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치 레스토랑 '르꼬숑'의 76번째 이야기
르꼬숑
사전 지식이 그다지 많지는 않은 집이지만 뭔가 특별함을 얻고 싶어 찾아간 곳이다. 하지만 기대 이상의 행복함을 누리고 왔다. 미쉐린가이드 1스타의 위엄을 실감한 곳!
찾기는 쉽지가 않다. 그냥 일반 슬라브식 가정집을 식당으로 사용하는 것이라 외관이나 인테리어가 뛰어난 것은 아니다. 입구에 걸려있는 프랑스 국기가 프렌치 레스토랑임을 항변하고 있다고나 할까? ㅎㅎㅎ
76번째 "미쟝센(Mise-en-scéne)"을 마주하는 순간이다. 마리아주에 일가견이 있는 수준이 아니라면 별도의 와인코스도 함께 선택해 주는 것이 좋다.
제일 먼저 메뉴의 이름이 적힌 종이 한 장과 함께 샴페인이 서브된다.
《바스락거리기》
Coquillette Grand Cru Les Cles
그렇다. 식전주로서 스파클링 와인은 더할 나위가 없다. 이미 오픈된 보틀에 1/3 정도 남아 있는 샴페인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보고 적쟎이 실망했지만 힘차게 솟아오르는 버블을 보면서 시간이 많이 경과되지는 않은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꼬끼예는 100% 피노누와로 만든 것으로 과일향, 꽃향 보다는 풀향과 미묘한 너티함, 그리고 살짝 스파이시도 느껴지는 녀석이다.
그 매력에 빠져 12% 도수를 간과하고 빨리 잔을 비워 버렸다. 웨이터가 추가로 잔을 채워준다. 초반부터 너무 급하게 와인을 마셔 버렸다.
곧이어서 식전빵이 나왔다.
뜨겁게 데워진 빵들이 식욕을 자극한다. 그리고 내가 최애하는 에쉬레 버터ㅜㅜ 드디어 여기서 만나는구나~ 눙물이 앞을 가린다. 스칸디나비아 암염까지 토핑되어 있네ㅎㅎ
그리시니도 있궁ㅋㅋ 과연 내가 식전빵에 이토록 열광한 적이 있었던가? (난 원래 전혀 빵돌이가 아님)
《조우》
인센스 홀더에 담겨진 독특한 아뮤즈 부쉬!
베이컨과 양파 빠떼에 이탈리아산 블랙 트러플 슬라이스를 얹었다. 아마도 향을 주제로 한 듯 하다. 입안에서 어우러지는 향취도 대단했지만 무엇보다 텍스쳐가 압권이었다. 실수로 파스타스틱을 부러뜨리지 않았으면 먹으라고 내어준 것인줄 몰랐을 뻔 했다. 경쾌한 서곡으로 코스를 이끌어 낸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두 번째 요리는 감자마들렌과 치즈다.
뭔가 단촐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웨이터가 치즈휠이 담긴 테이블을 들고 온다. '테드 드 무안'이라는 스위스 반경성 치즈를 꽃잎모양으로 필링해서 접시 위에 올려 준다.
마들렌은 강원도 홍감자를 갈아서 구운 것으로 모양은 마들렌이지만 맛은 전혀 달지않고 담백하다. 드레싱을 살짝만 끼얹은 프리셰 그리고 굉장히 크리미하고 풍미로운 이 스위스 치즈와 함께 먹으면 맛이 아주 환상적이다.
프랑스인들의 어릴 적 추억인 마들렌과 어릴 적 강원도 감자에 대한 추억의 랑데뷰를 기획했던 것일까? #정상원셰프 의 문학적 감수성과 상상력이 '미쟝센' 코스에 대한 기대감을 한층 끌어 올려주는 대목이다.
《알뤼르》
이런 기대감의 연장선 상에서는 어쩌면 조금 쌩뚱맞을 수도 있지만 프랑스 코스요리에는 너무도 당연스러운 에스까르고가 나왔다. "익숙한 동작은 찬연하다"는 셰프의 코멘트가 피식 웃음을 머금게 한다. 씨알 굵은 달팽이에 바질, 버터, 올리브오일 만으로 간을 했다. 이전에 접했던 에스까르고 중 단연 최고다. 훌륭하다.
《이어지다》
아직도 샴페인에 취해 있을 무렵, 화이트 와인이 서브된다. 알자스 지방의 리즐링으로 만든 와인이다. 프랑스 와인이면서도 독일을 연상케하는 품종과 날씬한 보틀….
그래서인지 앞서 마신 샴페인처럼 긴장감이 있고 힘이 느껴졌다.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코스의 연속을 암시라도 하는 것인가.
《노란 겨울》
겨울에 더없이 좋은 뜨거운 어니언스프가 나왔다. 역시나 프랑스 가정식에 빠지지 않는 요리가 되겠다. 특별한 것이 있다면 스프 속에 알자스 지방의 치즈파이인 퀴시 플람베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적당량을 함께 찍어 먹으라며 내어 준 머스터드 소스도 독특했다. 뭔가 시트러스함이 베어 있어 별도로 제조한 것인듯 싶었다. 다 먹을때 까지 식지 않는 스프는 감사함으로 다가왔다.
《곡식의 비밀》
다음은 부야베스, 해산물 요리가 되겠다.
이 역시도 심심하지 않았던 것은 프레골라라는 파스타가 조커 역할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감칠맛의 꽃가리비도 훌륭하고 담백한 달고기도 맛있었지만 간간히 씹히는 프레골라가 재밌었다. 꾸스꾸스보다 휠씬 개구쟁이 같았다. 그 옆에서 마구잡이 춤을 추는 당근 가니쉬도 더없이 흥을 돋우어 주었다. 게다가 사프란까지ㅜㅜ 아~ 정말 매력적인 요리들에 흠뻑 빠져든다 ㅜㅜ
《세월의 더께》
원래 메뉴에는 피노누아라고 적혀 있었지만 서브된 것은 까오흐 말벡! 메인 요리가 양고기에서 쇠고기로 바뀌었기 때문에 마리아주 와인이 변경되었다는 말씀이시다. 블랙와인이라고도 불리는 프랑스 남부 카오흐(cahors) 지방의 말벡은 오랜 숙성으로 유명하단다. 알고보니 오쎄루아라는 품종이 바로 이것이더라는ㅋㅋㅋ
새로운 와인이 나오는 것은 식사의 변조를 의미한다.
남아있는 화이트 와인을 얼른 마셔 버렸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나의 실수…..ㅠㅠ 바로 뒤에 따라 나오는 정상원 셰프의 주제곡과도 같은 새우요리와 페어링했으면 더 없이 좋았을 것 같았는데 무척 아쉽다.
《기다림》
그러게나 말이다…. 기다릴껄….
먼저 접시가 나오고 비스크 소스를 부어준다. 4시에 오는 어린왕자를 3시부터 설레라고 말해주는 듯 하다. 어쩌면 새우껍질과 새우머리로 만들어 낸 비스크소스가 감자와 새우로 만든 크로켓을 기다리는 건 당연한지도 모른다.
잠시 후 정말로 어린왕자가 등장한다. 미몰레트 치즈가 입혀진 감자새우 크로켓과 함께 말이다. 크로켓을 조금씩 잘라서 비스크 소스에 적셔 먹으면 환상적인 풍미가 입 안을 가득히 메운다.
아…
여기에 알자스 리즐링 한 잔이 겹쳤더라면….ㅠ ㅠ (물론 레드와인과 함께해도 충분히 좋았긴하다 ㅎㅎㅎ)
《라 비앙드 로즈(la viande rouge)》
얇은 한우 1++ 알치마살은 두툼한 송화버섯과 어울린다. 그래도 메인인데 하며 씹는 맛을 아쉬워할 것을 고려했는지 두께감있는 한우 1++ 보섭살을 얇게 저민 꽃송이버섯과 매칭해 놓았다. 포르치니 스테이크소스가 너무나 매력적이다. 되직하지 않아 잘 스며들고 다른 버섯향과 어울림이 좋았다. 작은 크기의 스테이크라서 자칫 소홀할 수도 있을텐데 완벽한 시어링에 굽기도 적당해서 몇 조각의 음미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이어서 흔히 식사 중간에 입맛을 가시는 용도로 나올법한 치즈와 셔벗이 첫번째 디저트로 나왔다.
《눈 발자국》
노르망디 꾸덩스산 까망베르는 차라리 크림치즈에 가까웠다. 크리미한 식감에 고급스럽게 녹아지는 스윗함이 여느 까망베르와는 확연히 다르다. 표면에 피어있는 흰색 곰팡이는 모든 일과가 끝나버린 겨울을 의미하는 듯 했다. 아직 곰팡이가 피지 않은 까망베르 한 쪽 위에는 도리지꽃을 올렸다. 곰팡이 핀 것과의 맛 차이를 느끼진 못했지만 쎈스있는 플레이팅이 아닐 수 없다.
《오래될 그리움》
한라봉으로 만든 그라세를 소복한 쿠키 가루 위에 올리고 브랜디를 살짝 끼얹었다. 그 위에 다시 피스타치오 후레이크를 뿌렸다. 쿠키는 텁텁해서 아이스크림의 상큼함을 해친다는 나의 고정관념을 깨고 모든 것이 조화롭게 어울렸다. 셔벗의 개념이 아니었기에 훌륭한 디저트가 되었다. 멋진 식사에 강한 인상으로 방점을 찍는 기분이 들었다.
《장소는 시간의 이름이다》
마지막으로는 역시나 전통적인 디저트답게 쇼꼴라케익이 커피와 함께 서브되었다. 쵸코케익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없어도 좋을만한 순서였다. 하지만 나무등걸에 올려져 나온 쇼꼴라의 맛은 황홀하기만 했다. 꾸덕한 부라우니 같은 식감에 시나몬 향이 매력을 더해 주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살짝살짝 씹히는 체리는 내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럼주에 졸인 마라스키노'가 아닐까하는 기대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쇼꼴라케익은 고목을, 그 위에 뿌려진 슈가파우더는 세월의 흔적을, 그리고 데코로 세운 허브 한 꼭지는 새로운 시작의 탄생을 의미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오후의 노래》
에티오피아 게이샤를 핸드드립으로 내린 커피는 쇼꼴라 케익과 잘 어울렸다. 후레쉬한 신맛이 달콤함 사이 사이로 파고든다. 평소의 3배나 되는 와인을 마셔서 취기가 오른 상태이지만 커피의 향기로움에 또 한 번 취했다. 무리한 부탁인 줄 알지만 커피를 한 번 더 내려 달라고 했다. 오로지 커피만을 즐기며 와인의 취기를 달랬다.
그렇게 2시간 30분 동안의 식사를 마쳤다.
내 인생에 이런 호사가 다시 있을까 싶었다.
어느 것 하나 흠잡을 곳이 없었던 '미쟝셴' 와인코스!! 맛이나 플레이팅은 말할 것도 없고 셰프의 감성이 녹아있는 스토리라인을 따라 구성되는 코스, 그리고 와인 마리아주가 탁월하다. 음식에 따라 다양하면서 너무나 적절한 커트러리와 테이블웨어의 세팅도 칭찬할 만 하다.
'르꼬숑'의 다음 이야기가 기대된다.
모든 식사가 마친 후 각 메뉴가 서브될 때마다 함께 제공되었던 네이밍 카드와 셰프의 코멘트를 모아서 봉투에 담아 준다. 그리고 밀랍을 녹여 봉인, 르꼬숑의 문장과도 같은 '드러눕돼지' 형상의 스템프를 찍어 준다. 마지막 이벤트 하나까지 세심하고 위트가 있어 좋았다.
배가 불러도 기분이 나쁘지 않을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던… ㅎㅎㅎ (난 원래 과도하게 많이 먹으면 기분이 나빠지는 스퇄임ㅋㅋㅋ)
PS. 식사 후기로 이렇게 긴 글을 써보기는 처음이다. 그 만큼 인상 깊었고 행복한 기분이었다는 뜻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