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게 묻다

빛을 잃은 길

by 덕구

- 골목의 첫인상 -


달콤하고 나른한 알코올의 기운, 은은한 허브 향, 그리고 레코드판에서 흐르던 꿈결 같은 멜로디 속에서 은채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바텐더의 온화한 시선과 퐁실이의 부드러운 감촉이 그녀를 포근하게 감싸는 듯했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충만했다. 마치 모든 여정이 끝난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하는, 황홀한 휴식이었다. 그러나 그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내 불쾌한 감각이 그녀를 휘감으며 그 모든 환상을 산산이 부수고 들어왔다.


코끝에는 비릿한 쇠 냄새와 눅눅한 곰팡이 냄새, 그리고 쓰레기가 부패하는 듯한 역겨운 악취가 뒤섞여 밀려들었다. 몽롱했던 의식이 단숨에 곤두섰다. 등에 닿는 것은 딱딱하고 거친 감촉이었다. 매끄러운 바테이블이 아니라, 울퉁불퉁하고 날카로운 자갈과 먼지가 뒤섞인 표면이 그녀의 옷 사이로 파고들어 살갗을 자극했다. 온몸이 으스스하게 싸늘했다. 마치 얼어붙은 얼음 조각 위에 누워있는 듯한 감각이었다. 쿵, 하는 불쾌한 충격과 함께 그녀는 몸을 움찔거리며 눈을 번쩍 떴다. 레코드 바의 아늑했던 온기와는 완전히 단절된, 가혹한 현실이었다.


눈앞에 들어온 것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레코드 가게에서 마셨던 칵테일의 잔상이 아련하게 남은 눈동자는 어둠에 쉬이 적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루나의 몸을 얻은 그녀의 감각은 어둠 속에서도 희미한 윤곽과 그림자들을 감지했다. 그녀가 누워있던 곳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이었다. 거칠고 날카로운 돌멩이들이 그녀의 등에 그대로 느껴졌다. 그 싸늘함과 낯선 질감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했다. 그녀는 몸을 움츠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옷에는 먼지와 흙이 잔뜩 묻어 있었고, 등에서는 서늘한 한기가 올라왔다.


- 여긴... 어디지?


말소리는 메아리치지 않고, 눅눅하고 축축한 공기 속으로 그대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그녀의 루나의 귀는 익숙한 멜로디 대신, 멀리서 들려오는 기분 나쁜 바람 소리, 어딘가에서 찰랑이는 물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심장을 강하게 압박하는 듯한 쥐 죽은 듯한 고요함을 잡아냈다. 낡은 레코드 바의 감미로운 배경음악과 대비되는, 무겁고 음산한 침묵이었다. 그 고요함은 단순한 소리의 부재가 아니라, 마치 모든 생명체의 소리마저 삼켜버린 듯한 위압적인 침묵이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무도 없는 어두운 골목이었다. 양옆으로는 낡고 허름한 건물들이 마치 수십 년 전에 지어진 뒤 아무도 손대지 않은 것처럼 불규칙하게 늘어서 있었다. 건물들은 서로에게 기대거나 침범하며 위태롭게 서 있었다. 창문들은 대부분 깨져 있거나 시커먼 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간간이 보이는 벽화들은 색이 바래고 훼손되어 괴기스러운 그림자처럼 보였다. 좁은 골목은 한 줄기 빛조차 허용하지 않는 듯했다. 가로등은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지만, 대부분 꺼져 있거나 위태롭게 깜빡이는 수준이었다. 간간이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하는 가로등 불빛이 길게 드리운 그림자들을 춤추게 만들었다. 그림자들이 흔들릴 때마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움직이며 은채의 시선을 혼란스럽게 했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가장 먼저 빛의 구체를 찾았다. 레코드 바에서 구체에게 디퓨저를 건넨 후, 구체는 그녀의 어깨 위로 다시 돌아왔었다. 그리고 그녀는 바텐더의 목소리에 깊은 잠이 들었다. 깨어나면 구체가 그녀를 새로운 곳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구체는 보이지 않았다. 어깨 위에도, 주변에도, 그 어디에서도 구체의 푸른빛은 감지되지 않았다. 그녀를 불안감 속에서 지켜주고 이끌어주었던 유일한 동반자가 사라진 것이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은채는 낮은 목소리로 불러봤지만, 아무런 대답도, 반응도 없었다. 공포가 은채의 목을 조여왔다. 완전히 혼자 남겨졌다는 막막함과 함께, 이 스산한 골목이 그녀를 집어삼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고양이 귀는 이제 멀리서 들려오는 웅성거림과 함께, 좁은 골목을 흐르는 바람이 낼 수 없는 종류의 기이한 속삭임을 잡아냈다. 마치 골목 자체가 그녀에게 경고하는 듯한, 혹은 그녀를 조롱하는 듯한 환청처럼 들렸다. 그녀는 품에 안긴 퐁실이를 더욱 단단히 껴안았다. 퐁실이의 익숙한 온기와 부드러운 감촉만이 그녀에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이 알 수 없는 공간 속에서, 그녀의 내면은 다시 한번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 지붕 위의 눈동자 -


불안감 속에서도 은채는 움직여야 했다. 구체가 사라졌다면, 스스로 구체를 찾아 나서야만 했다. 스산한 느낌을 받으며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다. 발소리가 축축한 시멘트 바닥에 울려 퍼지고, 그 메아리가 낡은 돌담과 건물들에 부딪혀 불규칙하게 되돌아왔다. 길은 좁아졌다가, 갑자기 막다른 길로 변하기도 하고, 예측 불가능하게 꺾이기도 했다. 골목의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새로운 악취가 코를 찔렀고, 거미줄에 걸린 먼지 낀 환풍기에서 기분 나쁜 바람이 훅 불어왔다. 그녀의 시야는 희미한 노란 조명 아래 왜곡된 그림자들에 의해 혼란스러웠다. 이 골목은 마치 살아있는 미로처럼 그녀를 조롱하는 듯했다. 마치 그녀의 의식 자체가 길을 잃은 듯, 공간은 끊임없이 그녀를 시험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은채는 루나의 예민한 감각을 잃지 않았다. 그녀의 고양이 귀는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진동을 감지했고, 그녀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숨겨진 길을 찾아내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발걸음마다 잔뜩 긴장했지만, 그녀는 점차 이 불규칙한 골목에 적응해 가는 듯했다. 그녀의 루나로서의 본능이 스스로 길을 찾도록 그녀의 발을 이끌었다. 좁은 공간을 지날 때는 몸을 웅크렸고, 그림자가 짙은 곳에서는 잠시 숨을 죽였다.


그러다 문득, 낡은 주택의 유리창에 비치는 모습을 발견했다. 푸른빛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너무나도 익숙한 존재. 구체였다! 구체는 유리창 안쪽에서 둥실 떠 있었다. 마치 그녀를 발견하고 기다렸다는 듯, 한번 크게 반짝이더니, 이내 유리창 너머로 사라지는 듯했다. 구체가 보인 방향을 따라 은채는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온몸의 신경이 구체에게 집중되었다. 구체가 사라진 곳이 아마도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출구일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그녀를 움직였다. 구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의 심장은 다시금 뜨겁게 뛰기 시작했다.


달리던 중간에, 은채는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강렬한 시선. 그녀를 꿰뚫어 보는 듯한 무언가에 사로잡힌 기분이었다. 순간적인 위협에 은채는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루나의 감각, 즉 고양이의 본능적인 경계심이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아찔한 감각. 그녀는 잔뜩 긴장한 채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시선의 근원지를 찾아내야 했다. 좁은 골목의 그림자들은 그녀의 눈을 피하듯 흔들렸다. 바람이 으스스하게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고양이 귀는 미세한 바람 소리 사이에서 불규칙한 숨소리를 잡아냈다. 그리고 결정적인 지시처럼, 그녀의 시선은 본능적으로 위로 향했다. 낡고 허름한 3층 건물, 그 위 지붕. 은채가 하늘을 올려다보자, 빗물에 찌든 회색 기와지붕 위에서 강아지 한 마리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예상치 못한 존재의 등장이었다.


강아지는 순백의 털을 가진 대형견이었다. 밤하늘 아래서도 그 순수한 흰색 털은 마치 구름 조각처럼 보였다. 큰 눈망울은 순진무구하게 은채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긴장감은 한순간에 녹아내렸다. 위협적인 시선이 아니라, 그저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었다. 강아지는 은채와 눈이 마주치자, 지붕 위에서 한번 몸을 휘두르더니 꼬리를 반가운 듯 흔들었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이. 그 모습은 그녀에게 뜻밖의 위로를 주었다.


- 어... 강아지?


안도감과 함께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를 덮치려던 불안감은 사라졌다. 은채는 본능적으로 그 강아지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지붕으로 올라가는 낡은 외부 계단을 발견했다. 계단은 오래되어 삐걱거렸고, 덮인 이끼와 먼지는 미끄러워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발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조심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한 발 한 발 오를 때마다 계단이 내는 삐걱거리는 소리는 어둠 속에서 유일한 생활 소리처럼 들렸다.


지붕에 다다르자, 강아지는 반가운 듯 꼬리를 더 크게 흔들며 제자리를 한 바퀴 돌았다. 그녀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장난스럽게 코를 킁킁거렸다. 그제야 안심이 된 은채는 강아지에게 다가가 무릎을 굽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보송하고 따뜻한 털의 감촉. 그제야 그녀는 루나의 귀여움을 발산하며 강아지를 귀여워했다.


- 어구구, 이 예쁜이. 혼자 여기 있었어? 무섭지는 않았고?


강아지는 은채의 손길에 몸을 비비며 만족스러운 듯 작게 낑낑거렸다. 그녀의 어깨 위에도, 품속 퐁실이도 아닌, 이 작은 존재가 주는 위안은 예상보다 훨씬 컸다. 강아지의 체온이 그녀의 차가워진 손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 그림자의 속삭임 -


한동안 강아지와 시간을 보내며 긴장을 풀던 은채는 문득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상기했다. 구체를 찾아야 했다. 지붕 위는 평온했지만, 골목 아래는 여전히 어둡고 스산했다. 하늘의 별들만이 유일한 동반자처럼 지붕 위를 비추고 있었다.


- 혹시... 혹시 여기 이상한 빛 같은 거 보지 못했어? 푸른색으로 반짝거리는 동그란 구슬 같은 거... 여기 유리창 안으로 들어가는 거 봤는데.


은채는 강아지에게 구체에 관해 물었지만, 강아지는 전혀 모르는 표정으로 순진무구하게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큰 눈망울은 그저 갸우뚱거렸고, 귀는 쫑긋거렸지만 이해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녀는 피식 웃음이 났다. 강아지에게 이런 것을 묻다니. 어리석은 질문이었음을 깨달으며 한탄과 함께 강아지에게 질문한 것에 대한 자책을 했다.


- 아이고, 미안.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야. 네가 어떻게 알겠니.


그녀는 강아지의 부드러운 머리를 다시 한번 쓰다듬어주었다. 강아지는 그녀의 손길이 마음에 드는 듯 계속해서 그녀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은채는 강아지에게 작게 인사를 하고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지붕에서의 잠깐의 안식은 그녀의 마음을 달래주었지만, 구체를 찾아야 한다는 사명감은 여전했다. 그러나 골목으로 내려서는 순간, 그녀는 놀라움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골목은 이전보다 훨씬 기묘하고 뒤틀린 형태로 변해 있었다. 아까는 분명 똑바로 보였던 길이 사라지고, 벽면이 서로 뒤섞이며 끝없는 미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존재를 지우려는 듯, 공간 자체가 끊임없이 변형되는 것 같았다.


골목은 걸으면 걸을수록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좁아지기도 하고 늘어나기도 했다. 방금까지 넓었던 구간이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좁아져 몸을 웅크려야만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통로가 되었다가, 이내 갑자기 천장도 보이지 않는 거대한 통로로 변해버렸다. 그녀의 발밑을 비추던 희미한 가로등은 이제 완전히 혼란스럽게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심박수처럼 불규칙하게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하며 그림자들을 정신없이 흔들었다. 빛이 사라진 순간, 어둠 속에서 알 수 없는 존재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은 차가웠고, 비웃는 듯했다.


그때, 등 뒤에서 싸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피부 아래로 스며드는 듯한 차가움. 루나의 몸은 이 추위를 평범한 인간보다 훨씬 예민하게 감지했다. 온몸의 털이 다시금 곤두섰다. 그녀의 고양이 귀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바람 소리, 혹은 그 바람 소리 뒤에 숨겨진 또 다른 기척을 잡아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위협. 분명한 위협이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돌아본 은채의 눈에 충격적인 광경이 들어왔다. 그녀가 방금 걸어왔던 골목 벽에 드리운 거대한 그림자가 기괴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벽의 그림자가 아니었다. 마치 먹물처럼 짙은 검은색의 실체 없는 존재였다. 사람의 형상인 듯했지만, 팔다리는 비정상적으로 길고 구부러져 있었고, 머리는 뾰족하게 솟아 있었다. 마치 고통받는 사람의 영혼이 그림자 속에 갇힌 듯한 형태였다. 그 존재는 벽에 완전히 밀착된 채 마치 물속에서 헤엄치는 해파리처럼 유연하게 흐느적거렸다. 그 움직임은 마치 그녀를 향해 손을 뻗는 듯했다. 형태는 흐릿했지만, 그 의도는 분명했다.


놀란 은채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퐁실이를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몸은 차갑게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의 심장은 쿵, 쿵, 쿵. 마치 망치 소리처럼 그녀의 고양이 귀에 직접적으로 울려 퍼졌다. 그녀는 얼어붙은 채 그림자를 응시했다. 공포 속에서도 그녀의 시선은 그림자를 떠날 수 없었다. 이 존재가 왜 자신에게 나타난 것일까. 그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모든 불확실성이 이 그림자 속에 응축되어 형상화된 것 같았다.


그림자는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더니, 마치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는 듯한 기이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형체 없는 그림자였지만, 그녀는 그 그림자가 자신을 뚫어지라 보고 있음을 분명히 느꼈다. 어둠 속에서 감지되는 그 시선은 물리적인 접촉보다 더 소름 끼쳤다. 그림자는 그녀의 가장 깊은 두려움을 건드리는 듯했다. 순간, 위태롭게 깜빡이던 가로등이 완전히 꺼졌다. 사방이 다시 암흑으로 변했다. 그리고 빛이 돌아왔을 때, 그림자는 벽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하지만 그 스산한 존재감은 여전히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 어둠 속의 추격 -


가로등이 다시 켜지자마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과 함께 엄청난 공포가 은채를 덮쳤다. 그림자는 사라졌지만, 그 존재는 분명 그녀의 뒤 어딘가에 숨어 자신을 노리고 있을 터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맹수가 숨죽여 그녀의 숨통을 노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수 없었다.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고양이처럼 유연하고 빠른 몸놀림으로 좁은 골목을 질주했다. 발소리가 축축한 시멘트 바닥에 울려 퍼지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오직 이 공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의 심장은 쿵쾅거렸고, 폐는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 제발... 제발 어디 있어!


그녀는 울부짖듯이 구체를 불렀다. 하지만 구체는 모습을 보여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전에는 항상 그녀의 길잡이였고, 위기 속에서 나타나 주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구체가 그녀를 이 무서운 어둠 속에 홀로 내버려 둔 것 같았다.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절망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눈앞의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알 수 없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녀는 골목의 불규칙한 벽을 의지하며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다. 어딘가에 출구가 있을 것이라는 희미한 희망만이 그녀를 달리게 했다.


그림자는 그녀와 거리를 좁히며 쫓아왔다. 은채는 직접 그림자를 볼 수 없었지만, 그 존재가 서서히 자신을 덮쳐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한기, 그녀의 숨소리에 맞춰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바람 소리, 그리고 고양이 귀에 직접적으로 들려오는, 그녀의 심장을 파고드는 듯한 섬뜩한 진동까지. 그림자는 형태가 없었지만, 그 존재감은 명확했다. 그림자는 그녀의 가장 깊은 불안감과 두려움을 먹고 자라는 듯했다. 그녀의 내면의 어둠이 형상화된 존재 같았다. 어쩌면 그림자는 그녀의 그림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스쳤다.


달리고 달렸다. 폐가 터질 것 같았지만, 루나의 몸은 지치지 않는 힘을 선사했다. 하지만 이 추격은 단순히 육체적인 것이 아니었다. 정신적으로 그녀를 갉아먹는 싸움이었다. 불안감, 공포, 그리고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절망과의 싸움.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몸이 한계에 다다른 듯한 순간, 그녀의 발이 무언가에 걸려 넘어졌다. 낡은 벽돌 조각인지, 혹은 축축한 쓰레기였는지 알 수 없었다.


우당탕!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몸이 나뒹굴었다. 날카로운 돌멩이들이 무릎과 손바닥을 그대로 스쳤다. 얼얼한 통증과 함께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품에 안고 있던 퐁실이도 밖으로 튀어나와 낡은 골목 바닥에 떨어졌다. 루나의 몸을 얻고 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그녀는 연약한 인간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무릎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며, 그녀는 억울함과 공포, 그리고 고독감에 눈물이 차올랐다. 흐릿한 가로등 불빛 아래, 핏빛으로 물든 상처와 검은 그림자 속에서 그녀는 절규하고 싶었다. 세상에 자신 혼자 남겨진 듯한 막대한 외로움이 그녀를 덮쳤다.


눈물 덕에 흐릿해진 시야 사이로, 저 멀리 골목 끝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번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구체였다. 그녀를 쫓는 그림자의 어둠 속에서, 마치 희망처럼 피어난 빛. 구체는 이전처럼 작고 동그란 형태로 빛나는 것이 아니었다. 구체는 자신의 몸을 거대한 빛의 베일처럼 펼치고 있었다. 그 빛은 점차 골목 끝에 있는 낡은 철문과 한 몸이 되어가는 듯했다. 철문은 점차 푸른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구체가 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다음 출구. 그녀의 탈출구. 구체가 그녀를 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때, 등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기괴하게 늘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림자의 차가운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려 위협적으로 뻗어오는 듯했다.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은채는 떨리는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퐁실이를 다시 품에 안았다. 고통을 참고 자리을 박차고 일어났다. 피 묻은 무릎과 손에서는 다시금 알 수 없는 에너지가 솟아나는 듯했다. 그녀의 내면에서 솟구치는 생명력이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뒤에서 그림자가 뻗은 손이 닿기 직전, 은채는 골목을 달려 구체가 되어가는 철문으로 몸을 던졌다. 푸른빛이 그녀의 몸을 감쌌고, 차가웠던 그림자의 손은 허공을 움켜쥘 뿐이었다. 어둠 속의 공포와 싸워 얻어낸 마지막 희망을 향해, 은채는 그렇게 모든 것을 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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