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꼰대냐?’라고 묻는 친구가 늘어나고 있다. 나이 서른이 넘어서고 어느 정도 사회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니 스스로가 꼰대인지 자기검열 하는 경우가 많아진다는 이야기다. 나 역시 한마디 하고 싶을 때마다 ‘내가 꼰대인가?’라고 스스로 되짚어보는 경우가 늘었다.
예의를 갖춰 말을 한다거나 손님이 오면 인사를 해야 한다거나 사무실 책상은 남 보기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는 정리해야 한다, 같은 것들. 나에겐 극히 기본적인 일들이 ‘어떤 이들’에겐 기본이 아닌 경우를 접할 땐 마음이 불편해진다. 대체 왜 저럴까 하고 말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20대 초중반일 때 우리 세대를 지켜봤던 윗세대들도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어’ 우스갯소리로 고대 그리스나 기원전 1700년경 수메르 점토판에도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를 비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요컨대, 꼰대 논쟁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수없이 많은 세대를 거듭해오며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꼰대가 된다는 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늘 자기가 서 있는 위치에서만 바라볼 테니 말이다.
‘꼰대’가 욕을 먹는 건, 그냥 제 하고 싶은 대로만 산다는 점 때문이다. 소통하려 하지 않고, ‘나만 옳아’하는 그런 생각들 말이다. 어릴 땐 부모가 제 마음을 몰라준다며 하고 싶은 대로 살 거라던 아이가 부모가 되면, 이제야 부모 마음 알겠다며 부모 말 들으라며 자식을 통제하려는 경우나, 군대에서 계급이 낮을 땐 부조리 타파를 역설했던 병사가 선임이 되자 어느새 스스로가 부조리의 중심에 서 있더라 든지 하는 경우들 말이다.
막 사회에 진입할 때, 아무래도 기존의 사회시스템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청년들은 새로운 환경에 노출되면 이리저리 부딪힐 수밖에 없다. 당연히 그 과정이 유쾌할 리 없다. ‘너 그렇게 하면 안 돼’라는 말이 어찌 좋게 들리겠는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습관과 행동을 갑자기 바꾸라고 강요하는데 마찰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때로는 불쾌한 경우도 많이 접한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사생활을 지나치게 궁금해한다거나, 하대한다거나, 불합리한 업무지시를 한다거나, 열정을 강요한다거나 같은 것들 말이다. 우리가 처음 접하는 환경에는 배워야 할 부분과 바꿔야 할 부분이 늘 공존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그걸 구분할 수 있는 능력과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란 무엇일까. 나는 시대적 한계를 인정하는 거라고 말하고 싶다. 가끔 산다는 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나름의 대답이기도 한데, 삶이란 여과장치와도 같아서, 윗세대로부터 받은 좋은 것과 나쁜 것들을 거르고 걸러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고 나면 찌꺼기만 가득 남겨지는 거라고 말이다. 씁쓸한 이야기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있을 수 있고, 우리가 있었기에 다음 세대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서로를 비난하기에 앞서 그냥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해주면 그만인 것들이다.
요즘 ‘젊꼰(젊은 꼰대)’이라는 말까지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예전의 청년들은 사회생활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꼰대’라 불릴 나이가 되었다면, 요즘은 때에 따라서는 사업이나 활동 영역에서 기성세대 위치에 비교적 빠르게 접근할 수도 있기에 ‘젊꼰’이 등장하는 듯하다. 문제는 젊은 나이에 어느 정도의 지위에 올라서다 보니, 자신에게 오는 비판은 ‘꼰대 소리’로 치부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본인보다 어리거나 직급이 낮은 이에게 강요하는 데 있다. 그들이 자신만의 ‘기본’을 들먹이며 누군가의 ‘기본’을 무시하고 있는 풍경에 때로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꼰대란 무엇인가. 자신이 생각하는 기본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을 꼰대라 부르는 건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의 기본과 나의 기본이 무엇인지 서로 이야기하고 합의해가는 과정이 필요한데,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중 어느 한쪽이 입을 꾹 닫고 있거나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라면,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상황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려면 상대를 고려하고 배려하며 상대의 처지에서 한 번쯤 생각해야 한다. 상대를 고려하고 배려하는 것, 그리고 상대의 처지에서 한 번쯤 생각하는 것. 말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에게 필요한 것인데, 요즘은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이런 마음이 다 부족한 것 같다.
‘어른들은 다 꼰대야’, ‘요즘 젊은이들은 이해할 수 없어’라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 사람은 또 생의 이행 주기에 따라 서 있는 위치도 변하기 때문에 그에 맞춰 생각 또한 바뀌게 마련이다. 문제는 예전에 서 있었던 위치는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늘 자신과는 다른 위치에 선 이들도 있다는 점을 꾸준히 생각하고 생각해야만 한다.
사실 꼰대를 욕했던 우리가 꼰대가 된다고 생각하면 끔찍할 수 있다. 나는 요즘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미 우리는 꼰대라고, 그러니 그냥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라고. 다만 네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간에 합의점을 찾기 위해서 이야기를 시작하라고 말이다. 나도, 당신도, 우리는 이미 꼰대가 되었거나 꼰대가 될 예정이다. 중요한 건,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끊임없이 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꼰대에서 더 나아가면 개꼰대가 된다. 그러면 답도 없다. 꼰대가 되길 무서워하지 말고, 개꼰대가 되는걸 무서워하자