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ㅎ] ㅎㅎ... 이상한 여행 중 발견한 것

닫히지 않는 서랍과 열려가는 마음

by 영선코

거실에서 마주한 이방인


승무원으로 다양한 도시를 돌며 수많은 인종과 문화를 경험했지만, 내 인생 최대의 문화 충격은 의외로 멀리 있지 않았다. 바로 우리 집 거실이었다.


결혼 초, 시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부가 제일 많이 부딪히는 건 거창한 이유가 아니다. 결국 사소한 생활 습관이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들었지만, 이 신비로운 취항지에 불시착한 지 6년째가 된 지금, 나는 그 말의 의미를 매일같이 깨닫고 있다.


그 문화 충격의 정체는 다름 아닌 남편의 ‘서랍 열어두기’ 습관이다.


그에게 물건을 찾는 일이란, 목표 지점에 도달해 물건을 손에 쥐여주는 것까지가 임무의 전부인 듯하다. 부탁한 물건을 건네받고 뒤돌아보면, 부엌 찬장과 서랍이 죄다 입을 벌리고 있다.


처음엔 도둑이라도 든 줄 알았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돌아온 집. 거실 한복판에 입을 벌린 채 남아 있는 양말 서랍장을 보면 화가 울컥 올라왔다. 아이가 부딪히기라도 하면 어쩌나, 언제까지 내가 이 서랍을 닫아줘야 하나 싶었다.


이러다 남편이 밖에서 바지 지퍼도 안 잠그고 다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는 나 자신이 우습기까지 했다.



서랍을 밀어 닫으며 시작하는 하루


결혼 6년 차에 접어든 어느 순간부터, 그 열려 있는 서랍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가 등원을 한 후, 널브러진 거실을 정리하며 여전히 열려있는 서랍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우리 남편이 무사히 출근했구나.’

‘오늘도 우리 가족이 평범한 하루를 살았구나.’


닫히지 않은 서랍은, 그 자리에 누군가 살고 있었다는 가장 확실한 흔적이었다.


시간이 만들어 준 해탈인지, 아니면 내가 이 낯선 여행지에서 배워온 적응의 기술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제 나는 서랍을 보며 화를 내기보다 조용히 밀어 닫으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트와 화살의 진짜 방향


돌이켜보면 결혼이라는 제도는 참 이상하다.


우리는 여행을 갈 때


"이탈리아에 가서 제대로 된 파스타를 먹을 거야"

"브라질에는 콜라 말고 과라나를 마실 거지"

"두바이에 가서는.. 아니 두바이에 두쫀쿠가 없다고?" 라며 목적지에서 즐길 거리들만 찾는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시작은 분명 상대방을 향해 있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에게 더 잘해줄 수 있을까 하는 애정 어린 하트도, 너 때문에 내가 지금 불행하다며 쏘아대는 원망의 화살도, 처음엔 모두 내 밖의 타인을 향해 날아간다.


하지만 내가 이 낯선 여행지에서 결국 온전히 알아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라는 존재였다.

나에 대한 깊은 이해와 내 삶을 쥐고 가는 주체적인 태도가 없다면, 아마 나 역시 평생 배우자 탓, 자식 탓만 하며 늙어가는 어리석고 옹졸한 어른이 되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를 먼저 발견하고 온전히 서야만 비로소 상대도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나의 밑바닥을 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너를 사랑해서 선택한 결혼이지만, 결국 나 자신을 온전히 사랑할 줄 알아야 이 무모하고 복잡한 여행을 제대로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결혼이 쓴 나


나 역시 그랬다. 결혼이라는 굽이굽이 여행길에서 수없이 화살을 쏘아대고 분노하며 헤맸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내가 그렇게 견고하다고 믿었던 나의 기준과 성격이 사실은 꽤나 연약하고, 때로는 꽤나 모난 것들이었다는 것을.


“내가 이렇게까지 화를 낼 사람이었나.”

그 질문 앞에서 몇 번이나 당황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내가 이만큼 견디고 살아낼 수 있는 사람이구나.”


결혼은 나를 바꾸기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끝없이 보여주었다. 내가 몰랐던 나의 모서리와, 내가 생각보다 단단한 사람이라는 사실까지도. 어쩌면 사람이라는 존재는 타인을 통해서만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아마 타인을 통해 나를 바라볼 수 있는 가장 처절한 여행길일지 모른다.


남편이 열어놓고 간 서랍을 툭 밀어 닫으며 생각한다. 이 여행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닫힌 수납장이 아니다. 서로의 어긋난 서랍을 밀어 넣으며, 조금씩 살아가는 방식에 익숙해지는 과정에 가깝다.


내가 이 여행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나는 내 안에 이런 불덩이가 숨어 있다는 것도, 누군가의 낯선 습관을 조용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것도 끝내 알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내가 결국 나를 온전히 바라보고 있나' 하는 존재에 대한 물음도 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여행지가 있지만, 나에게 결혼은 그 어떤 도시보다도 낯설고 신비로운 곳이었다.


그리고 그 여행에서 발견한 것은,

결국 나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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