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고 가벼운 삶

[주간 브레드 가을호 : 외롭지 않은 순간들] 중에서

by 김영지


낡고 가벼운 삶




내 조국의 우울을 생각했다. 누군가는 몰래 거짓을 쌓는 동안 누군가는 웃는 얼굴 뒤에 죽음을 삼키는 슬픔을 숨기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의 거짓과 슬픔을 마주하며 함께 어떠한 고통을 느낀다. 그것은 더 가지려 했던 가진 자에의 분노이기도 하고, 우리가 쉽게 뱉는 말들이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었음에 느끼는 슬픔이기도 하다.


그들의 기사를 접한 날, 잠자리에 들기 전 이를 닦았다. 오래된 타일이 빼곡히 박힌 화장실에서 낡은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지켜봤고 입안 가득한 거품을 뱉으려 작고 투박한 세면대를 바라봤다. 어떤 이의 우울과 내가 이겨낸 우울을 생각했다.


낮에는 우리 집의 오래된 가스 스토브 중 하나가 고장 나서 시설팀의 스탭이 다녀갔다. 그의 이름은 브루스였다. 백발에 얼굴 가득 수염이 자란 브루스 아저씨는 너무나 다정하게 이곳저곳을 두드리며 문제점을 찾았다. 그는 누가 봐도 동양에서 갓 온 얼굴을 한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물었다. 알고 보니 그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참전용사였다. 그의 아버지는 전쟁에 참여하러 한국에 갔지만 평생 한국을 사랑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언제나 한국에 대해 좋은 이야기만 들어왔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 기업들은 어찌나 제품도 잘 만드는지! 샘성과 현다이를 칭찬했다. 나는 그의 아버지에게 고맙다고 그에게 대신 말했다. 진심이었다.


묵직한 중저음으로 쉬지 않고 수다를 떨던 그는 잠시 나가서 스토브에 낄 새로운 열선을 가져왔다. 새것을 끼고 냄비에 물을 담아 한참을 끓여봤다. 스토브는 조금 기울어서 냄비가 그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우리가 사는 이 기숙사는 60년도 더 넘은 오래된 건물이라 이곳저곳 오래된 부품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뭔가를 고치려고 해도 딱 알맞은 부품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딱 맞는 것을 찾으면 꼭 가져와서 새로 끼워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말해주지 않아도 나는 조금 기울어진 스토브에 맞춰 살았을 건데. 그의 말에 그 과정이 좀 더 즐거워질 것 같았다.


현재 우울을 겪고 있는 어떤 이는 우리집을 보자마자 부정적인 말을 쏟아냈다. 그에게 이 집은 오래되고 낡아서 부러워할 것이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저녁의 나는 낡은 나의 화장실에서 이를 닦다가 문득 지금 내 삶이 얼마나 평안한지 생각했다. 나의 삶에 쌓인 작은 친절들을 생각했다. 이 오래된 집이 주는 아늑함과 그 안을 채운 낡고 유용한 것들을 생각했다.


한국을 떠날 준비를 하며 우리는 수많은 것을 버리고 다른 이들에게 팔고 또 주었다. 덜 갖추고 산다고 자부했는데도 가진 것이 그렇게나 많았다. 자꾸만 버릴 것과 남길 것을 생각하는 과정이 피곤했다. 미국에 살았던 이들은 미국에서 사는 동안 대부분 남들이 쓰던 것을 가져와 살았다고 했다. 왠지 기대됐다. 낡았지만 우리의 필요와 취향에 맞는 것을 발견하면 얼마나 기쁠까.


이곳에 오니 낡은 것을 쓰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모두가 가난한 학생이긴 매한가지여서 학교에는 서로 사용하던 물건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뒀다. 학생들은 더 이상 쓰지 않는 물건은 가져오고 자주 들러 필요한 물건을 가져갔다. 숟가락부터 책, 옷, 가구까지 엄청나게 다양한 물건이 있다. 백발이 성성한 봉사자들이 느릿느릿 컴퓨터에 우리 이름을 치며 물건을 내어주었다. 우리는 그의 느린 타자를 기다리며 우리 이름 스펠링을 천천히 불렀다. 그럴 때면 살짝 웃게 됐다.


우리를 초대해주는 가정마다 중고 가구를 가져와 쓰고 있었다. 오래된 소파에 앉아 대접해주시는 차를 마시면서 눈앞에 보이는 나무 소파 테이블을 오랫동안 지켜봤다. 이곳저곳 벗겨지고 닳아 있었는데 제 역할을 잘 하고 있었다. 그 위에 놓인 컵들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그게 보기 좋았다. 도착해서 처음 갔던 타코 가게에서 일하던 백발의 친절한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의 느낌이었다. 오래돼도 일할 힘이 남아있다면 할 수 있는 것, 오래되고 그래서 유행에 뒤처져도 제 역할을 한다면 쓰임 받는 것, 그게 좋았다.


그리고 아무도 나의 겉모습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제 입었던 옷을 다시 주워 입고 헝클어진 머리로 집을 나서도 마음이 편하다. 더운 날엔 가볍게 추운 날엔 겹겹이 옷을 입었다. 이 시골 마을에서 어떤 유행도 따를 필요 없었다. 우리의 생활은 단순해지고 그래서 집중해야 할 것에 시간과 마음을 쓸 수 있게 됐다.


나의 우울했던 날들은 참으로 길었다. 하고 싶었던 일을 포기해서, 관계가 어려워서, 그냥 남들과 비슷한 성정이라면 편하겠는데 그렇지 못해서, 외모가 맘에 들지 않아서, 연애가 어려워서, 공부가 괴로워서, 나에 대한 어떠한 이미지에 반항하고 싶어서, 갖춰야 할 것이 많아서, 세상의 수준은 자꾸만 높아지는데 나는 그리 살 수 없어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서.


우울을 이겨내는 데에는 어떤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나의 마음을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가끔은 함께 울어주고 내가 일어나는 것을 지켜봐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 자체가 바로 최선의 위로였다. 나의 노력은 나와 타인에게 쏠려있는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내가 남보다 갖지 못한 것, 부족한 것, 나의 슬펐던 일들과 혹은 너무나 빛났기에 지금에 집중할 수 없게 하는 순간들. 그런 것들이 모두 있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자꾸만 나의 삶은 슬퍼진다. 그리고 슬퍼할수록 누군가를 질투하고 미워하게 되고, 삶은 점점 내 손을 벗어난다.


갖고 싶은 것을 갖고 나와 타인은 나의 기준에 맞아야 하며 남들에게 인정받는 외모와 경력을 갖는 것. 우리는 그런 것들에 너무나 쉽게 매료된다. 그것을 갖춘 이의 삶을 놓고 갖추지 못한 나의 처지를 바라보면 비참해진다. 그러나 쉽게 얻어지는 것은 가치 없는 것들뿐이다. 쉽게 얻은 재력과 인기로 무너지는 이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너무나 많이 들어왔다. 그리고 타인을 가볍게 여기기 시작하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자신이 아는 것이 그의 전부라 믿게 된다.


평안한 가운데 여전한 가벼울 때에 범하는 나의 실수들을 떠올렸다. 오늘밤 나의 고민은 어디를 향해 있는가. 나의 관심과 사랑과 비난은 어느 곳을 향해 있는가. 나는 여전히 너무 많은 것을 갖고 판단하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늘 지키고 싶은 오늘의 평안은 가진 것에서 온 것도, 나의 경력에서 온 것도 아니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낡고 가벼운 것들과 서로를 지켜보는 조용한 시간과 작은 친절들일지도 모른다.




2019년 10월 17일 목요일, 김영지

[주간 브레드 가을호 : 외롭지 않은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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