찼다.


견디다 못한 은채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저기... 너, 혹시 내가 여기 왜 온 건지 알아?


물론 구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빛은 여전히 부드럽게 빛나며 은채의 앞에서 길을 안내할 뿐이었다. 은채는 포기하지 않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 그 도서관... 아까 그 사서 말이야. 걔는 왜 책을 돌려받으려고 한 거야? 그리고 왜 나만 그런 힘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여전히 무응답이었다. 구체는 그녀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단 하나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빛의 깜빡임조차 규칙적이고 평온했다. 은채는 한숨을 내쉬었다.


- 내가... 루나처럼 된 거야? 내가 애니메이션 속으로 들어온 거 맞아?


구체는 그저 앞서 나갈 뿐이었다. 은채는 온갖 종류의 질문을 던졌다. 처음에는 궁금해서, 나중에는 답답해서, 결국에는 그저 중얼거림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빛의 구체는 마치 듣지 못하는 것처럼, 혹은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침묵을 지켰다. 답을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따라 걷는다는 것은 인내심을 시험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점차 초조해졌고, 동시에 그 구체에 대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구체를 따라 걷던 은채는 마침내 결심했다. 직접 잡아봐야겠다. 이토록 수수께끼 같은 존재에게 질문만 던져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대답을 듣지 못한다면, 적어도 그 의중이라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구체가 그녀를 이해한다면, 그녀를 잡으려는 행동의 의미도 이해할 것이다. 혹은... 자신을 도망칠 수도 있었다. 그것은 또 다른 답이 될 수도 있었다.


- 너! 잠깐만!


은채는 나직하게 외치며 구체에게로 몸을 던졌다. 그녀의 손이 구체에 닿으려던 찰나, 구체는 잽싸게 움직여 그녀의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재빨랐다. 마치 그녀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 은채는 다시 몸을 날렸지만, 구체는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거리를 유지하며 약 올리듯 움직였다. 그녀의 앞에서 느릿하게 움직이는 듯하다가도, 은채가 손을 뻗으면 순식간에 달아나 길을 안내하는 것처럼 보였다.


- 잡히지 않을 줄 알았어! 너, 정말!


구체는 그런 은채의 불평에도 아무런 반응 없이 빙글빙글 돌며 몸을 비틀었다. 은채의 장난기 섞인 추격에 맞춰, 구체는 점차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향을 틀어, 옆에 흐르는 하천 쪽으로 향했다. 밤의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은채는 당황했지만, 여기서 구체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필사적으로 뒤를 쫓았다.


하천은 생각보다 깊이가 있어 보였고, 물은 어둠 속에서도 서늘한 기운을 내뿜었다. 물가로 향하는 길은 축축한 진흙으로 덮여 있었다. 구체는 물 바로 위에서 은채를 유혹하듯이 둥둥 떠 있었다. 이제 잡을 수 있겠다. 은채는 마지막 힘을 다해 몸을 날렸다. 구체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발이 미끄러졌다. 축축한 진흙에 발이 박히면서 몸의 균형을 잃었다. 고양이 귀가 축 처지고, 꼬리가 급하게 중심을 잡으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풍덩!


차가운 물이 온몸을 감쌌다. 예측하지 못한 낙수에 몸은 그대로 얼어붙는 듯했다. 어둠 속 차가운 물속으로, 은채는 그렇게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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