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게 묻다

밤의 서막

by 덕구

- 일상 -


밤이 지는 어둠이 차분하게 내려앉은 시간, 늘 그랬듯 대학생 '은채'는 작은 원룸의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스무 해를 갓 넘긴 그녀의 삶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으로 채워져 있었다. 단정한 블라우스와 편안한 청바지를 번갈아 입고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쌓아두고 공부하는 것이 일과였고, 가끔은 친구들과 학과 건물 앞 편의점에서 캔커피를 마시며 미래에 대한 막연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이렇다 할 특별한 사건도, 극적인 로맨스도 없는, 잔잔한 호수 같다고 스스로 평하는 나날이었다. 가끔은 이런 평온함이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곧이어 이 정도면 나름 행복한 것 아니냐며 스스로를 다독이곤 했다. 그녀는 거창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 그래서 더 평온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책상 위 스탠드 불빛 아래 놓인 전공 서적은 오늘따라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아무리 고심해도 만족스럽지 못한 디자인 시안과 얽히고설킨 포토샵 레이어들은 마치 풀리지 않는 복잡한 퍼즐처럼 은채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시계는 이미 자정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고요한 방 안에는 태블릿 위를 부유하는 펜 소리와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키보드 타이핑 소리만이 작게 울렸다. 얕은 한숨을 내쉬며 은채는 잠시 손을 멈췄다. 꽉 막힌 듯한 머리로는 더 이상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 이쯤이면 됐어.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그녀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이 기댔다. 하루 종일 경직되어 있던 어깨에서 작은 통증이 느껴지는 듯했다. 피로한 눈꺼풀을 깜빡이며 천장을 응시하던 시선은 이내 책상 한구석에 놓인 작은 TV로 향했다. 낡은 탁상용 TV였지만, 은채에게는 그 어떤 최신형 스마트 기기보다 소중한 보물이었다. 피곤할 때, 혹은 답답할 때, 그녀는 늘 그 작은 상자 속 세상으로 도피하곤 했다. 그리고 그 세상의 대부분은 하나의 애니메이션으로 채워져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 애니메이션이 방영되는 밤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재방송이었지만, 은채에게는 첫 방송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미 셀 수 없이 반복해서 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은채는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모든 대사를 외울 정도였다. ‘밤의 여행자들’이라는 제목의 이 애니메이션은 늦은 밤, 사람의 눈을 피해 깨어나는 신비로운 생명체들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마법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은채의 평범한 일상과는 전혀 다른, 상상력 가득한 판타지 세계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TV 리모컨을 집어 드는 은채의 손길은 마치 낯선 곳으로 향하는 여행자의 그것처럼 조심스럽고, 동시에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평소 같으면 리모컨을 누르는 순간 바로 화면이 켜졌겠지만, 오늘은 잠시 망설였다. 잠시 눈을 감고, 그녀는 자신을 위로하는 작은 의식을 치르는 듯했다. 복잡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환상적인 세계로의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는 시간이었다. 피곤함은 가시고, 기대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드디어 전원 버튼을 누르자, 익숙한 시작 화면과 함께 주제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고요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 고요한 도시 위를 유영하는 듯한 실루엣, 그리고 매혹적인 푸른색의 달. 오프닝 시퀀스는 늘 은채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주인공인 '루나'는 이 애니메이션의 세계관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검은색 고양이 귀와 꼬리를 가진 20대 초반의 여성. 깊은 밤의 어둠 속에서 가장 자유롭게 움직이는 존재였다. 루나의 등장은 언제나 신비로웠고, 동시에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겼다. 그녀는 밤의 수호자이자, 동시에 밤이 주는 자유를 만끽하는 존재였다. 은채는 루나의 당당하고 신비로운 모습에 깊이 매료되었다.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그렇기에 더욱 동경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루나처럼 자유롭게, 신비롭게 밤을 여행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막연한 상상을 하곤 했다.


애니메이션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오늘은 루나가 도시 외곽의 오래된 도서관에서 미지의 고대 문헌을 찾아 나서는 에피소드였다. 웅장한 배경 음악과 함께 어둠 속에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는 루나의 모습은 은채의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루나는 능숙하게 어둠 속을 누볐고, 날카로운 고양이 귀는 아주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민첩한 움직임과 재치 있는 판단력은 은채를 매번 감탄하게 했다. 애니메이션 속의 밤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었다. 생명과 신비로움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낮의 현실에서 벗어나 오로지 밤만이 품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 가득한 곳.


은채는 루나가 좁은 책장 사이를 지나 숨겨진 문을 찾아내는 장면에 특히 집중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도 그 어둠 속에 함께 숨죽이며 루나의 뒤를 따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화면 속의 루나는 낡은 문을 열고 미지의 공간으로 발을 내디뎠고, 순간 빛이 터져 나왔다. 그 빛은 TV 화면을 넘어 은채의 방 안까지 번져오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 어...?


그 순간, 작은 TV 화면 전체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정지된 이미지가 깨지고 색깔이 번지기 시작했다. 고장이 났나 싶어 은채는 눈을 비볐다. 분명히 멀쩡했던 화면이 마치 물속에 비친 영상처럼 흔들리고 일그러졌다. 루나의 모습은 사라지고, 오색찬란한 빛깔의 소용돌이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눈이 부셔 눈을 가늘게 떴지만, 그 빛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그녀의 방 안으로 뻗어 나오는 듯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처음 겪는 기이한 현상에 은채는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공포심보다는 낯선 호기심이 더 강하게 밀려왔다. TV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점차 강렬해지며 은채의 온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따뜻하면서도 미묘한 압력이 그녀를 감쌌다. 몸이 붕 뜨는 듯한 기분, 그러나 동시에 바닥에 뿌리 박힌 듯 움직일 수 없는 이중적인 감각이었다.


시야가 흐려지고, 방안의 가구들은 흐릿한 그림자처럼 변해갔다. 익숙했던 모든 것들이 아득해지는 동시에, 어디선가 희미한 종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팅-팅-팅-. 맑고 청아한 소리는 점점 커지면서 은채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의식이 멀어지는 듯했지만, 마지막까지 그녀의 뇌리에 박힌 것은 화면 속 빛의 소용돌이였다. 루나의 세계로 통하는 문이, 지금 막 그녀의 눈앞에서 열리고 있었다. 모든 감각이 혼미해지는 가운데, 아주 작게 "루나..."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 소리는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환청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은채는 의식을 잃었다.



- 이야기의 시작 -


흐릿한 의식 속에서 은채는 무언가에 흔들리는 감각을 느꼈다. 쿵, 덜컹, 쿵, 덜컹. 규칙적이지만 불편한 진동이 온몸을 울렸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애써 힘을 주어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처음 들어온 것은 익숙한 색깔의 시트였다. 그리고 희미한 불빛이 깜빡이는 창밖 풍경. 어렴풋이 여기가 버스 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내가 왜 버스에 있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분명 방금 전까지 자신의 원룸 책상 앞에서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다. 설마 잠들었다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혹은 피곤해서 잠깐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버스를 탄 건가? 하지만 버스를 탈 이유도, 장소도 기억나지 않았다.


버스 안은 늦은 밤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몇몇 승객들이 창밖을 응시하거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에어컨 바람이 은은하게 불어와 뺨에 닿았다. 평범한 풍경이었지만, 은채는 왠지 모를 이질감을 느꼈다. 공기가 달랐다. 도시의 밤 특유의 텁텁함 대신, 묘하게 상쾌하면서도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어둠 속에 신비로운 빛깔이 스며들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문 유리에는 도시의 불빛과 거대한 건물의 실루엣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 익숙한 얼굴이었다. 피곤에 지친 눈빛과 부스스한 머리카락. 늘 봐왔던 그대로의 자신이었다. 안도감이 밀려왔다. 꿈이구나. 지독하게 현실 같았던 꿈이었지만, 다행히도 다시 평범한 현실로 돌아온 것이 분명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려던 찰나, 은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뭔가 이상했다. 부스스한 머리카락 사이로, 새까맣고 뾰족한 무언가가 삐죽 솟아 있었다. 자세히 보니 털로 뒤덮인, 분명히 '귀'였다. 그것도 사람의 귀가 아닌, 짐승의 귀. 고양이의 귀였다. 순간,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차가운 느낌이 은채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동시에, 몸이 움찔거리는 것을 느꼈다. 엉덩이 뒤쪽으로, 뭔가 부드럽고 긴 것이 의자를 스치며 움직였다.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확인했다. 보드라운 털의 감촉. 그리고 끝에는 풍성한 털 뭉치가 달려 있었다. 꼬리. 명백한 꼬리였다. 그것도 자신의 몸에 달려 있는.


- 이게... 이게 뭐야...!


은채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현실이 아니었다. 이건 꿈도 아니었다. 꿈이라면 이렇게 생생하고, 이렇게 섬뜩할 리 없었다. 거울처럼 비친 유리 속 자신의 얼굴은 공포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고양이 귀와 꼬리가 달린 자신의 모습은 마치... 애니메이션 속 루나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했다.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평범한 20대 대학생이었다. 단 한 번도 이런 비현실적인 존재가 되어본 적 없었다.


창밖을 향하던 시선은 이제 완전히 창문 유리에 고정되었다. 자신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손으로 귀를 만져보니 보드라운 털이 느껴졌다. 꿈틀거리는 감각마저 생생했다. 꼬리는 자신이 의식하지 않았는데도 미묘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마치 피부처럼 익숙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은채를 더욱 두렵게 했다. 자신이 아니었다. 자신인데 자신이 아닌, 기묘한 이질감이었다.


갑자기, 은채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창문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 뒤편, 스쳐 지나가는 건물들의 그림자 속에, 희미하게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처음에 그것은 단순히 도시의 네온사인이나 자동차 불빛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모든 빛과는 달랐다. 한 점의 빛이 아닌, 작은 구체 형태의 빛이었다.


그 빛의 구체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풍경 사이로, 가끔은 빠르게, 가끔은 느리게, 그러나 결코 방향을 잃지 않고 유유히 나아갔다. 그 움직임에는 어떤 규칙도 없어 보였지만, 왠지 모르게 은채의 시선을 강하게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마치 그 빛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버스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자, 빛의 구체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버스의 진행 방향과 나란히 움직이는 듯했다. 은채의 시선은 마치 자석에 이끌린 쇠붙이처럼 그 빛에 고정되었다. 왜일까. 저 빛이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듯한 기시감이 들었다. 아니면, 저 빛이 자신을 이곳으로 이끌어낸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가설이 머릿속을 스쳤다.


머리는 혼란스러웠지만, 몸은 이미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다음 정류장이 가까워오자, 빛의 구체가 정류장 표지판 근처에서 맴도는 것을 보았다. 멈춰서는 버스와 함께, 구체도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마치 은채가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 내려야 해.


작게 중얼거렸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른 채. 이상했다.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은채는 그 구체를 따라가야 한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평소의 그녀라면 결코 하지 않을, 무모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정신을 지배하는 것은 이 비현실적인 상황이 주는 당혹감과, 알 수 없는 이끌림이었다.


발걸음은 무척이나 무거웠다.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애썼다. 버스가 멈추고 문이 열리는 순간, 은채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출구로 향했다. 다른 승객들은 그녀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혹시라도 자신의 귀와 꼬리를 발견하고 놀랄까 봐 두려웠지만, 다들 너무나도 평범하게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아니,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녀의 모습이 '평범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가능성까지 떠올랐다.


정류장에 발을 내딛는 순간, 밤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익숙한 도시의 소음 대신, 은은하게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전자음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밤의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어딘가 이질적이었다. 가로등 불빛은 푸른빛이 강했고, 건물들은 마치 그림자처럼 높이 솟아 있었다. 왠지 모르게 모든 것이 '밤의 여행자들' 애니메이션 속 풍경과 흡사했다.


그리고 그곳에, 버스 창밖에서 보았던 그 빛의 구체가 둥실 떠 있었다. 버스가 멈췄던 그 자리에, 마치 그녀를 마중 나온 것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구체는 은채를 향해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마치 '이리 와' 하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그 빛을 향해 천천히 발을 옮겼다. 알 수 없는 두려움과 함께,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에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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